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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유정스님 - 섬세한 듯 강렬한 구국의 표상

 

유정스님 - 섬세한 듯 강렬한 구국의 표상


“스님은 의분이 폭발하여 손바닥을 맞대며 이해를 따질 때에는 옛사람의 절개와 호협한 기상이 있었고, 말안장을 어루만지며 눈을 돌이키니, 그 뜻은 요사스런 기운을 쓸어버리는데 있었으므로 마치 늙은 장군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었다.”



국난 일자 외교 . 전술가로 명성

10여곳 봉안…대부분 보존 양호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사명당 유정스님(惟政, 1544~1610).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시대 문장가 허균은 유정스님의 인품과 공덕에 대해 이 같이 찬탄했다. 유정스님은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은 선사이자 승병의 지휘자, 전략과 외교에 능통한 외교관으로 크게 기여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승이다.

<사진> 부산 범어사성보박물관에 봉안돼 있는 유정스님 진영.

우리에게는 사명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유정스님은 1544년(중종 39)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속성은 임 씨, 호는 송운(松雲), 사명(四溟), 법명은 유정(惟政),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다. 스님은 1556(명종 11) 13세 나이로 황학산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8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한 스님은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교학과 시로도 명성을 드날렸다.

30대에 들어서는 봉은사 주지소임도 거절하고 수행에 매진했던 스님의 법력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됐다. 스님은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모집하고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전쟁 당시 적과 싸우고, 적군의 군영에 들어가 정세를 파악했으며, 휴전 시에는 성벽을 쌓았다. 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왕명으로 강화사로 일본에 파견돼 외교활동을 펼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이후 스님은 큰 병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에서 요양을 하던 중 1610년(광해군 2) 8월26일 세수 67세, 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이러한 스님의 진영은 부산 범어사, 대구 동화사, 공주 갑사, 밀양 표충사, 영천 은해사 백흥암 등 10여개 사찰에 봉안돼 있다. 대부분 서산대사와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범어사성보박물관가 소장하고 있는 진영은 전신교의 좌상으로 좌안7분면의 모습으로 오른손은 의자 오른쪽 손잡이를 잡고 있고, 왼손은 금속 용머리에 달려 있는 수술의 대를 잡고 있다. 의자 등받이 오른쪽에는 염주가 걸려 있고, 등받이에는 녹색 천이 드리워져 있는데, 천은 두텁게 바른 녹청안료에 백색의 원화문으로 장식됐다.

이 진영에서 표현된 인물상을 살펴보면 목 부분의 주름선조에 선염한 단색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고 머리는 단선을 마치 우점준처럼 겹쳐 그어져 있다. 특히 턱수염은 섬세하게 길고 유연하고 입술은 윤곽선 없이 주색으로 발라 마치 꽃잎을 연상시키기고 있어 인상적이다. 범어사 진영 역시 다른 고승들의 진영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전후에 이모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영 위아래에 일부에서 보이는 박락현상과 얼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30호/ 5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