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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휴정스님 - 용맹함과 인자함이 ‘공존’

 

휴정스님 - 용맹함과 인자함이 ‘공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나라를 구한 조선 중기 대표적인 고승 청허당 휴정스님(休靜, 1520∼1604). 서산대사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스님은 간화선을 지침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을 천명한 한국불교 최고의 선서인 <선가귀감>을 저술하는 등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대선사이기도 하다.


임란 때 승병모아 구국에 앞장

불화 속 모습은 푸근한 노스님
 

<사진> 양산 통도사에 봉안돼 있는 휴정스님 진영.

1520년(조선 중종 15)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난 휴정스님의 속성은 최 씨다. 12세에 양부인 안주 목사(牧使) 이사증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이후 스님은 15세 친구들과 지리산의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다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30세 되던 해에 승과에 급제,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7년 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다”라며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돌며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묘향산에 주석하고 있던 스님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세수 70이 넘었던 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왕에게 달려갔고, 자신이 직접 승병을 통솔해 전쟁터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스님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 1500여명을 모아 중국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평양탈환에 성공하게 됐다. 이에 선조는 스님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지만, 제자인 유정스님에게 물려주고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법랍 67세, 세수 85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이러한 휴정스님의 진영은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 공주 갑사, 영천 은해사, 밀양 표충사 등에 모셔져 있다. 전국 각 사찰에 봉안돼 있는 스님의 진영만 20여점에 이르지만, 당대에 그려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통도사에 있는 스님의 진영은 얼굴이 매우 부드럽게 표현돼 있어 인자한 분위기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 진영은 화기는 없으나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의현(1690~1752)의 찬문이 쓰여져 있어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돗자리로 배경이 구분된 2단 구도로 되어 있는 진영은 몸은 왼쪽 부분을 보이고 있으나 얼굴은 인자한 표정으로 정면을 하고 있는 의자상이다.

청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으며, 왼손은 불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 술을 가볍게 만지고 있다. 마곡사, 대흥사, 표충사, 갑사 등지에 모셔져 있는 스님의 진영도 승병 지도자로서의 용맹스러움보다는 인자하고 덕망 높은 고승의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27호/ 5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