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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고승]세염스님 - ‘망국의 한’털고 ‘불국의 길’로

 

세염스님 - ‘망국의 한’털고 ‘불국의 길’로


신라시대 창건된 천년고찰인 나주 덕룡산 불회사를 여법한 도량으로 중창하고 일생을 전법에 힘쓴 조선 초 고승 세염스님(洗染, ?~1415). 원진국사(圓眞國師)로도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은 1340년대 고려시대 조정에서 평장사, 복야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속명이 한룡인 스님의 법호는 세염(洗染),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6ㆍ25때 소실돼…70년대 다시 제작

반측면의 전신상으로 불회사에 봉안


1355년(공민왕 4) 백형인 경룡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스님은 참의벼슬을 지내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김 수 없다”며 망국의 한을 가슴깊이 세기고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만으로 전국을 유랑하던 스님은 오랜 세월에 쇠락한 불회사를 보고 이를 복원하겠다는 원을 세웠다. 불회사 창건 설화에도 이같은 과정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불회사 복원을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탁발을 하기 시작한 스님은 어느 날 저녁 절로 돌아오던 중 산길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이를 본 스님은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호랑이의 목에 걸려있는 비녀를 뽑아 낫게 해 주었다.

<사진> 나주 불회사에 봉안돼 있는 세염스님 진영.

그해 겨울 호랑이는 귀한 집 자제로 보이는 처자를 물어다 절 마당에 내려놓고 갔다. 목숨이 겨우 붙어 있는 처자를 구한 스님은 그녀가 천리 밖 안동 만석꾼 김상공의 외동딸임을 알게 되었고, 함께 집을 찾아 나섰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상공은 불회사 복원불사를 지원했다. 김상공이 시주한 쌀로 대웅전을 중건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자 스님은 길일을 택해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스님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려 지는 해를 붙잡아 두었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 뒤 스님은 기도하던 자리에 ‘일봉암(日封菴)’을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돼 현재는 샘터만이 남아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갈증을 달래주고 있다.

이후에도 전국을 돌며 사찰 중건, 포교활동에 힘쓴 스님은 1415년(태종 14) 입적했다. 이러한 스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세조는 ‘원진’이란 시호를 내려 국사로 추증했다. 불회사는 고려 말에 세운 원진국사 부도(나주시유형문화재 225호)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진영은 중창불사로 인연이 깊은 불회사 영산전에 봉안돼 있다. 영산전에 나한상과 함께 모셔져 있는 이 진영은 가로, 세로 145cm로 채색돼 있다. 반측면의 전신상으로 묘사된 스님은 의좌에 앉아 발을 내려 발판을 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물로는 염주와 불자를 들고 있고, 상단 좌측에 ‘원진국사 청간공 영탱’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진영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후 1970년대 진도에 모셔진 초상을 모본으로 다시 제작된 것이다. 이후 불회사 삼성각에 봉안하고 있다가 1992년 다시 영산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23호/ 5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