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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천안 성불사 마애석가삼존, 16나한

 

천안 성불사 마애석가삼존, 16나한

 

“떠드는 것을 피하고 고요를 구해 왕바위(王巖)에 이르니 / 눈에 가득 그윽한 경치를 말로 하기 어렵네. / 돌 위에 우뚝 선 소나무는 소부(巢父)?是?許由) 기상이요 / 문 앞 늙은 버들은 팽조(彭祖)?遊?老聃) 비슷하네. / 겹겹 두른 산은 깊은 채 얕아 뵈고 / 한 가닥 흐르는 샘은 차고도 맛이 달구나. / 열여섯 응진(應眞)이 여기 머물러 있으니 / 잠시 와서 같은 감실에 묵어감이 기쁘구나.”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2) 선사가 전북 부안 일대를 떠돌 때 지은 시 중 하나이지만 왕바위가 어디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소부와 허유는 요(堯)나라의 은사(隱士)요, 팽조와 노담은 장수한 사람을 말하며 노담은 곧 노자를 일컫는다. 그러나 왕바위에 열여섯 응진이 머물고 있다고 하니 응진은 곧 나한(羅漢)을 일컬음이다. 나한은 대개 불화로 그려지거나 소상(塑像)으로 만들어졌지만 바위에 새겨 놓은 곳이 있으니 어찌 순례자의 발길이 멈추겠는가.

“학 한쌍이 날아와 부리로 쪼아 새긴 부처님”

  새김질 하다 멈춘 ‘미완성의 마애불’

  정교하고 반듯한 부처님과 다른 느낌

천안으로 향하는 길, 하늘은 마치 쪽물을 들여 놓은 듯 푸르고 투명했다. 고약한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으니 바람 또한 먼지 한 톨 머금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산천은 마치 경계를 잃어버린 듯 뭉게구름이 머무는 저 먼 곳까지도 냉큼 달려 갈 수 있을 것만 같이 온 천지가 신선하고 맑기만 했다. 그것은 절집 마당에 올라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안 시내가 거침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대여섯 차례나 성불사(成佛寺)에 올랐어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진설명> 천안 성불사에는 바위 하나에 여래 입상과 삼존불 그리고 16나한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경우는 아직 보고된 바가 없으며 또한 한 면에 삼존불과 16나한이 함께 새겨진 것도 드문 경우이다. 왼쪽이 미완성 여래입상이며 오른쪽에 삼존불과 16나한이 새겨져 있다.

뒤돌아 대웅전에 들어가 참배하려는데 수미단(須彌壇)은 있으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다. 마치 적멸보궁의 그것처럼 말이다. 대신 작은 유리창을 마련해 놓았으니 그곳으로 보이는 부처님은 여래입상이되 그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향 한 자루 사르고 한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님을 뵈러 아예 밖으로 나왔다. 바라보니 큰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은 마멸되어 형체가 흐트러진 것이 아니라 새김질을 하다가 멈춘 미완성의 부처님이었다.

고부조(高浮彫)로 새기려한 듯 골기 형형한 형체만 남은 부처님은 바위 면에서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성불사는 고려 태조 3년인 920년, 혜조대사(慧照大師)가 창건했다. 혜조대사가 절을 창건하러 이곳에 다다르니 이미 학 세 마리가 바위를 쪼아 여래입상과 16나한을 새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란 학이 그만 날아가 버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모습으로 자태를 잃지 않고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설은 성불사가 있는 성거산 정상 부근에 있는 만일사(晩日寺)에도 전해 온다. 만일사 대웅전 옆 큰 바위에도 새기다 만 마애불이 있는데 전해 오는 전설 또한 성불사와 유사하다. 학 한 쌍이 부리로 쪼아 마애불을 새기고 있던 차에 인기척이 들리면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새기기를 여러 차례, 그만 인기척에 놀라 날아갔다가 해가 저물어 더 이상 새기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삼존불의 본존은 설법인의 수인에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걸쳤다.

두 곳의 미완성 마애불은 성불사의 그것이 좀 더 양감이 있으며 만일사의 그것은 흔적으로만 남아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겨우 좌상인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나 학이라는 날짐승과 부리로 쪼아 부처님을 새겼으며 두 곳 모두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더구나 그것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연유에 대해 알지 못하니 더욱 애틋하여 바라보는 눈길이 지순하기만 했다.

성불사의 16나한은 미완성 마애불과 같은 바위 오른쪽에 새겨졌는데 나한들이 이중연화좌에 앉으신 삼존불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삼존불의 본존은 좌상으로 앉아 계시지만 좌우 협시불은 서 있으며 우 협시불은 흑태(黑苔)가 두텁게 끼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 생전 처음 보는 마애로 새겨진 16나한이니 열여섯 분 모두를 찾으려 잠시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예 자리를 잡고 마당에 앉아 찾아나갔지만 서북향으로 향한 바위도 바위려니와 계절에 따라 볕이 얼씬 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 그동안 허탕 친 걸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본존불의 오른쪽은 해가 지날수록 흑태가 심해져 볕이 들지 않으면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해 가을보다 흑태는 더욱 짙어졌으며 그나마 푸른 하늘이어서 볕이 좋을 줄 알았건만 하얀 구름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늘 순례를 떠날 때마다 지관(止觀)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하늘은 푸르되 하필이면 눈앞의 바위에만 볕이 들지 않는 것을 견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볕이 들기를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거두고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스님이 옮긴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 나타나는 16나한의 모습인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 곧 장미나한(長眉羅漢), 가낙가벌차(迦諾迦伐蹉)인 희경나한(喜慶羅漢), 가낙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墮)인 거발나한(擧鉢羅漢), 소빈타(蘇頻陀)인 탁탑나한(托塔羅漢), 낙거라(諾矩羅)인 정좌나한(靜坐羅漢), 발타라(跋陀羅)인 과강라한(過江羅漢), 가리가(迦迦)인 기상라한(騎象羅漢), 벌사라불다라(伐羅弗多羅)인 소사라한(笑獅羅漢), 술박가(戌搏迦)인 개심라한(開心羅漢), 반탁가(半託迦)인 탐수라한(探手羅漢) 그리고 부처님의 아들로 전해지는 라후라(羅羅)와 같은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는 라호라(羅羅), 나가서나(那伽犀那)인 알이라한(耳羅漢), 인게타(因揭陀)인 포대라한(布袋羅漢), 벌나바사(伐那婆斯)인 파초라한(芭蕉羅漢), 주다반탁가(注茶半托迦)인 간문라한(看們羅漢) 마지막으로 취봉산(鷲峯山) 가운데에 거주하는 아씨다(阿氏多)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 불화로 그려지거나 소상으로 만들어졌다면 도상을 하나씩 견주어 볼 수 있겠지만 투박한 모습으로 바위에 새겨진 것을 가지고 도상과 견주는 것 또한 무리였다. 삼존불과 16나한이 새겨진 바위 면에서 상호나 수인의 모습을 그나마 뚜렷하게 살필 수 있는 존상은 본존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모셨다는 것은 알 수 있으되 형체만을 가늠할 수 있을 뿐 상호나 수인과 같은 세부적인 묘사가 모두 생략되고 그 형태만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의 한유(韓愈)가 그랬던가. “하늘과 땅의 형체와 해와 달의 밝음은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와 같을 것이다. 나한의 모습을 온전하게 제대로 새겨 낼 수 수 없었음이 말이다. 무엇이 참이고 또 무엇이 허상일까. 미완성의 여래입상이나 형체만 남은 나한을 앞에 두고 지(止)와 관(觀)을 거듭해도 내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무(無)이거나 허공일 뿐이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 모든 보살과 아라한에게 이르기를, 응신(應身)으로 저 말법(末法)의 세상 속에 태어날 때에 여러가지 모습으로 모든 윤회하는 자들을 제도하라. 혹은 중이 되거나 백의거사(白衣居士)?蛋?재상 또는 총각이나 처녀가 되어라. 이리하여 곧 음란한 여자거나 과부거나 간음하며 도둑질하거나 짐승을 잡아서 파는 사람들까지라도 그들과 함께 일을 하여 부처님의 일을 칭찬하며,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해탈하는 경지에 들어가게 할 것이며, 끝내 내가 진짜 보살이라거나 내가 진짜 나한이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 고 말이다.

그런데 내 어찌 그 모습이 뚜렷하며 섬세하지 않다고 서둘러 발길을 돌릴 것인가. 오히려 원감 충지스님이 그랬듯이 잠시나마 나한과 같은 자리에 머물며 그들을 바라 볼 수 있음을 행복으로 여겨야 할 것 아닌가. 그랬다. 해가 넘어 갈 때까지 너덧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으며 이끼에 덮여버린 나한들을 찾거나 또 지관을 흉내내며 있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그것은 아주 반듯하며 섬세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마애불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답거나 좋다는 단순한 판단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서로 견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서로가 가진 모습대로 대중들 앞에 나투신 불?말理湧?각각의 몫이 있을 뿐 그 어느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낫다는 식의 비교논리로 그 앞에 마주 서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하지 싶었다.

점점 구름은 많아질 뿐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채 1분도 되지 않는 동안 햇살이 비친 것이 전부였다. 성불사를 여섯 번이나 찾았건만 또 다시 16나한의 모습을 다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하게 생겼으니 그들은 아마도 세존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진짜 나한이 아니라고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 특징

14~15C 조성… “자유분방한 16나한”

천안 성불사 마애석가삼존, 16나한상 및 불입상은 시도 유형문화재 제 169호로 지정되었으며 천안시 안서동 성거산 기슭의 성불사 경내에 있다. 불 입상은 미완성인 채 대웅전 뒤에 있으며 대웅전에는 따로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미완성인 불 입상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오른발의 발가락 표현은 뚜렷하게 알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청태(靑苔)가 두텁게 끼어 그 마저도 분명치 않다.

<사진설명> 삼존불은 이중연화좌 위에 앉아계시며 양 옆에 입상의 협시를 두었다. 감실 혹은 동굴 속의 나한은 투박한 모습으로 새겼으며 그 배치는 삼존을 에워싸는 형태로 자유분방하다.

그 오른쪽 옆으로 삼존불과 16나한이 같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으나 바위 상태가 좋지 않을 뿐 더러 청태와 흑태가 해가 갈수록 심하게 끼어 전체적인 모습을 세세히 살피기가 쉽지 않다. 바위의 가운데쯤에 이중연화좌에 앉으신 본존불이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입상인 협시가 있으나 공양상인지 아니면 금강역사인지 뚜렷하지는 않다. 본존은 설법인을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걸쳤다.

나한들은 삼존불의 본존을 중심으로 왼쪽의 9구는 비교적 뚜렷하여 살필 수 있으나 오른쪽은 분간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다. 나한들의 모습은 자유분방하며 전부 감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여 준다. 이렇듯이 바위 하나에 여래 입상과 삼존불 그리고 16나한이 새겨져 있는 경우는 아직 보고된 바가 없으며 한 면에 삼존불과 16나한이 함께 새겨진 것도 드문 경우이다.

다만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4세기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석가삼존?6나한도>가 유일한 경우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의 18대 왕인 의종(毅宗) 장효대왕(莊孝大王)(1127~1173)은 1167년 금신굴(金身窟)에서 1169년에는 산호정(山呼亭) 그리고 1203년에는 보제사(普濟寺)에서 나한재(羅漢齋)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성불사의 마애 석가삼존 16나한 또한 14~15세기 즈음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천안 나들목으로 나가서 바로 우회전해 1km가량 가면 호서대학과 각원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호서대학을 지나면 성불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아파트단지 사이를 빠져나가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바로 성불사 마당이다.

 

[불교신문 2363호/ 9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