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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괴산 원풍리 마애 병좌불 좌상

 

괴산 원풍리 마애 병좌불 좌상

참, 짓궂고 끈질기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서기만 하면 해는 구름 속에 잠기고 기어코 흩어지는 빗발을 연거푸 마주해야 하니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다. 해가 돋을 무렵, 는개가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하늘을 기대하며 새벽의 푸른 기운이 형형할 때 부처님 곁에 다다랐건만 서성이는 순례자의 머리끝에는 이슬방울처럼 는개가 쌓이고 숲 가득히 피어난 구절초는 비에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설하는 바 다 진실이니라… 이 자리에 앉으소서”

 

  나란히 앉아 한 곳 바라보는 二佛竝座 모습

  법화경 ‘견보탑품’의 다보.석가여래 형상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잠시 부처님 곁을 떠나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거닐었다. 이맘때면 마른 벼 이삭의 메마른 가을 냄새가 코끝에 전해져야 하거늘 잦은 비에 시달린 벼들은 향기조차 내 놓지 않고 있었다. 이규보는 햅쌀을 노래하며 “한 톨, 한 알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 / 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으니 / 나는 농부를 부처처럼 존경하건만 / 부처도 굶주린 사람은 살리기 어려우리”라고 했으니 제대로 여물지 못하는 이삭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근심은 곧 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전체의 것인 듯 마음이 짠했다.

<사진설명> 괴산 원풍리에 있는 마애불 좌상은 부처님 두 분이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신다. 이는 〈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같은 자리에 앉으신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부처님 곁으로 다시 돌아 올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노랗게 물들어가는 싸리나무 잎이나 연보랏빛 구절초마저 눈앞에 없었다면 그 긴 시간을 어찌 견뎠으랴. 머리로는 흰 연꽃과 같은 <법화경>을 외우려 애썼건만 마음이 심란하여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지금 흩날리는 는개가 부처님께서 <법화경>의 개경(開經)이라 하는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하자 하늘로부터 내렸다는 꽃비인가. <무량의경>에 “빛을 보고 향기를 맡으면 저절로 배부르고 족함이라”라고 했지만 더 이상 동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부처님의 모습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다만 싱그러운 숲 향기와 구절초 향기를 그러모아 부처님 앞에 공양하니 태양은 없을 지언정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에 이르기를 “나는 일체를 관하되, 널리 다 평등하여 너라 하는 마음.나라 하는 마음.사랑하는 마음.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나는 탐내고 착(著)함이 없고, 또한 한계의 거리낌이 없노라. 항상 일체를 위해 법을 평등하게 설하되, 한 사람을 위함과 같이 하며, 대중이 많을지라도 또한 그러함이니라. … 귀하거나.천하거나.높거나.낮거나.계(戒)를 가졌거나.계를 깨트렸거나.위의(威儀)가 구족하거나.구족하지 못하거나.정견(正見)이거나.사견(邪見)이거나.근기가 날카롭거나.근기가 둔하거나.평등하게 법비(法雨)를 내려 조금도 게으름이 없느니라” 라고 했거늘 이 순례자에겐 아직 분별이 넘쳐난다.

비가 오면 비 오는 그대로를 보면 될 것이고 햇살 가득 비쳐들면 그것대로 또 아름다운 법이거늘 여전히 어떤 절대치를 정해놓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부처님은 바위 하나에 두 분 부처님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앉은 채 한 곳을 바라보는 이불병좌(二佛竝座)의 모습이어서 더욱 햇살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흔히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더욱 눈여겨보고 싶은 욕심에 휩싸여서 말이다.

부처님은 단애를 이룬 큰 바위의 아랫부분에 깊숙이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계셨다. 마치 허공에서 <법화경>의 견보탑품(見寶塔品)부터 촉루품(囑累品)까지 12품을 설하시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나도 덩달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인 허공에 떠서 부처님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어코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셈으로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맞은편의 3번 국도까지 걸어 올랐다. 그곳에 서면 부처님이 영취산의 허공으로 날아올라 허공회(虛空會)를 베풀어 설하시던 견보탑품을 듣던 수많은 대중들처럼 나 또한 그 말씀이 들릴까 싶기도 했었다.

그렇게 부처님이 영원한 진리의 상징인 허공에서 설하신 <법화경>의 11품인 견보탑품에 두 분 부처님이 서로 같은 자리에 앉으신 모습이 나타난다. 바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석가여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대중들 앞에 갑자기 칠보(七寶)로 찬란하게 장식된 큰 탑이 땅으로부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탑 안에는 보정세계(寶淨世界) 부처님이신 다보여래가 계셨던 것이다.

<법화경>에 이르기를 “그 때 부처님 앞에 칠보의 탑이 있으되, 높이는 오백유순(五百由旬)이요, 넓이는 이백오십유순(二百五十由旬)이며,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음이라. … 그 때 보탑 가운데서 커다란 음성을 내어 찬탄하여 말씀하되, 착하고 착하도다.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능히 평등대혜(平等大慧)이며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의 호념(護念)하시는 묘법화경으로써 대중을 위하여 설하심이라.

<사진설명>괴산 원풍리 마애불 좌상의 전경.

이와 같고 이와 같음이라. 석가모니 세존이 설하시는 바는 다 진실이니라. … 그 때 보배탑 가운데 계신 다보불께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불께 드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자리에 앉으소서.’ 그러자 곧 석가모니불께서 그 탑 가운데로 드시어 그 반으로 나눈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셨다” 라고 했다.

곧 한 자리에 두 분 부처님이 앉으신 것이다. 눈앞의 부처님은 바로 이 견보탐품의 이야기를 형상화시킨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두 분 부처님이 나란히 앉으실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두 분 부처님은 그 크기가 비슷하지만 오른쪽의 부처님이 조금 더 커 보이며 감실은 상호가 있는 쪽은 깊지만 무릎으로 내려오면서 얕은 형태로 파져 있다. 그 때문인지 상호는 그나마 알아 볼 수 있지만 밖으로 노출된 무릎부분의 조각은 많이 문드러져 알아보기 힘들며 법의를 걸친 상체 또한 깨져 나간 부분이 많아 수인조차 제대로 살피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머리 주위로는 양쪽 모두 5구의 화불을 새겨 머리를 에워싼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눈길이 머문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오른쪽 부처님의 오른쪽 어깨 끝과 왼쪽 부처님의 왼쪽 어깨 끝에 있는 인면상(人面像)이었다. 더구나 서로의 어깨가 맞닿은 가운데 부분에는 보주와 같은 둥근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으니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세운 것인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대개 아난과 가섭은 삭발한 형태로 있지만 이곳의 인면상은 머리 위로 탑과 같은 것을 이고 있으니 더욱 궁금하기만 했다.

마멸이 너무 심하긴 하지만 눈여겨보면 오른쪽의 인면상은 눈, 코, 입 그리고 이마에 돋은 힘줄이며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탑과 같은 형태의 조각까지도 살필 수가 있다. 왼쪽의 그것 또한 눈매가 사뭇 사나워 보이는 것이 혹시 부처님을 외호하는 인왕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실의 양쪽 끝과 인면상과의 틈이 너무도 바투 있어 얼굴 외에는 새길만한 공간이 없기도 하다. 그리하여 조금은 굳세고 강건한 이미지의 얼굴을 새기고 만 것이라고 말이다. 얼굴 크기와 비례를 가늠해 견주어 보면 그 틈에 도저히 몸을 새길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부처님 머리와 몸에 난 수많은 구멍들이다. 혹자들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이 이 불상을 표적으로 삼아 총을 난사하여 생긴 것이라고 하지만 설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 구멍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왼쪽 부처님의 코를 중심으로 입술과 턱 근처에 난 것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의 가슴과 입술 왼쪽에 난 정도가 탄흔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머리에 난 구멍은 정교하게 뚫어져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탄흔의 특성은 바위에 맞는 순간 그 충격으로 인해 총탄이 맞는 자리 주변의 바위를 깨트리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머리위의 구멍을 눈여겨보라. 그것은 계획적으로 의도된 구멍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용도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진다. 혹시 그곳에 금속 장식을 꽂아 부처님을 장엄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양쪽 부처님 모두 삼도가 간략화된 목을 따라 구멍이 나 있기도 하거니와 조금 전 말한 오른쪽 부처님 어깨 끝의 인면상 또한 작은 구멍들이 외곽선을 따라 뚫려 있으니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대 여섯 시간이 지나 그만 돌아서려고 하는데 햇살이 잠시 비쳐 들었다. 그러나 두껍게 낀 구름이 여간해서 태양을 풀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부처님 앞으로 다가가면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내려오면 다시 햇살이 비쳐들며 쉽게 발목을 놓아 주지 않았다. 마치 숨바꼭질하듯 너덧 번 되풀이 되다가 태양은 또 다시 하늘 가득 덮인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인면상과 무수히 뚫린 구멍에 대한 생각이었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지 누 / 기록문학가

 ■ 특징


하나의 감실 안에 부처님 두 분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97호로 지정되었으며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 124-1에 위치해 있다. 충북 충주에서 경북 상주로 가는 조령(鳥嶺), 곧 문경새재 산기슭에 있는 높이 12m의 바위에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불신 높이 3m에 달하는 부처님 두 분을 하나의 감실 안에 모셨다. 이러한 경우는 드문 예로 마애불로 조성 된 경우는 아직 나라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법화경>견보탑품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한 자리에 같이 앉으신 것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설명> 부처님의 바깥쪽 어깨 끝에 있는 인면상이다. 사진은 왼쪽 부처님 어깨 끝에 있는 것이며 혹시 인왕상을 조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처님은 상호를 제외하고는 훼손과 박락이 심해 그 모습을 제대로 살피기가 쉽지 않지만 좌상이며 머리 위에는 양쪽 모두 5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다. 표정은 근엄한 모습이긴 하나 어딘가 모르게 굳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민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으며 목의 삼도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민머리라고는 하지만 머리에 무수히 뚫려 있는 작은 구멍들에 금속제의 장식이 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법의는 두 분 모두 통견이며 상체의 옷 주름은 그나마 남아 있지만 마멸된 정도가 심해 수인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왼쪽 부처님의 경우 코가 없다. 돌을 깎아 넣은 것인지 아니면 나무나 금속제로 코를 만들어 끼워 넣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경우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예이다. 더구나 코를 떼어내기 위해 주변의 돌을 깨트린 흔적이 없으니 분명 돌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코를 박아 넣은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바깥쪽 어깨 끝에 있는 인면상과 안쪽 어깨 위에 있는 보주와 같은 조각도 이 마애불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이다. 조성 시기는 대략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가는 길 /

중부내륙고속도로 수안보,괴산 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나들목을 통과하여 좌회전 수안보를 지나고 3번 국도를 따라 상주 방향으로 가다가 소조령 터널을 지나면 바로 수옥정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으로 내려가 3번국도 옛길을 따라 200m남짓이면 오른쪽 산기슭에 부처님이 있다. 나들목에서 20~30분 거리이다.

 

[불교신문 2366호/ 10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