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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홍성 용봉사 마애불입상, 신경리 마애불입상

 

홍성 용봉사 마애불입상, 신경리 마애불입상

“한자루 향 사르니 소슬바람에 풍경소리 울리네…”


보물 제355호인 신경리 마애불입상이다. 감실을 깊게 파고 그 안에 부처님을 새겼으며 특이한 것은 머리 위에 비석의 지붕돌과도 같은 모양의 천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들과 산에는 억새가 지천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산야를 수놓는 그 아름다움을 뭐라 표현할 재간이 나에겐 없다. 그것도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그 밝기를 달리하며 빛나는 모습을 대하고 나면 그저 속에 품고만 있을 뿐 밖으로 꺼내지를 못한다. 그것도 이 새벽처럼 옅은 안개에 뒤덮여 흐느적거리듯 출렁이는 억새물결을 본 날은 더더욱 그러하다. 어느덧 안개는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찬란한 동살이 내려 비출 지라도 마음속에 남은 긴 여운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젠 하늘도 지쳤는가 싶었다. 늘 무거운 구름을 끌어안고 있더니 오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아니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옳겠다. 그 때문이었나. 용봉산 용봉사(龍鳳寺)로 오르는 발길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수은주는 밤새 뚝 떨어져 섭씨 9도를 가리켜 쌀쌀했지만 덕분에 새벽 공기는 너무도 신선했으니 이제야 가을이 성큼 다가 온 것인가 싶었다. 길섶의 풀은 조금씩 그 색을 달리하고 더러 성질 급한 나뭇잎들이 떨어져 뒹구는 가파른 산길, 1km 남짓 걸으니 일주문이었다. 
               

    
작은 절집마당을 쓸고 있는 스님 한 분이 빤히 보였지만 서둘러 절집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일주문 왼쪽 산기슭에 마애불이 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자 이윽고 갓 산등성이를 넘은 순한 햇살이 마애불에게로 비쳐들고 있었다. 주섬주섬 향을 꺼내 사르며 예경을 올리곤 부처님을 우러렀다. 부처님은 얼굴 가득 비쳐든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입은 금세라도 말을 하려는 것 같이 앙다물었다.
                                                                     신경리 마애불입상의 대좌와 발이다.

그러나 몸은 그늘에 덮여 있었으며 조각 또한 또렷하지 않아서 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엄숙함은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났다. 마애불 앞에 곧추 서서 그늘을 만드는 나뭇잎 때문에 짙은 그늘이 한 차례 얼굴을 가리면 어느덧 잠시 해가 들기를 반복하니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찬 공기 탓에 향연(香煙)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에서 스러지니 향 한 자루 살랐을 뿐인데도 마애불 앞은 향연으로 가득했다. 더구나 소슬바람처럼 불어대는 바람이 내놓는 소리 또한 맑은 풍경소리와 같았으니 나는 떠날 줄을 모르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지금 이 길을 걸어 용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다산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루되어 1795년 7월 26일 지금의 홍성 근처인 금정도(金井道) 찰방(察訪)으로 좌천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직위는 당상관(堂上官)이라는 높은 지위의 동부승지(同副承旨)였으니 한가한 지방의 찰방으로 좌천된 것은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지 싶다. 그러나 다산은 지역의 선비들과 교류를 끊지 않았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후손인 목재(木齋) 이삼환 이었다.

내포(內浦)지역인 금정역의 이속(吏屬)들은 천주교인 서교(西敎)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다산을 굳이 그쪽 찰방으로 임명한 정조는 다산으로 하여금 그 폐해를 막아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산은 그러한 임금의 의중을 헤아리고 그 뜻을 지역의 선비들에게 전해야 했으니 그 중 어른이자 서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으로 성호학파의 대표격이던 예산의 이삼환을 찾았던 것이다. 이삼환을 만난 그날, 다산은 늦은 오후에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곤 시를 남겼는데 ‘용봉사에 들르다(過龍鳳寺)’라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다다른 용봉사에서 묵어가기를 청했지만 이틀은 재워 줄 수 없다는 스님의 말조차도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니 시의 중간에 당시 용봉사의 모습이 나온다.

“…따르는 종 나에게 말해주기를(僕夫向余言) / 절간 하나 골짝에 들어있다나(蘭若在中谷) / 말을 내려 지팡이 들고 나서니(下馬理輕策) / 관원 신분 생각 할 게 뭐 있나(豈復念緋玉) / 긴 그늘 높은 언덕 내리덮고(脩陰下曾阜) / 비단 돌 시내 굽이 깔렸는데(錦石委澗曲) / 서릿발 살짝 덮은 드높은 바위(巖經微霜) / 푸른 대에 끼어든 붉은 담쟁이(紅間翠竹) / 절집이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으니(禪樓出樹) / 싸늘한 정경에도 반갑다마다(滄便悅目) / 노승이 하는 말이 절이 황폐해(老僧辭荒廢) / 이틀 유숙 접대는 어렵다나(未足待信宿) / 깨진 대 홈통 물줄기 아직 남았고(破餘點滴) / 낡은 절간 단청 빛 흐려 어둡네.(古殿暗丹綠)…”

서릿발이나 붉은 담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찰방이 된지 두어 달이 지난 가을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관원이었던 다산을 이틀은 재워 줄 수 없을 만큼 쇠락한 용봉사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다. 다산은 그 후, 목재 선생에게 성호 선생의 <가례질서(家禮疾書)>를 새롭게 교정하여 강학하기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용봉사에 다녀 간 이야기도 함께 썼다. 그 내용은 황폐하여 머물 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용봉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마애불을 지나치지 않았을 리가 만무인데 불상에 대해서는 그렇다하더라도 곁에 있는 조상기(造像記)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다산이 이 길을 걸었을 때도 당연히 마애불은 있었을 것이며 부처님 오른쪽 어깨 곁에 있는 각자(刻字) 또한 지금 보다 선명했을 텐데 말이다. 각자는 모두 31자지만 그 중 2자 정도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문드러져 버렸다. 이 명문에 따르면 부처님은 신라 소성왕 1년인 799년 4월에 조성되었다. 발원한 사람은 원오법사(元烏法師)이며 시주한 이는 향도인 장진대사(長大舍)이다. 그것 정도만 새겨져 있을 뿐이지만 이는 나라 안의 삼국시대 마애들 중 드물게 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지금까지 밝혀진 마애불조상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눈부신 듯 가늘게 눈뜨고 금세 말하려는 기세

신라 소성왕 1년(799) 원오법사 발원에 조성


삼국시대에 조성된 마애불들 중 조상기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 경남 함안의 방어산 마애불, 충북 진천태화4년명 마애불입상 그리고 경주 남산 윤을곡 마애불상 정도일 것이다. 그 중 신선사 마애불은 삼국시대 말기로 추정할 뿐 연대를 알 수는 없다. 방어산 마애불은 애장왕 2년인 801년 3월 16일에 조성되었으며 진천태화4년명 마애불입상은 흥덕왕 5년인 830년 3월 2일 그리고 윤을곡 마애불은 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 전부이다.

어느덧 사라진 향연을 아쉬워하며 다시 한 자루 향을 사르곤 용봉사로 올랐다. 부도며 석조들을 마당 한 쪽에 가지런하게 모아 놓은 까닭은 지금의 자리가 본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산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신경리 마애불입상으로 가는 길 중간에 만나는 큰 묘가 있는 곳에는 부속건물들이 그리고 신경리 마애불이 있는 자리에 금당과 같은 전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묘 자리가 탐난 풍양 조(趙)씨 가문에서 1906년 절을 부수고 절터에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趙羲純)의 묘를 쓰면서 한 때 수덕사에 버금가는 사세를 지녔던 고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절집을 마주하고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채 10분을 오르지 않았는데 산상공원처럼 드넓은 공간이 나타나고 산기슭에는 찬란한 아침햇살에 빛나는 마애불이 물끄러미 순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조금 전 참배한 마애불입상과 너무도 흡사한 것이다. 물론 그 규모나 머리 위에 비석의 지붕돌과 같은 것을 올려 천개(天蓋)로 삼은 것이 다르긴 했지만 부처님의 모습은 빼다 박은 것처럼 같았으니 마치 확대복사를 해 놓은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가슴께에 들어 올린 오른손은 깨졌지만 일주문 곁의 마애불 또한 분명한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었다. 직선거리로 따지자면 500m나 될까 싶은 근거리의 장소에 이와 같이 같은 수인, 같은 입상인 마애불을 아직 나라 안에서 보지 못했으니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서로 조성된 시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조상기가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양식으로 봐서 지금 눈앞에 서 계신 마애불은 일주문 곁의 마애불보다는 후대에 조성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후대에 다시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일주문 곁의 마애불을 모델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석굴암 본존불 조성 이후 많은 불상들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갖추기는 했지만 8세기 중반이나 9세기에 특별히 시무외여원인을 한 불상이 유행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 이곳에만 나타난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눈여겨보면 수인뿐 아니라 조금 더 통통해 지기는 했지만 상호 또한 민머리에 두툼한 육계며 찢어진 눈 그리고 앙다문 입술의 친연성이 느껴져 마치 형제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향 한 자루 살라놓고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슬며시 미소 짓다가 그만 일어섰다. 하늘은 여전히 티끌 한 점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맑았고 푸르렀다. 되짚어 산을 내려오는 길은 새벽에는 그늘이었건만 햇살이 환하게 밝혀 놓았으니 순례자의 걸음이 어찌 경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간혹 산비탈에 하얗게 피어난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서둘러 제 모습을 곱게 단장한 나뭇잎들이 아직 산에 가득할 때 형제 부처님을 뵈러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기록문학가

특징

홍성 용봉산 기슭 감실의 두 부처님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두 마애불은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둘 모두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용봉산(龍鳳山) 기슭에 있으며 산을 오르면 용봉사 못미처에 있는 용봉사 마애불입상을 먼저 만난다. 용봉사 마애불입상은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용봉사 일주문에서 20m가량 떨어진 왼쪽 산기슭에 있다.

단애를 이룬 바위의 오른쪽에 감실을 파고 새겼으며 높이는 230cm이며 불신은 중부조이며 광대뼈가 불거진 상호는 그보다는 조금 더 두툼하게 새겼다. 가슴께로 들어 올린 왼손은 깨졌지만 길게 늘어뜨린 오른손은 잘 나아 있으며 이는 시무외여원인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아래로 늘어진 법의는 선각으로 표현했다. 마애불의 오른쪽으로 명문이 남아 있는데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에 따르면 행을 달리하며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 / ▨佛願大 伯士元烏法師 / ▨香徒官人長大舍”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는 신라 소성왕 1년인 799년에 장진대사의 시주를 받아 원오법사가 조성했다는 기록이다.

일주문 옆 산기슭에 있는 용봉사 마애불입상의 상호이다.

신경리 마애불은 보물 제355호로 지정되었으며 용봉사 마애불을 지나 왼쪽 길로 100m가량 오르면 오른쪽으로 부도가 있고 왼쪽으로는 나 있는 돌계단으로 오른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백제의 옛 절터로 알려져 있다. 그 곳의 독립된 자연석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쓴 천개(天蓋)인데 비석의 지붕돌과 닮아 있다. 굳이 이와 유사한 형태의 불상을 찾는다면 보물 제946호인 순천 금둔사지의 석불비상(石佛碑像)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석에 감실을 파고 새긴 부처님의 전체 모습에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고 상호는 원만하며 온화하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이며 연화대좌와 두발은 다른 돌에 새겨 끼워맞춰 놓았다. 감실 안쪽에 선으로 새긴 두광과 신광은 모두 세 겹으로 새겼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뚜렷하다. 목에는 삼도가 남아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걸쳐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으로 나가 덕산 방향으로 거스르는 것이 편하다. 덕산시장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10km가량 가면 오른쪽으로 용봉산 용봉사 이정표가 있다. 자동차는 입구의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도 왕복 3km가 되지 않으니 걷는 것이 좋을 것이다. 1km남짓 오르면 일주문을 만나고 그곳에서 300m가량이면 신경리 마애불이다.



[불교신문 2368호/ 10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