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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이천 소고리 마애여래좌상, 마애삼존불

 

이천 소고리 마애여래좌상, 마애삼존불

 
아, 정녕 자연은 그가 수만 년이나 지켜 온 조화와 질서를 잃어버린 것일까. 또 비가 왔다. 가을장마가 끝났다고 하지만 유난히 올해 비에 대한 기억은 잔인하고 끈질기다. 어쩌면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그 무엇처럼 우리들 주위를 맴돌다가 툭하면 퍼붓곤 은근히 사라졌다간 슬그머니 다시 등장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자연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자연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만 했을 뿐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때문이려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스님 한 분 홀연히 나타나 청정도량 가꿨으면…”
 
  다소 어눌하고 천진난만한 부처님 상호
 
  삼존불 神體 삼아 무속의 신당 돼 씁쓸
 
 
  
뭉게구름 하얗게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이 새벽, 찬란하게 빛나는 동살을 향해 고개를 들어야 할 나팔꽃이나 해바라기 풀 한 포기조차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 만 같다. 부처님에게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다만 고개를 숙인 채 순례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얕은 개울을 건너 지난 밤 비에 패인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자 한 줌 햇살 비쳐들지 않는 숲은 한밤중과도 어두컴컴하기만 하다.
 
<사진> 희화적인 파격미가 일품인 이천 소고리 마애삼존불은 그 모습에 있어 특이하다. 그렇기에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의 신체가 되었다. 그것을 민간신앙과의 습합이라고 봐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나치다 싶다.
 
진창길을 500m나 걸었을까. 길은 끝이 나고 눈앞에 큰 바위 두 개가 나타났다. 길섶에 있는 바위에는 삼존불이 산기슭에 있는 바위에는 여래좌상이 마애로 새겨져 있으니 감사하기 그지없지만 너무도 숲이 짙어 겨우 삼존불의 형태만 알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 탓에 향을 사를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몸조차 피할 곳이 없었다. 우뚝 서서 머리 숙여 예경을 올렸지만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두 곳 부처님이 모두 무속인들의 섬김을 받고 있는 것이 확연했기 때문이다. 삼존불 앞은 아예 용왕당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삼존불을 신체(神體) 삼아 신당(神堂)을 꾸민 것이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이른 새벽 시간에 누군가가 다녀갔는지 용왕당은 물론 개울가에까지 촛불을 밝혀 놓았으며 제물로 바친 과일과 음식들이 흩어져 있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를 지내며 나온 쓰레기들을 파묻었는지 한쪽에는 땅을 뒤집어 놓은 곳에는 파리와 벌이 들끓어 청정함이란 찾아 볼 수 없었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주위의 나무들에는 울긋불긋한 물색을 감아 놓아 분위기는 영락없는 무속의 신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뿌리 깊은 것이기도 하다. 1558년 봄,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의신암(義神菴)에 이르러 시를 한 편 지었는데 그 첫머리가 다음과 같다.
 
 “내가 두류산으로 가다가 / 중로(中路)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노라 / 높은 꼭대기에 신묘(神廟)가 있는데 / 요망한 귀신 문기둥에 의지하고서 산다나. / 화복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 속인들이 다투어 아첨을 하고 / 분분한 무당들이 / 간특을 꾀해 재앙을 저질렀건만 / 몇 백 년을 지나도록 / 두려워서 감히 철폐하지 못했다는데 / 무너뜨린 승려 어디서 왔는지 / 한 번에 쓸어버리자 / 돌의 잔해 흩어진 채 / 음침한 귀신 영원히 끊어졌다네. / 그 이야기 듣고 존경스러워 / 보고픈 마음 간절했다오.”
 
<사진> 마애삼존불과 같은 장소에 있으며 선각의 유려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소고리 마애여래좌상 또한 무속인들의 섬김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스님은 칠불암에 사는 스님이었다는 것만 알 뿐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당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 곳에 ‘가섭의 불상’을 세웠다고 하니 그것은 곧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민간신앙과 불교가 습합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분명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리가 소홀함을 틈 타 그것을 자신들의 신체로 삼아 버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님은 분명 할지니 고봉 선생이 의신암에서 만났던 스님 같은 분이 홀연히 나타나 청정도량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무속인들 사이에서 이곳 삼존불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돌아 많이 찾는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으니 응당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산하에 흩어져 있는 마애불을 찾아 다니다보면 더러 무속인들의 섬김 대상이 된 부처님을 보긴 하지만 이곳이 이렇게 대놓고 소문난 기도처가 되어버린 까닭은 아마도 부처님의 모습이 여느 곳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이하다는 말로도 손색이 없을 삼존불은 마치 대여섯 살의 유치원생 정도가 그려놓은 부처님과도 같은 모습이다. 부처님이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는 아이들이 동화책이나 어머니로부터 들은 부처님을 상상하며 그려 놓은 것 같은 모습 말이다. 자유분방하기보다는 어눌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으며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해학적이라는 표현도 어울릴 파격적인 모습이다. 이는 곧 삼존불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 형상에 있어 불상 조성의 모든 정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재 설명 판에 나와 있는 신라시대의 토우(土偶)나 미개종족의 신상(神像)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은 다소 지나친 해석 같아 보이지만 그만큼 변형이 많이 이루어 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삼존불을 마주 대하는 순간 그 누군들 미소를 감출 수 있으랴. 본존불의 희화적(戱畵的)인 모습이나 우협시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푸른 이끼에 덮여 있기는 하지만 좌협시 또한 그 모습이 범상치 않음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려니 여느 마애불에서 느끼던 감흥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오히려 무속인들이 이 삼존불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신체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불교에서 섬기는 부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며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 그러면서도 산중이라는 점 더구나 삼존불 가까이 얕은 계류가 흐르고 있어 샘을 파 용신당을 조성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존불 앞 용신당에는 곁에 샘까지 만들어 놓았으며 제단까지 조성해 놓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느 마애불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조금씩 달리 했으며 각각의 시대에 파격이라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 후반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마애불은 다양한 모습으로 조성되었으며 지방화 된 양식으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지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이미 미술사의 연구로 밝혀진 결과이다.
 
<사진> 소고리 마애여래좌상은 특이하게 두광이 7겹으로 만들어져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들 가운데 충북 영동군 삼도봉의 삼두(三頭)마애불, 충주의 동량면 조동리 갓바위 마애여래좌상과 경기도 과천의 승상과 같은 것들도 기존의 마애불 조각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들 중 하나이다.
삼존불 뒤 왼쪽 위의 큰 바위에도 기존의 양식과는 조금은 다른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앞 또한 각종 제물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으며 삼존불과 마찬가지로 무속인들의 섬김을 받는 것 같았다. 마애불 위로 나무들이 드리워 어두웠으며 흑태와 청태가 바위 전체를 덮고 있어 상호를 살피기는 힘들었지만 독특한 두광이 눈길을 끌었다. 두광은 모두 7겹의 둥근 원으로 이루어져 화사하고 풍만한 느낌을 자아냈다.
선각으로 이루어진 불상 전체의 비례도 빼어나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건만 이어지는 비와 어두운 숲 그리고 이끼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작연대는 앞서 참배한 삼존불보다는 훨씬 앞서는 것으로 한 지역에 그것도 채 10m가 떨어지지 않은 바위에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마애불이 조성되는 경우도 드물어 흥미롭기만 했다.
하지만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고개 돌리면 울긋불긋한 물색들이 나무에 묶여 있는 모습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처님 말씀에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언제나 지금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또 스스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곧 나를 찾아가는 첫발걸음이라고 한다면 무속인들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것이며 행정 당국이나 불교계에서도 현실을 파악해서 불자들의 청정한 마음이 가득 찬 도량이나 순례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애를 썼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소고리 마애여래좌상의 특징
 
13C 조성…7겹 원모양 두광
 
<사진> 무학대사의 전설이 서려있는 충주 동량면 조동리 갓바위 마애여래좌상 또한 소고리 마애삼존불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천 소고리 마애여래좌상은 지방유형문화재 제 119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산 91-9번지에 위치해 있다.
마국산 기슭인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부처박골이라고 부르는 곳이며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부처바위라 부른다.
불상은 높이 7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의 왼쪽 면에 치우쳐 새겨졌으며 앙련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전체가 선각으로 조각되었으며 선의 흐름은 유려한 편이다. 머리는 민머리에 투박한 육계가 솟았으며 양 귀는 목까지 늘어진 형태이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며 법의는 통견으로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선이 아름답다. 수인은 마멸로 인해 뚜렷하지는 않지만 양쪽 손을 가슴 앞에 올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여 각각 중지와 엄지를 마주대고 있는 듯 여겨져, 아미타여래의 구품인중에 중품 중생의 수인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불의 가장 큰 특징인 두광은 모두 7겹의 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신광은 두 겹의 선으로 불신을 에워싸고 있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인 13세기 정도이다.
마애여래좌상 곁에 있는 마애삼존불은 향토유적 제 8호이며 서쪽을 향해 조성되어 있다. 희화적인 파격미가 일품인 마애삼존불은 본존불에 비해 협시불들의 크기가 너무 작아 비례가 맞지 않으며 높이가 2m에 달하는 본존불은 본디 앙련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으니 연화좌가 지금은 매몰 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조각은 마치 제주도나 남방계열의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눈이나 입가에는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본존불의 머리 위로는 뿔과 같은 것이 양쪽으로 늘어 졌으나 그것은 광배의 또 다른 표현인 것 같다. 그 위로 물이 빠질 수 있는 수로 역할을 하는 홈이 파져 있으니 말이다. 삼존불의 공통점은 모두 머리에 관모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며 두 손을 가슴 근처에 모았다는 것이다. 조성 시기는 앞의 마애여래좌상보다 훨씬 뒤로 봐야 할 것이다.
 
   
가는 길 /
이천시청까지 가서 3번 국도를 따라 복하교차로에서 좌회전해 70번 도로를 따라 12km가량 가다가 원두리에서 소고리 마을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문화재 안내판이 잘 되어 있으며 소고리 마을회관을 지나 500m가량은 비포장 길이다. 마애불 코앞까지 자동차가 들어간다.
  
[불교신문 2364호/ 10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