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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극성과 짝하는 존엄한 영산(靈山) / 선정 닦는 도량, 절집이 여기 숨어 있네. / 멀리 아래로는 민가의 일만 등불 / 하늘 위로는 상방(上方)의 맑은 경쇠 소리 / 어수선한 세상일 잠깐 접어 두고 / 물외(物外)의 심경 유유히 젖어 보노라. / 시원한 솔바람, 잠이 솔솔 올락말락 /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밝아 오는 마음자리.”

위의 시를 지은 택당(澤堂) 이식(1584∼1647)은 1613년 4월, 세자와 태자들의 보도(保導)와 교육을 담당했던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說書)로 임명된 후 제자들과 함께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맑은 물에 술잔을 띄우는 호사를 누리며 하루를 즐겼다. 봄이 깊었는데도 난데없이 눈발이 날리던 그날,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택당은 승가사(僧伽寺)로 오르고야 말았다. 탕춘대 일대는 물론 자신을 에워싼 북한산 자락의 뭇 봉우리들이 자아내는 정경이 도무지 복잡한 도성 근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신선의 세계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108계단 오르면 근엄한 자태로 순례자 맞아”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택당의 시대보다 수백 배는 더 복잡해졌을 서울 거리를 빠져나와 5분만 걸으면 어느새 시끌벅적한 소리는 잦아들고 물 흐르는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는 물론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기만 한 산새들의 지저귐만 있을 뿐이니 어찌 이곳을 선경(仙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루하게 이어지던 가을장마마저 끝난 하늘은 푸르기만 하고 바람은 건들건들 불어대니 이 맑은 기운 속에 머물 수 있음에 절로 행복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이중 연화좌에 앉은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은 존귀한 분으로써의 위엄을 두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거불로서 미술사적으로도 자칫 거불로서 소홀 할 수 있는 섬세함까지 지니고 있어 시대를 대표하는 마애불로 손색이 없다.

40여 분, 땀이 두어 방울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기 시작할 즈음 맑은 물이 철철 넘치는 약수터와 일주문이 눈앞에 있었다. 승가사였다. 방거사가 선요(禪要)에서 그랬던가. “시방에서 함께 모여 개개인이 무위의 법을 배운다. 이곳이 부처를 뽑는 장소며 마음이 공하여 급제하여 돌아간다(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라고 말이다. 승가사는 바로 그 선불장이다. 1935년, 만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선방을 연 이래로 우리나라 비구니 선맥(禪脈)을 새롭게 일군 비구니 법희선사(法喜禪師)(1887~1975)에 이어 지금의 상륜스님에 이르기까지 승가사는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비구니 선불장(選佛場)으로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절 마당은 마치 빈 절집처럼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종루에 올라서니 숲에 반쯤은 가린 마애불이 그윽한 아침 햇살을 머금은 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계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개 돌리면 종루에서는 서울 시내 또한 한눈에 들어왔다. 귀 기울이면 번잡한 자동차 소리는 물론 소란스러운 말소리까지도 들릴 것만 같았으니 산중과 진세(塵世)가 얇은 종이의 양면과도 같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선뜻 마애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옛글에 승가사를 두고 승가굴(僧伽窟)이라고도 했으니 굴부터 찾았다. 대웅전 옆으로 돌아들자 이내 굴이었다.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聆大師)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까지 칭송받던 인도의 고승인 승가대사(僧伽大師)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그 상을 만들어 모셨기에 승가굴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수태가 굴을 뚫은 시기는 신라 경덕왕 15년인 756년 이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석상은 고려 현종 15년인 태평(太平) 4년, 곧 102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이미 수태가 굴을 뚫을 당시 석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상호.

형암 이덕무가 1780년 승가사에 유람 차 갔다가 이 석상을 보았는데 <양엽기(葉記)>에 쓰기를 “삼각산 승가사 석굴에 석상이 있는데, 얼굴이 늙은 할머니 같고 머리에 쓴 물건은 유가(儒家)의 폭건(幅巾)과 흡사하며 등 뒤에 연꽃과 같은 석장(石障)이 있는데 그 뒤에 ‘태평4년 갑자’라 새겨져 있다”고 했는가 하면 그의 족질(族姪)인 이광석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지(同志) 5~6인과 함께 삼각산 서쪽 승가사에서 노닌 일이 있었네. 절 북쪽에 동굴이 있고 그 가운데는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부처가 하나 있는데, 파리하여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데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마치 노파의 모양 같더군. 그 뒤쪽 석벽에는 큰 연꽃이 새겨져 있으나 다 떨어져나가고 겨우 글자나 알아볼 수 있었네. 거기에 ‘태평 사년 갑자’라고 씌어 있었네”라고 하고 있다.

결국 수태가 만든 석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02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거나 예를 갖추고 굴 옆으로 난 108계단을 오르자 마애 부처님이 당당하면서도 근엄함을 잃지 않은 채 순례자를 맞이했다. 머리 위에는 차양과도 같은 팔각의 지붕돌을 이고 말이다. 그 끝 모서리에는 마치 탑의 지붕돌 추녀 끝에 풍탁이 달리듯이 두 개의 풍탁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는 내고 있었으니 바로 이 때문에 이 마애부처님이 새겨져 있는 곳을 풍경암(風磬巖)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견편단으로 걸친 섬세한 法衣

범접키 힘든 위엄에 예경도 잊어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을 지내며 조선심(朝鮮心)을 잃지 않도록 국민들을 계몽했는가 하면 ‘문화가 살면 민족은 죽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던 호암(湖巖) 문일평(1888~1939)선생이 1921년에 승가사를 찾았던 적이 있다. 당시 여정을 <개벽>이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그곳에 풍경암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온다. 그 부분만 발췌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승가굴에서 서북쪽으로 백 수십 보쯤 되는 숲 사이에 우뚝한 석상이 있는데 구름 밖으로 솟았음을 볼 것이니 속칭 풍경암이다. 그 앞에 가서 살펴본즉 천연석에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길이가 거의 팔구십 심(尋)(1심은 여덟 자)이 되겠으며, 폭이 수십 척이 되겠으며,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차양은 그 크기가 여러 간(間)에 달한다. 좌우에 풍경이 달렸으니 아마 이것을 보고 풍경암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부처님을 바라보는 위치 때문인가,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전 종루에서 마주하던 부처님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거대하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대하면서도 세밀함을 잃지 않은 섬세함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앙련과 복련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중연화좌에 앉은 부처님은 그 누가 보더라도 곧게 펼친 허리며 앞으로 내민 가슴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에 주눅이 들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우견편단으로 걸친 법의로 드러난 오른쪽 가슴에는 유두가 새겨져 있으니 그 섬세함은 또 무엇이라 말할 것이며 법의의 흐름을 표현한 선과 항마촉지인의 수인 그리고 발을 표현한 선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유려한 흐름을 이루고 있으니 드물게 보는 고려의 마애불이어서 입을 벌린 채 예경을 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山野에 걸려 펄럭이는 괘불같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추어 삼배를 올리고 난 다음 다시 우러르는 부처님의 상호 또한 더 말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풍만한 상호에 유난히 오뚝한 코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양 끝이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풍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두툼하게 솟은 육계 위에는 아래에 연화문이 새겨진 팔각의 지붕돌을 보개로 삼은 듯 홈을 파서 끼워 넣은 모습이 온전하게 남았으니 그 또한 흔히 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에 그 흔한 균열조차 하나 없다는 것이었으며 바위 면 또한 매끈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바위의 오른쪽에 거뭇하게 낀 물이끼를 제외하면 바위는 마치 한 폭 비단을 드리운 것 같았으며 독립된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은 산야(山野)에 내걸려 바람에 펄럭이는 괘불처럼 보였으니 내 어찌 그 앞에서 다시 온 마음을 다해 절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만 돌아서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진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친 들 무슨 소용 있을까. 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그곳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인 것을…, 산 아래에서 산중인 듯 있지 못하면 산 속에 있어도 그곳이 곧 산 아래가 되고 만다는 시 구절을 되뇌며 숲 속으로 접어들었건만 발길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이내 맑은 물이 철철 소리 내며 흐르는 호젓한 계류 가의 너럭바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나 유난히 파란 하늘이 매혹적이었지만 내 눈에 차오르지 않았고 가을임을 알리는 듯 건들건들 불어 대는 바람조차도 내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며칠 동안 비가 온 끝의 거센 물소리 또한 나를 산란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조금 전 뵙고 내려 온 마애부처님의 여운이 그만큼 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특징 / 고려초 조성…65년간 중창.중수

보물 215호인 북한산 구기동 마애 석가여래좌상은 승가사 경내에 있다. 지금은 비구니 선원인 승가사의 창건은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스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수태스님은 중국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생불(生佛)이자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추앙 받았던 서역 출신인 승가대사(僧伽大師)의 거룩한 행적을 듣고 그를 경모하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승가사라 하였다고 한다.

승가사 마당의 종루에서 바라 본 모습.

그 후, 1024년에 지광, 성언스님이 주축이 되어 한 차례 중창 불사를 이루었고 1090년에는 영현스님이 왕명을 받들어 또 다시 중수했다. 당시의 일은 이예(李預)가 쓴 <삼각산 중수 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記)>에 잘 남아 있지만 마애불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생각컨대 마애불의 양식은 고려 초기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중창과 중수가 65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을 두고 두 차례나 이어졌으니 대략 이때 쯤 마애불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추정 해 보기도 한다.

승가굴 뒤의 독립된 큰 바위에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5m에 이르는 거불이긴 하지만 투박함과는 거리가 먼 섬세함을 지니고 있어 10~11세기 고려의 마애불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앙련과 복련으로 이루어진 이중 연화좌에 앉았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목의 삼도는 가는 선으로 표현했지만 상호는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는 팔각의 지붕돌을 보개처럼 쓰고 있으며 이는 문경 대승사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과 같은 형식을 보여 준다. 두광은 생략되었으며 광배는 단순한 선으로만 표현하여 불상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머리 위의 보개 그리고 양쪽 어깨 옆으로 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어 전각을 세웠던 흔적이 있으며 특히 보개 위에는 흔히 보는 凹형태의 홈이 아니라 돌이 밖으로 불거진 凸형태의 돌기가 두 개가 나 있어 궁금증을 더한다.

 

 

가는 길

광화문 방향에서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021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이북 5도청 앞이나 한 정거장 전인 승가사 입구에 내리면 된다. 지하철 3호선 불광역에서 1번이나 2번 출구로 나와 구기터널 방면 7211번이나 7022번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구기터널을 지나자마자 내리면 된다.

버스에서 내려서 승가사까지는 건덕빌라 옆으로 나 있는 시멘트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국립공원 관리소가 있고 그곳부터 승가사까지는 약 30~40분 남짓 걸린다. 승가사에서 30분 남짓 걸리는 비봉에 오르면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삼천사지의 마애여래입상도 만날 수 있다.

 

[불교신문 2361호/ 9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