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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안성 굴암사 마애약사여래좌상 - 선각 마애여래좌상

 

안성 굴암사 마애약사여래좌상 - 선각 마애여래좌상

 

“연못 지나니 근엄한 상호의 약사부처님 반겨”

 

편운(片雲)이라는 단어가 참 좋았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조각구름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무작정 편운이 좋았다.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편운재(片雲齋)라는 집을 가진 그 시인이 교지의 문학상을 시상하러 학교에 온다고 했다. 예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베레모에 두툼한 코트를 걸치고 입에는 파이프를 물고 말이다. 그때 시인이라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처음 봤다. 그이는 우리학교의 국어교사로 봉직했었고 그 인연으로 어쩌면 하찮을 고등학생들의 교내문학상을 시상하러 매년 왔던 것이다.

 

마애약사

후대에 지은 ‘각’이 비 바람 막아

대좌는 없고 전체 ‘호분’으로 처리

그이는 조병화 선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지나가는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모퉁이에 그이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편운재가 있다. 조병화 선생의 어머니는 원행심(遠行心)이라는 법명을 지닌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늘 아들에게 말하기를 죽으면 썩어질 살이니 열심히 노동하며 살라고 했던 분이다. 그 분의 삶은 부처님을 향해 있었고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윈 조병화 선생의 삶은 어머니를 향해 있었으니 조병화 선생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곧 종교와도 다름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과 사랑의 표현은 그 어떤 이라도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절하니 말이다.

<안성 굴암사의 마애약사여래좌상이다. 서울 홍은동 보도각(普渡閣)마애보살좌상이나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상처럼 마애불 전체에 호분을 칠한 보기 드문 예이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다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시 한 편을 남겼는데 ‘굴암사(窟巖寺)’라는 것이다.

옛날 송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원족(遠足)을 갔던 굴암사,

사푼사푼 잘도 올라갔던 생각이

다시 찾아든 산길

하두 험하고 가파라서 쉬엄쉬엄 오르매

옛날은 까마득하다

허이허이 오르는 산길

절은 하늘 위에 있다

아, 어머님, 어머님은 너무나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할 때, 한 소년이 사푼사푼

내 곁을 앞질러 오른다.

나를 힐끗 뒤돌아보며.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소풍을 갔던 굴암사, 그곳에 모신 어머니를 찾아 가는 길에 시인은 어머니가 너무 높은 곳에 있다고 한다. 절은 하늘 위에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너무도 가팔라서 쉬엄쉬엄 오른다고 했으니 시인 또한 이미 늙은 몸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찌 절이 하늘 위에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없는 아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리라.

부처님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모자간의 사랑 이야기를 되새기며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곳은 시인이 처음으로 소풍을 갔다던 바로 그 굴암사이다. 시인이 올랐을 때는 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주택가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 나가야 닿을 수 있었으며 가파르지도 않았고 높지도 않았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앞을 가로 막는 우람한 바위더미들, 그곳에 마애약사여래좌상과 마애여래좌상 두 분이 새겨져 있다.

노란 어리연꽃이 지천으로 핀 작은 연못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이내 마애약사여래불이 근엄한 얼굴로 반겼다. 그런데 백불(白佛)이다. 하얗게 채색을 해 백불이라고 불리는 서울의 홍은동 보도각(普渡閣)마애보살좌상이나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상처럼 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앞에 말한 두 불보살은 휘어진 바위를 그대로 살려 불보살을 조성해 상호에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했다면 이곳의 약사여래는 편편한 바위에 조성을 하고 후대에 각을 지어 비바람을 막은 듯 했다.

그러나 본디부터 호분(胡粉)을 칠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불신과 상호에만 칠했던 것을 후대에 더 넓게 칠한 것은 아닌지, 불신 광배가 뻗어나가는 부분에는 아예 칠이 되어 있지 않을 뿐 더러 예전에 칠한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쪽 무릎의 가장자리와 대좌 없이 앉으신 맨 아래 부분에도 호분은 묻어 있지 않으니 과연 본디부터 하얗게 호분이 칠해졌던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했다.

 

선각마애

 

佛身은 선각, 상호는 얕은 저부조

균열 심해 제대로 살피기 어려워

삼배를 올리고 좁은 사립문처럼 생긴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자 또 한분의 여래좌상이 계셨다. 그러나 불신은 선각으로 표현된 데다가 상호는 얕은 저부조로 새겨졌으나 그마저도 박락이 심해 윤곽만을 알 아 볼 수 있을 뿐 전체를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가슴께에 가로로 심한 균열이 있는가 하면 다시 왼쪽 어깨를 지나 불신 광배가 지나가는 자리에 세로로, 또 불두 위에서 왼쪽 어께 위로 지나가는 균열이 서로 얽혀 있어 허리춤을 가로로 굵게 지나가는 바위의 흰 띠까지 합치면 도무지 시야가 혼란스러워 부처님을 제대로 살피기가 쉽지 않았다.

<안성 굴암사의 선각 마애여래좌상이다. 상호의 박락이 심하고 균열이 심해 해가 들지 않으면 그 모습을 살피기가 쉽지 않다.>

상호에 반짝 해라도 비쳐들면 모든 것 제쳐두고 우러르며 단정하게 앉으신 모습 살피련만 그마저도 높게 떠 있는 해와 그 해마저 가려버리는 보호각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얼마간 기다렸건만 도무지 해가 비쳐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예 제대로 살피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이나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여래좌상이 계신 옆 바위틈을 빠져 나가니 제법 넓은 공터와 함께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났다. 숲 그늘도 적당하여 더위도 식힐 겸 그만 그곳에 털썩 앉았다. 안 그래도 찾는 이 드문 절집인 데다가 호젓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이 맞춤한 곳이었다.

그곳에 앉아 나는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떠 올린 것은 어머니를 찾아왔다가 돌아가던 노시인의 뒷모습이었다. 아마 그이도 이 공터를 서성이거나 계단에 잠시라도 앉았지 싶었다. 어머니를 뵙고 나면 자연스레 두 분 마애부처님을 찾았을 터이고 굴암사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일 이곳을 시인이 놓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해마다 봄이 되면 “봄처럼 부지런해라. 봄처럼 꿈을 지녀라 그리고 봄처럼 새로워라”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홀로 눈물짓지는 않았을까.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곤 터덜터덜 걸어서 난실리의 편운재로 돌아가던 노시인은 어머니에게 투정을 섞어 ‘어머니 너무 멉니다’라는 한편의 시를 지었을 것이다. 그 시 읊조리며 나도 그만 일어섰다.

어머님 너무 멉니다.

당신이 가신 길 따라

산을 넘음에

당신이 부르시는 곳

아득히 너무 멉니다.

봉우릴 넘으면 또 봉우리

길 무한 고독한 영원

동행턴 벗도 이젠 보이질 않습니다.

…(중략)…

혼잡니다

혼자 죽는 그 아픔을 가르쳐 주십시오

봉우리 봉우리 넘어

버리고 가는 길

이건

어머님 너무합니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특징

우람한 바위에 부처님 두분

<앞에 보이는 전각 안에 마애약사여래불이 조성되어 있으며 왼쪽 뒤 전각 안에 선각 마애여래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굴암사는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에 있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법상종에 속해 있다. 절 마당에 우람한 바위가 흩어져 있으며 그 바위들 중에 두 구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그 중 하얗게 호분을 칠한 마애약사여래좌상은 경기도 향토유적 12호로 지정되었으며 선각으로 새긴 마애여래좌상은 향토문화유적 11호로 지정되었다.

약사여래불은 저부조이며 여래좌상은 선각이어서 서로 대조적이다. 더구나 여래좌상의 연화대좌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약사여래좌상은 아예 대좌를 새기지 조차 않았으니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겠다. 서남향을 한 마애여래좌상은 불신의 높이가 3.5m에 이르며 동향을 한 마애약사여래좌상은 높이가 3.3m에 달해 서로 크기는 어슷비슷하다.

그러나 약사여래좌상은 마치 통로에 새겨 놓은 듯 앞이 답답하여 두 구의 마애불 중 선각으로 새긴 마애여래조상에 좀 더 많은 신경을 기울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약사여래좌상은 목의 삼도가 뚜렷하며 왼손에 붉은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로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지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다. 선각으로 새긴 여래좌상은 9월말 경이나 10월이 되어 해가 낮게 뜨는 정오 무렵이면 상호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싶다. 두 구 모두 13~14세기경에 조성 된 것으로 본다.

 

 

■가는 길

안성으로 가는 것 보다 영동고속도로 용인 나들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나들목을 나가자마자 우회전하여 45번 도로를 따라 직진 하다가 314번 도로로 내려서면 노곡리 입구이며 그곳이 조병화 시인이 태어난 난실리이자 편운재가 있다. 굴암사는 편운재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으며 82번 도로를 따라가면 이내 닿을 수 있다.

[불교신문 2357호/ 9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