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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북한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북한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푸른 새벽부터 행장을 꾸려 놓은 채 멀뚱거리고 앉아 있었지만 도무지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책상에서 창가로 다시 창가에서 책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충북 영동으로 향하려던 마음을 접고 말았다. 그곳에도 천둥과 함께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다고 아예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스님의 전언 때문이었다. 하늘 문이 열렸는지 열흘이 넘도록 줄기차게 이어지는 이 거센 빗줄기를 어찌할까. 정말 하릴없다. 하늘 문이 닫히기를 기다릴 뿐 내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당당하고 근엄하면서도 온화 자애한 부처님

 1979년 보물 제657호로 지정 돼

 전체 높이 3.02m … 佛身 2.59m

어디로 갈까. 오후 늦게까지 그쳤다간 이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데 문득 북한산 삼천사지(三川寺址) 들머리에 있는 마애여래입상이 생각났다. 망설일 것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비록 오랜만에 가는 것이긴 하지만 수십 차례 아니 그 보다 더 많이 갔던 길이기에 머뭇거릴 일도 없었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는 길로 접어들자 30여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음식점들도 그대로, 군사훈련장도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삼천사지 마애불을 처음 찾아 간 것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1974~1975년경이었다. 그 무렵 기자촌에 집이 있었고 공부를 하다가 답답하면 진관사를 거쳐 달음박질로 마애불까지 달리곤 했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마애불이 무엇인지 조차도 몰랐다. 다만 불교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되 그것은 다분히 할머니나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나의 주체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진관사를 거쳐 마애불까지 달려갔던 까닭은 당시만 하더라도 그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 소문나지도 않았을 뿐 더러 사람들의 발길이 흔치 않아 조용히 마음을 쉴 수 있었던 것이 좋았을 뿐이다. 더구나 달음박질로 더워진 몸을 계곡물에 식히기가 좋았으니 철없는 소년에게는 금상첨화였던 것이다.

사진설명 :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은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작은 규모이지만 전체적인 비례나 상호의 조형성만큼은 빼어나다.

 

요즈음 같은 여름이면 아예 책과 도시락을 싸들고 마애불 앞을 흐르는 계곡의 나무그늘을 찾아 탁족을 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지내던 옛 생각을 하며 걸었다. 까짓것 내리는 비를 어쩔 것인가, 맞닥뜨릴 수밖에. 비 온다고 청수(淸水)라고 불러도 좋을 계류를 못 본 듯이 지나가는 것 또한 못할 노릇이다. 군부대의 훈련장인 전투수영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걷는데 빗줄기는 점입가경이다. 점점 굵어지다가 한 순간에 그치는가 하면 또 다시 퍼붓기를 되풀이하며 발목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비 때문인지 절 마당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연봉들은 짙은 비안개 속으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지곤 했으니 산의 장엄함은 절로 더해지는 것만 같았다.

새로 지은 삼천사의 대웅전에 참배하고 뒤로 돌아들자 마애여래 부처님이 계셨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부처님은 아니었다. 한때 법신에 금칠을 한 것을 본 이후 이곳에 발길을 끊었으니 무려 14~15년은 족히 되었지 싶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으니 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굳이 계류를 덮어가면서까지 광장과도 같은 단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예전, 부처님 앞으로 가려면 계류를 건너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계류 건너에서 바라보면 마치 부처님 계신 곳이 피안인 것 같았던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던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러한 소박한 공간들이 절집에서라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지기를 말이다.

그렇게 푸른 물이 흐르는 계류를 건너 부처님에게로 가는 것과 지금처럼 잘 다듬어진 석재가 깔린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어쩌면 목적만이 남고 과정은 없어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세간은 그렇게 될지언정 절집에서는 굳이 과정까지 고집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머리는 소발 … 육계는 높이 솟아

 목의 삼도 길어 … 법의는 ‘통견’

 

가까이 다가가자 부처님에게 채색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통견으로 걸친 법의 자락은 물론 상체 전반과 두광의 왼쪽 부분에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60년 정영호 박사가 조사한 보고서에도 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지만 상호나 두광 그리고 법신 광배의 왼쪽에 남아 있는 금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마애불과 당우 한 채만이 있던 시절부터 그 변화를 꾸준히 지켜봤으니 결코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 들어 철원 도피안사나 장흥 보림사의 철불에 덧 입혔던 개금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 성보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이곳 또한 붉은 채색의 흔적만으로도 귀한 모습이건만 기왕에 칠했던 금분을 벗겨내려면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투정은 그만 두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부처님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뿌연 빗발 사이로 보이는 부처님의 모습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하염없이 내릴 뿐 더러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빗발이 부처님에게는 들이치지 않으니 그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위로 마치 옥개석처럼 큰 바위 하나가 가리고 있어 그가 비를 막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각 또한 어디 한 곳 상한데 없이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도 그 바위가 역할을 톡톡히 했지 싶다. 더구나 부처님 상호 위로는 삿갓형태의 홈을 파서 지붕을 씌웠던 흔적이 남아 있고 양 어깨에서 1m 남짓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사각형의 홈은 지붕을 받치기 위한 지주를 끼웠던 흔적이다. 곧 이 마애불은 전각 안에 모셔졌던 것이다. 전각이 언제 헐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옥개석과 같은 바위 그리고 전각이 있었기에 거센 비바람과 모진 눈보라를 견뎌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더욱 묘한 것은 일자로 찢어진 눈이건만 매섭기는커녕 오히려 그 눈에 원만함이 스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눈이나 입 어느 것도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지만 상호 전체에서 풍기는 것은 근엄하면서도 은근한 미소가 아닌가. 잘못 봤나 싶어 뚫어지게 바라보기를 되풀이했지만 당당하며 근엄한 상호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늘이 뚫린 듯 비는 쏟아졌지만 정작 내가 흠씬 젖은 것은 비가 아니라 마애 부처님의 상호에서 풍겨 나오는 그 묘한 미소였으니 어린 시절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진설명 : 마애불 전체에 걸쳐 채색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에 보이는 붉은 색이 그것이며 금색은 후에 칠했다가 지워진 것인지 벗겨 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고려시대 마애불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인 무뚝뚝함이나 덤덤함과는 달랐다. 그것이 이 마애불의 특징일 것이다. 상호와 어깨 이하의 조각이 서로 부조화이면서 조화로운 것 말이다. 어깨 이하로는 어느 누구도 반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눈에 고려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상호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통일신라의 흔적들이 솔솔 살아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비례는 고려시대의 마애불들과 달리 알맞으며 크기 또한 다른 것들과 비교해 아담한 정도이다. 같은 북한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인 승가사의 그것과 비교를 해봐도 크기는 대 여섯 배나 될 만큼 작지만 비례에서 월등하다.

대개의 고려 마애불들이 그렇듯이 상호에 비해 어깨의 급격하게 좁아져 어색한 비례가 많은데 삼천사지 마애불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더구나 상호는 부조로 새기지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선각으로 마치는 경우가 태반인데 반해 이 마애불은 상호와 상체 그리고 손발은 저부조, 오른쪽 어깨를 중심으로 하는 상체의 옷 주름은 음각 그리고 광배나 연화대좌 그리고 군의 자락과 같은 것들은 굵은 양각선으로 표현되었으니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들 중 가장 허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양 손인데 그 중 왼손은 마치 무엇인가 들고 있는 양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복부에 대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만 발길을 돌렸다. 멀리서 밀려오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배를 올리고 두어 발짝이나 걸었을까. 천둥이 귓전을 울리는가 싶더니 아예 작정을 하고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대웅전 처마 아래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기다려서 될 성 싶은 일이 아니었다. 본디 삼천사가 있었던 절터로 오르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고 훌쩍 빗속으로 나서자 오히려 비에 씻겨 나가는 몸이 청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걸으며 머리에 떠 올린 것은 삼천사에 잠시 주석했던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스님이었다.

1341년, 그의 나이 14살에 북한산 중흥사의 원증국사(圓證國師), 곧 태고 보우스님에게서 삭발염의하고 가지산(迦智山)과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 한 후 1356부터 1358년까지 삼천사에서 머물렀다. 굳이 스님이 생각난 까닭은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에 남아 있는 비문에 따르면 스님의 “얼굴은 근엄하지만 말씀은 온화하였고, 입으로는 남의 잘하고 잘못하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기껍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저지른 지나간 잘못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일지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잘하는 것만 말하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마주 한 마애불의 모습과 스님의 모습이 어쩐지 닮아 잇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당하고 근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온화로우며 자애로운 그것 말이다. 맑은 물이 뒤엉켜 파도처럼 솟구쳤다간 흘러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일어섰는데도 비는 여전하다.  

 

특징 / 고려 마애불로는 작은 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은 북한산 자락인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다. 1979년에 보물 제657호로 지정됐다. 지금 마애불 근처에 세워진 삼천사(三千寺)는 역사적으로 이 마애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삼천사지 입구 마애여래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본디의 삼천사는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부터 1km 남짓, 30분 가까이 올라야 한다.

예전에 가 봤을 때는 귀부와 이수만이 굴러 다녔는데 지난 해 발굴을 통해 사라진 비석의 몸돌 편들을 다량 수습했다고 한다.

사진설명 :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의 전경이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삿갓형태의 홈이 파져 있으며 어깨 옆으로도 사각형 홈이 있어 전각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가 3.02m, 불신은 2.59m에 이르지만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작은 규모에 속한다.

현재는 이마에 백호가 박혀 있지만 예전에는 구멍만 남아 있었으니 그것 또한 후대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것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다소 높이 솟았다는 느낌이 든다. 목의 삼도는 길게 표현되어 가슴께 까지 내려오며 법의는 통견이다. 가슴에는 띠 매듭이 보이는데 겉에 걸친 가사 속의 내의(內衣)를 묶은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두광은 두 겹이며 신광은 한 줄로 표현되었다.

  

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 내리면 평일 오전 8시30분, 10시, 11시에 삼천사행 승합차가 다닌다. 승용차로 가려면 구파발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불광동 기자촌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1.5km정도 가다보면 삼천사 이정표가 왼쪽으로 있다.

 이지누 / 기록 문학가

[불교신문 2353호/ 8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