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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서울 홍은동 보도각마애보살좌상

 

서울 홍은동 보도각마애보살좌상

안암동 보타사마애보살좌상

백불(白佛)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서울로 전학 온 촌뜨기였던 나는 워낙 내성적이어서 친구하나 변변히 사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종로구 통의동에 살던 종법이라는 아이와 지금은 소식조차 끊어진 영섭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었다. 그 중 덩치가 산 만했던 영섭이의 집이 백불 근처였고 우리는 그 친구가 사는 동네를 문화촌이라고 불렀다. 홍제천을 건너 가파르게 난 산길을 헐떡거리며 올라가면 친구의 집이 있었지만 영섭이는 우리가 자신의 집에 놀러 오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백의의 청정상…달이 물에 비친 듯”

민간신앙 습합된 홍은동 마애보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신의 집에 갈 기미라도 보이면 영섭이는 먼저 선수를 쳤다. 홍제천 변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곳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앞에서 놀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 부처님이 바로 백불이라고 부르는 홍은동 보도각마애보살좌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족히 20여 년은 지나고 난 다음일 것이다.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지고 때때로 그 앞을 지나며 개울 건너 마애불이 보이기라도 할라 손 치면 예경을 올리는 것에 앞서 조무래기 친구들만 생각난다.

홍은동 보도각마애보살좌상이다. 흔히 보도각 백불로 불리며 보타사의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형으로 움푹 패인 암벽에 조성되었다.

그것은 오늘도 다르지 않다. 홍제천 건너에서 마애보살좌상을 바라보는데 눈길은 자꾸 오른쪽 옥천암 위로 있던 친구의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홍제천을 건너지 않고 이쪽에서 저쪽의 마애보살좌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까닭은 보다 정확한 장소에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채 가시지 않은 더위에 구슬 같은 땀을 떨어트리며 홍제천의 너럭바위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되풀이하고 몇 차례 같은 자리를 오가고 난 다음에야 겨우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어 한 사람이 넉넉하게 서 있기에도 옹색한 지경이었다. 더구나 거리가 만만치 않아 겨우 형체만 가늠할 수 있을 뿐 보살상을 제대로 살피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호분(胡粉)으로 보살상을 하얗게 칠한 까닭이 말이다. 그렇게 해두면 먼 곳에서도 보살상의 존재를 알아차리기에 손쉽지 않겠는가.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친구 집에 놀러 다닐 때인 1971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호분은 칠해져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모두 벗겨져서 어린 내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눈앞의 보살상이 아무리 관음보살상이라고는 하지만 백의관음(白衣觀音)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설사 백의관음이라고 하더라도 그 복식에 있어 백의를 가장 겉에 걸치고 그 안에는 다양한 색상의 군의(裙衣)가 어우러지지 못했으므로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투명한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의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에서 나타나는 백의의 표현은 대개 보관 위로부터 백의를 걸쳐 발끝까지 늘어뜨리는 형태로 되어 있으니 눈앞의 보살상은 도무지 무슨 연유로 하얗게 칠한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기만 한 것이다.

최자曰 “희디흰 빛 눈인가 서리인가”

옹색하기 그지없는 보타사 마애보살

‘ㄱ자’ 형태 바위 갓처럼 쓰고 있어

백의관음은 ‘관세음다라니(觀世音多羅尼)’에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백의를 입고 연화 위에 앉아서 한 손에는 정병을 들고 두발(頭髮)을 높이 세운다는 내용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런 형태가 회화와 접목되기 시작한 것은 당(唐) 말기부터이며 수월관음이 그려지기 이전부터 백의관음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보타사의 마애보살좌상이다. 대웅전 뒤에 있으며 머리에 쓴 보관 위로 ‘ㄱ’자 형태의 자연암석을 마치 보개처럼 쓰고 있다. 호분은 최근에 칠한 것으로 홍은동 보도각 마애보살좌상과 닮아 있다.

‘관세음다라니’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희고 깨끗한 첩(白淨), 곧 가늘고 고운 세포(細布)를 몸에 걸친다고 했으니 고려의 문사 이인로(1152 ~1220)는 환장로(幻長老)가 수묵으로 관음상을 그려 찬을 구하자 “관세음자는(觀世音子) / 관음대사로세(觀音大士) / 백의의 청정한 상은(白衣淨相) / 마치, 달이 물에 비친 듯 하네(如月映水)”라고 노래했으며, 동시대의 이규보 또한 최우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관음상을 그려 점안할 때에 “아! 그림 그리는 공인(工人)이 역시 우리 백의(白衣)의 모양을 비슷하게 한지라, 지극한 정성을 다 피력하여 우러러 연모(蓮眸)를 점개(點開)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눈앞의 보살상이 수월관음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옷 또한 동산수(東山) 최자(1188~1260)가 노래한 것처럼 “겹올.외올.가는 비단.불면 날 듯(穀) / 연기인가 안개인가(煙纖霧薄) / 희디흰 빛 눈인가 서리인가(雪皓霜白)”라고 노래했던 비단처럼 고운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잠자리 날개같은 모시도 아닌 것이 오히려 투박하기만 하니 난감하다. 땡볕을 피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 보살상 앞으로 나아가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건만 보살상 바로 앞에 여남은 명이 넘는 불자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끈 것은 한 할머니의 행동이었다. 보살상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돌아서는 계속 바위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 할머니에게 물으니 이 바위가 ‘붙임바위’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찍은 종로구 부암동 일대의 붙임바위 사진을 두어 장 본 적이 있어 귀가 번쩍 열렸다. 보살상 뒤로 돌아 그늘에서 할머니에게 말을 붙여봤다. “저기다가 돌을 붙이면 아들 낳는다는 그 바위인가요.” “그럼, 옛날에는 저 움푹 패인데다가 큰 돌을 문질러서 붙여 놓으면 아들 낳는다고 했지.” “그런데 왜 오늘은 돌은 안 붙이고 기도만 하세요.” “여기가 부처님 계신 곳이라고 이제는 그거 못하게 한 지가 오래돼요. 그래도 우리같은 사람들은 전에부터 하던 습관이 있으니까 자식들 새끼 잘 낳으라고 비는 거지 뭐.”

그렇다면 이곳은 민간신앙과 불교가 습합되어 어우러진 양태를 보여주는 곳인 셈이다. 곧 불교의 관음보살상이 새겨진 바위가 그 방향을 달리하면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기자암(祈子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를 하는 보살들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상호를 가까이에서 우러르기도 고약하게 연등이 걸렸으니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볼 수도 없었다. 그만 돌아섰다. 아무리 봐도 보도각 앞에 드리운 풍판(風板)과 같은 것은 아마도 닫집을 상징화한 것이려니 싶지만 그것조차도 전에는 없던 것이다.

서울 홍은동 보도각 백불의 전경.

그러니 도무지 먼 곳에서는 그저 상호의 일부분과 오른손만 보일 뿐 모두가 가려져 버렸다. 본디 각이 있었던 것을 되살리는 것이 어찌 허튼 일일까. 그러나 그 존상조차 제대로 우러르지 못하게 해 놓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서로가 되짚어 봐야 할 문제이지 싶은 것이다. 나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 안암동의 보타사(普陀寺)로 향했다. 그곳에 또 다른 백불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채 20여 분이 지나지 않아 다다른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앞은 흥겨운 젊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괜히 걷고 싶었다. 적당한 곳에 자동차를 세우고 500m 남짓 활기 충만한 길을 걸으니 개운사(開運寺)였다. 잠시 다리 쉼 할 틈도 없이 오른쪽으로 담장을 끼고 드니 그제야 주택가 골목길이 나타나며 조금 전과는 너무나 다른 고즈넉함이 배어 있는 골목길이 나타났다. 보타사는 그 끝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경내는 한 눈에 쏙 들어 올 만큼 작았으며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것도 없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예경을 올리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까닭은 마애불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옹색하기 그지없는 모습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웅전 보다 마애불이 먼저 새겨졌을 터인데 어찌하여 대웅전을 그토록 마애불에 바짝 붙여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면에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옆으로 비켜서서 그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얗게 호분을 칠한 것은 물론 오른손의 수인이며 머리에 쓴 관모에 난 뿔끝에 달린 타원형의 장식이 조금 전 본 보도각 백불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다만 보도각의 보살상은 관모와 거기에 달린 장식들을 금색으로 칠해 보다 뚜렷하게 알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두 곳 모두 바위의 편편한 면을 골라 조각한 것이 아니라 ) 자 형태로 가운데가 굴곡 진 바위 면을 골라 조각한 것조차도 같았다. 또한 두 곳 모두 좌상임에도 연화대좌가 조각되지 않은 것도 같으며 다만 보도각 백불은 머리에 보개와 같은 모자를 쓰지 않았지만 보타사 보살상은 ㄱ자 형태의 바위를 갓처럼 쓴 것이 달랐다.

이는 곧 마애불의 조성 시기나 양식이 같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곳 마애보살상의 호분 또한 본디부터 칠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2년 이후에 칠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보도각 백불의 그것을 흉내 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후에 호분을 칠할 까닭이 무엇일까. 이래저래 궁금함만을 안고 계단을 내려 왔지만 선뜻 도시 속으로 길을 떠나지는 않았다.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 얻은 고즈넉함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특징

두 마애보살상 모두 고려후기 조성

보도각 백불이라고 불리는 홍은동 보도각마애보살좌상은 1973년에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8번지이며 옥천암 경내에 있다. 옥천암 또한 이 일대에 있었던 장의사(藏義寺)에 딸린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장의사의 당간지주는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다.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를 따로 불암(佛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용재총화>나 <한경지략>에 불상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백불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이 석불 앞에서 기원을 드렸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잔해 와 왕실과 관련된 관음보살 도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음보살들이 머리에 쓴 보관의 가운데에 작은 화불을 새기는 것과는 달리 보도각 백불은 보관에 연꽃을 새긴 것은 특징적이다. 상호는 둥근 편이며 목의 삼도는 뚜렷하다. 또한 관의 좌우에 뻗어 있는 뿔과 같은 관대(冠帶)에도 타원형의 금판(金板)으로 된 수식(垂飾)이 달려있어 화려한 모습이나 조각기법에서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다. 조성 시기는 고려 후기인 13~14세기로 추정한다.

보타사 마애불은 서울시도 유형문화재 제 89호로 지정되었으며 소재지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7번지 보타사 경내이다. 양식적으로 보도각 마애보살상과 너무도 흡사하여 부연 설명할 것이 없으며 조성시기 또한 보도각 백불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가는 길

보도각 백불은 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 출구로 나와서 8번 마을버스를 타거나 경복궁 방면에서는 7018번 버스를 타면 된다. 승용차는 경복궁 방면에서는 자하문 터널을 지나 세검정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700m 정도면 오른쪽으로 옥천암(02-395-4031)이 보인다. 보타사는 지하철 6호선 안암역에서 내려 개운사 이정표를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보타사(02-928-2074)

 

[불교신문 2359호/ 9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