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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원주 흥양리 마애불좌상, 수암리 마애삼존불,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

 

원주 흥양리 마애불좌상, 수암리 마애삼존불,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

 
오늘도 안개가 새벽을 뒤덮었다. 그저 눈앞만 보일 뿐 사위는 하얗게 묻혀버렸고 덩달아 소리마저 잦아들어 길은 고요하기만 했다. 자동차를 세워 두고 저수지를 에돌아 걷는 길, 안개에 묻어 온 가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찬란한 山河도 숨죽인 부처님 고운자태
 
 
 
아!저곳인가. 부처님도 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모든 굴곡과 명암을 앗아 가 버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곳,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의 마애삼존불은 선각으로 새겨지기도 했을 뿐 더러 그 선조차도 마멸이 심해 빛이 좋은 한낮이어도 흔적을 더듬기 쉽지 않은 곳이 아닌가. 겨우 오른쪽 협시보살의 군의자락과 발 그리고 본존의 연화대좌 만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곳에는 향합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런들 어떠랴. 땅에 향을 꽂고 불을 붙였건만 타오르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지고 말았으니 는개처럼 뿌려대는 안개의 습기를 이기지 못한 때문이었다.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아 서성이기를 두어 시간,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해가 빛났다. 그러나 윤곽이 좀 더 선명해졌을 뿐 안개에 덮였을 때와 달라 진 것이 없었다. 본존불은 두광과 얼굴은 있으되 눈과 코는 새겼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협시 보살은 두 손을 모은 모습은 본존불을 향해 얼굴을 향한 것 같지만 맨 아래 발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얼굴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상해 있었다.
 
좌협시는 그 보다 더 심해 두광만이 그나마 선명할 뿐 왼쪽 어깨 부분 그리고 아래쪽으로 무엇인가를 새겼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참담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삼존불의 구성에 있어 본존불이 앉은 자세를 취하고 협시보살들의 자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좌협시 보살은 아랫부분이 땅 속으로 파묻힌 바위의 구조로 봐서 서 있는 모습을 새기기가 만만치 않아 좌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우협시 보살은 분명 서 있는 입상이다.
 
<사진>입석대 곁에 있는 흥양리 마애보살상은 멀리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섬강을 바라보고 계신다. 오른쪽 무릎 아래쪽으로 元祐五年庚午三月日(원우5년경오3월일)이라는 명문이 남아있어 1090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협시보살들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 중 대표적인 것은 국보 84호인 서산 마애삼존불이다. <법화경>에 따른 현세불인 석가모니불과 미래불인 미륵불 그리고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을 새긴 것으로 알려졌으며 좌협시불이 미륵반가사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보물 432호인 태안마애삼존불은 가운데에 보살상을 새기고 양 옆으로 불상을 새긴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 수암리의 마애삼존불 또한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우선 좌우의 협시불이 서로 다른 점이다. 입상이냐 좌상이냐의 차이도 그러려니와 두광의 표현도 다르다. 물론 우협시의 경우에도 두광의 윗부분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지만 좌협시와 비교했을 때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서로 다른 모습의 보살이 새겨 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위의 생김에 따라 바위의 왼쪽으로부터 입상의 우협시와 좌상인 본존불 그리고 좌상인 좌협시를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또 협시보살들의 존명 또한 서로 다를 것으로 짐작되어 강원도에 유일하게 있는 삼존불이면서 그 모습 또한 특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새벽녘 짙은 안개 속을 거닐 때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욕심껏 머물 수가 없었다. 치악산 중턱의 입석대로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내처 황골을 지나 입석대로 오르니 아래에 입석사가 있었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던 팔곡(八谷) 구사맹(1531~1604)의 시 ‘등입석대(登立石臺)’의 부제에 입석대 아래에 입석이라고 부르는 정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절 자리와는 다른 신선바위 아래쪽이었다고 한다. 입석대로 올라 바라보는 만산은 울긋불긋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 일대의 능선들은 이미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버린 듯 단풍은 입석대가 있는 5부 능선까지 화려한 물을 들이며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사진>마애삼존불은 강원도에서 그 존재 자체로 귀한 것이지만 아쉽게도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입상인 우협시와 본존불의 두광과 연화대좌 만을 어렴풋하게 알아 볼 수 있다.
 
그 입석대를 에돌아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들자마자 눈앞에 부처님이 계셨다. 막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 한 그루를 시자로 데리고 저 멀리 흘러나가는 섬강 물줄기를 굽어보며 은자(隱者)인 양 앉아 계시는 그 고즈넉함에 대해 경외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자리는 은밀하여 입석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입석대에서도 부처님 자리가 보이지 않으니 20m 가량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서로가 보이지 않는 특별한 자리였던 것이다.
 
만산 품은 채 선정 드신 마애상 모습 驚異
화려한 단풍.소박한 부처님…“눈 시리네”
 
그 자리는 바람과 바람 사이의 틈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 바람이 지나가고 또 한 바람이 다가 오기 전의 찰나와도 같은 그 틈 말이다. 질식할 것 같은 공허한 긴장이 이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여 적멸의 공간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1090년 3월부터 오늘까지 917년 동안 만산을 품은 채 장좌불와의 깊고 그윽한 선정에 드신 것이니 향 한 자루 사르고 절하는 것만으로는 예를 다 갖추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맑은 바람 한 점 들이키고 부처님을 우러렀다. 3m는 족히 되어 보임직한 바위의 중간 부분에 새겨진 부처님은 대좌 위에 앉아 계셨다. 비록 대구 동화사 일주문 옆 부처님이나 경기도 하남의 선법사 경내에 있는 태평2년명 마애약사여래좌상의 팔각대좌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담박하게 만들어진 사각형의 각진 대좌 위에 다시 연화좌를 깔고 그 위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그 대좌의 오른쪽 곁에 세로로 元祐五年庚午三月日(원우5년경오3월일)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었다. 워낙 희미하여 빛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아예 흔적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의 얼굴 부분.
 
원우5년은 고려 선종 7년인 1090년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부처님이 그 해 3월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917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부처님의 모습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조각이 마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때문에 받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전체적인 조각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법의가 화려하면 상호가 보이지 않고 둘 모두 아름다우면 입을 벌리며 놀라기는 할 지언 정 벅차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눈앞의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다. 사각형의 대좌나 연화좌 그리고 법의는 단순했다. 하지만 고부조로 새긴 상호는 그렇지 않았다. 둥글지도 그렇다고 모나지도 않은 상호의 눈과 눈썹 그리고 코와 입술은 섬세했으며 탄력이 넘쳤다. 비록 코는 깨졌지만 눈과 입술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법의나 대좌를 조각한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이 새긴 것처럼 말이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조각 경향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 쪽을 비우면 다른 쪽이 가득 차 보이는 법이며 그것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법이라고 말이다. 입석대를 에돌아 후미진 곳에 은자처럼 앉아 탐진치(貪瞋痴)를 멸한 채 선정에 든 눈앞의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이지 싶었다. 여태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장엄하여 숨 막힐 듯이 아름다운 부처님이나 단순하여 조성한 사람들의 신심이 넘쳐나는 부처님 앞에 서 본 적이 한 두 차례이겠는가.
 
하지만 이토록 조화로운 모습은 또 새롭기만 했다. 그것은 찾는 이 드문 자리일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킨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 싶기도 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당의 한유(韓愈)가 반곡(盤谷)에 은거하여 살던 이원(李愿)에게 지어 주었다는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법보시 할 것 조차 없는 가난한 순례자가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놓으려던 것인가.
 
이지누 / 기록문학가
 
 
 
 
■원주의 마애불 세분은…
 
강원도에 소재한 마애불 중 반이나 되는 세 분 모두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에 있다. 원주에서 안흥 방면으로 향하는 42번 국도를 따라서 좌우로 있으며 그 모습 또한 모두 다르다. 유형문화재 제118호인 수암리, 119호인 평장리는 선각이며 117호인 흥양리 마애불좌상은 그와는 달리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수암리   도내 유일 三尊…마멸 아쉬워
평장리   향로.연꽃 받쳐 든 공양 모습
흥양리   상호 섬세…아래는 단순 특이
 
그 중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강원도 지역에서 여태 보고된 적이 없는 유일한 삼존불이다. 그러나 선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으며 마멸이 심해 존상들을 제대로 살필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오전 시간에 눈여겨보면 우협시와 본존불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본존의 수인은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며 연화좌 위에 앉은 좌상이다. 우협시는 얼굴만 알아보지 못할 뿐 그나마 전체를 살필 수 있다.
 
<사진>수암리 마애삼존불은 안개 뒤로 보이는 동산 기슭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가 348cm에 이르는 평장리 공양마애보살상은 평편한 바위 면에 새겼지만 선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기에 정면이 아니라 왼쪽으로 약간 돌아 앉아 있다. 또한 오른쪽 무릎을 꿇었으며 왼쪽 무릎을 세워 공경의 예를 갖추었다. 손에는 두 손으로 향로 혹은 연꽃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공양을 올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받는 주체가 없이 홀로 새겨졌다는 점이다.
 
11세기 후반인 1090년에 새겨진 흥양리 마애불좌상은 두광이나 대좌를 제외한 불상의 높이만 90cm인 아담한 크기이다. 전체적인 비례는 안정감이 있으며 머리는 나발이며 목의 삼도는 생략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수인을 하고 있다. 두광과 신광은 각각 따로 새겼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 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상호부분의 섬세함 조각과 그 아래로 갈수록 점점 단순화 되며 간략화 되는 것 또한 흥미롭게 보인다.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원주 나들목으로 나간다. 좌회전 하여 400m가량 가다가 우회전 하여 42번 국도를 따라 소초면으로 향한다. 2차선 도로가 끝나고 4차선 5번 국도와 만나는 곳에서 좌회전 하여 4분 정도 가면 수암리 마애삼존불 이정표가 있다. 그곳에서 5분 정도 직진하여 오른쪽으로 있는 진우산업 공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옆의 산기슭에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이 있다. 흥양리 마애불좌5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해 5분 정도 가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하면 된다. 황골 입구 예전 매표소에 자동차를 세우고 1시간 남짓 걸으면 입석대에 닿을 수 있다.
 
 
[불교신문 2372호/ 10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