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얘기

부루나와 가전연의 설법포교 방법

 

부루나와 가전연의 설법포교 방법

사자후 토해내는 존자 나오길 기대

 

변증.수사법 동원 포교 효과적

논리적 토론 통한 설법도 중요

 

부처님의 주요 제자 중에는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와 논의제일 가전연 존자가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존자에게 부여되고 있는 설법과 논의제일이라는 찬탄은 부처님께서 직접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칭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설법과 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먼저 부루나의 수행과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본 이름은 ‘뿐나 만따니뿟다’로 석가족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 만따니는 안냐꼰단냐 존자의 여동생이었다.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은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부루나를 부처님의 제자로 출가시킨 수행자였다. 부루나가 어떻게 설법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동향 사람들 500명을 출가시키고 설법의 기본을 가르쳤으며, 모두가 아라한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으로 가전연은 남인도 바라문 출신으로 갓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의 미래를 예언했던 아시타 선인의 제자였으며, 스승의 유언에 따라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잘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으며, 교의를 이해하고 논의하는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제자로 알려져 있다.

부루나와 가전연의 등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부루나는 설법의 형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반면에 가전연은 토론과 논의라는 형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했다. 양쪽 모두 ‘말’을 사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설득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옛날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변증법(辨證法, dialectic)과 수사법(修辭法, rhetoric)이라는 두 가지 설득방법이 발전하였다. 변증법은 주로 논증적 토론을 이끌어 가는 방법이고, 수사법은 연설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데 사용한다. 이후 변증법은 주로 학문적 연구방법으로 채택된 반면에 수사법은 정치적 연설에서 많이 활용되었다. 변증법은 학문적 토론 방법으로 올바른 것 혹은 진리에 대해 논증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고, 수사법은 설득을 통해 동조와 지지를 얻어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종교는 변증법적 토론방법을 동원하여 교학을 발전시켰고, 수사법적 방법을 통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신도를 확보한다. 불교도 오랫동안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해 왔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은 현대적인 포교활동 과정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지혜이며 능력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진리라고 믿으며 다른 종교적 신념을 비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세상에는 각기 다른 많은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과 견해만이 진실하다는 생각을 갖고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애매한 진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종교적 토론은 쉽게 진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최고의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진리답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설법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논리적 토론방법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부루나 존자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법을 잘 했는가는 <중아함경> 제24 파발수레의 경에 잘 나타나있다. 이 경에 의하면 사리불 존자는 부루나가 사람들로부터 ‘존경할만한 수행자’라는 칭찬을 듣자 실제로 어떤 수준인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대화에서 부루나 존자는 계정혜 삼학과 해탈지견 등 일곱 가지 문제에 대한 청정의 의미를 ‘수레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여 최상의 논리로 사리불 존자를 만족시켰다.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은 “최상의 소리, 두려움이 없는 소리, 논박할 수 없는 소리”로 중생들을 향해 진리를 설파하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부루나와 가전연 등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 세계에 전하기 위해 사자후를 토해낼 수 있는 설법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논설위원.중앙승가대 교수

 

[불교신문 2383호/ 12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