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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영취산-나란다불교대학

 

영취산-나란다불교대학

 
 
인도시간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났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7시30분. 출근전쟁을 치를 시간이었다. ‘이래서 습관이 중요하구나! 부처님께서 행동 하나하나를 삼가며 바른 습을 익히도록 한 까닭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일행을 태운 버스는 1시간을 달려 영취산에 도착했다. 부처님께서 6년간 안거철마다 머물면서 <법화경>을 설법하신 곳이다. 이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나란다불교대학터를 참배했다.
 
 
부처님 가신 길 좇아 영취산에 오르다
 
 
넓은 평야가 주를 이루는 북인도에서 천혜의 산맥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영취산을 꼽는다. 몇 겹의 산으로 쌓인 산맥의 중앙에 위치한 영취산 정상은 독수리의 형상을 닯은 큰 암벽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섭3형제를 교화하고, ‘진실한 가르침의 연꽃’이란 뜻의 <법화경>을 설법하신 곳이다.
 
영취산을 오르는 방법은 리프트를 이용하는 것과 도보로 30여분을 걷는 방법이 있다. 리프트는 일본 일련종 계열 종파에서 설치한 것인데 도착점은 그들이 세운 사원이었다. 부처님이 머무셨던 곳과는 200여m 거리가 떨어져 있다. 일행은 부처님이 걸은 길을 따라 도보를 택했다.
 
<사진>인도 비하르주에 위치한 나란다 대학터. 한때 100개의 강의실에 1만명의 스님들이 머물던 나란다 대학은 12세기 이슬람 교도에 의해 파괴돼 현재 유물만 남아있다.
 
산을 오르는 중간에 작은 탑이 서 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빔비라사왕이 세운 것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러 온 빔비사라왕은 이곳에서 가마에서 내려 일반 대중과 같이 걸어갔다고 한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경사진 길을 30여분 걷자니 땀이 송송 배겨난다. 산 정상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일순간에 땀을 날려버렸다. 먼저 도착한 일행은 부처님이 1200명의 제자들에게 설법한 장소라는 ‘향실(香室)’터에서 벌써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산 아래서 사온 꽃 한송이를 부처님께 올렸다. 부처님이 가섭삼형제를 교화하고, 마하가섭에게 연꽃을 들어보이며 설법을 했을 장면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정상에선 ‘법화경’ 진실한 가르침 들리는듯
나란다불교대학 유적지 웅대한 규모에 경탄
과거만 남고 현재 없는 인도불교 현실 씁쓸
 
감옥에 갇혀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죽어간 빔비사라왕이 얼마나 이곳을 오르고 싶었을까.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렬한 지원자였던 빔비사라왕은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왕이었다. ‘이러다 통치도 한번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의 아들 아쟈타샤트루는 반란을 준비한다. 이를 알게된 빔비사라는 아들에게 왕위를 양위했는데, 아버지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아쟈타샤트루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일체의 음식을 중지했다. 왕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부인 바이데히는 온몸에 밀가루와 꿀을 발라 감옥을 찾아가 몸에 묻은 밀가루를 떼어먹게 했다.
 
그러자 아들이 묻는다. “어찌하여 아직도 살아있는가?” “저 열린 창문으로 매일 부처님을 바라보며 예배할 수 있기에 아직 살아있다.” 빔비사라의 대답을 듣고 아들은 창문을 보지 못하게 발목을 자르고, 결국 왕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건을 바라봐야만 했던 부처님은 결국 마가다국을 떠나 코살라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취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사방 60m 정도의 감옥터만이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해준다. 견고하게 쌓은 기단을 한바퀴 돌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기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패륜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씁슬한 웃음을 지어본다. 불과 수십년 세월의 영화를 위해 천륜을 거슬렀던 아쟈타샤트루는 지금 흔적조차 없다. 맨바람만 불어오는 발 아래 감옥터가 주는 느낌, 뭐라 표현해야 할까.
 
<사진>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근처 대나무숲.
 
영취산에서 받은 복잡한 감정은 죽림정사와 나란다대학을 차례로 순례하는 동안 답답한 심정과 뒤섞여버렸다.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는 몇 다발로 이뤄진 대나무 숲이 전부였다. 그나마 부처님이 계셨던자리에는 이슬람의 무덤이 놓여 있었다. 인도의 문화와 정신을 짖밟으려는 행위였다.
 
나란다 대학을 들어서자, 우선 거대한 규모에 놀랐다. 그리고, 이 유적을 철저히 파괴하고자 했던 이슬람의 ‘칼과 코란’의 논리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정복전쟁에서 이기면 칼 대신 망치를 들었던 ‘천박한 타종교 배척의식’. 수천명의 스님들이 모여 예불을 올리고, 경전을 논했을 공간이 한낱 관광지로 전락한 사실에 어찌 마음이 편할 것인가.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상인들의 보시를 바탕으로 건립돼 불교사상을 완성시킨 곳이다. 10대 제자 중 한명인 사리불의 고향인 나란다에 건립된 불교대학은 5세기에서 7세기까지 200여년에 걸쳐 건립됐다. 7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당나라 현장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100개의 강의실에서 1만명의 수행자.불교학자들이 모여 경전을 토론하고, 율법을 정리했다고 한다.
 
나란다 대학은 그러나 12세기 인도를 침범해 무굴제국을 설립한 이슬람교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고, 스님들은 목숨을 잃었다. 불서를 태우는데만 한달이 넘게 걸렸다니 얼마나 많은 책이 존재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침략자들에게 잘 조직된 승단은 두려운 존재였다. 인도 사회와 문화, 사상의 중심에 있던 대학과 스님을 없앰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지배를 꿈꿨다. 하지만 흔적조차 지울 수는 없었다. 남은 유적은 땅속에 묻혀 70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영취산 정상의 ‘향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자리로 알려졌다.
 
역사의 흔적인 유물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500만 ㎡의 땅에 세워진 나란다 대학 건물의 과학적 설계와 웅대한 규모는 당시 인도에서 불교의 위상을 옅보게 한다. 남아있는 건물의 높이는 최대 30m 정도. 층층히 구성된 건물은 거대한 쌀 저장창고, 지름 3m 정도의 거대한 우물, 한칸 크기의 수행공간, 도서관 자리 등이 남아 있다. 같은 규모의 방이지만, 스승의 방은 침대 한 개, 제자들의 방은 침대가 2~4개 정도 배치된 점도 이채롭다. 또한 우리나라의 무문관을 연상케 하는 독방 시설도 수십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매일 막대한 비용이 들었을터다. 이를 모두 신도들의 보시로 충당할 수 있었다는 점은 당시 불교의 대중적 영향력을 가늠하게 해준다.
 
유물만 있고, 현재가 없는 인도불교의 아픔을 뒤로하고 열차에 올랐다.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는 밤공기를 가르며 부처님이 초전법륜을 굴린 곳, 사르나트 녹야원이 있는 고락푸르로 향했다.
 
인도 라즈기르=안직수 기자
 
 
# 북인도 근-현대불교 지도자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경전을 체계적으로 설법하며 초기 승단을 완성한 곳은 한 곳은 마가다국이었다. 당시 북인도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은 현재 비하르 주 라즈기르시에 속해 있으며, 보드가야, 죽림정사, 영취산, 왕사성터 등이 남았다.
 
북인도에 근대 불교를 일으켜 세운 사람은 암베드카르(1893~1953)다. 인도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카스트 제도의 철폐를 주장했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암베드카르는 인도 나그프르에서 20만명의 불가촉천민을 불교로 개종시킨 것을 시작으로, 법무장관 사임 이후 인도불교부흥운동에 헌신했다.
 
‘빈민의 친구’ 암베드카르 “카스트 철폐”주장
 
랄루 장관은 성지순례 유치로 경제부흥 앞장
 
현재 북인도의 불교유적 보존과 성지 개발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사람은 현 철도장관인 랄루 프라사드 야다브(Lalu Prasad Yadav)다. 인도의 최하층 카스트인 수드라 출신인 그는 국회위원, 주지사를 걸쳐 2004년 철도장관에 임명되자 낙후된 북인도 경제부흥을 위해 불교성지 참배객 유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랄루 장관이 일본 총리와 나눈 대화는 인도인에게 유명하다. 인도를 방문한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당시 비하르주 주지사였던 랄루 장관에서 “인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비하르주를 일본에 6개월만 빌려주면 도쿄처럼 만들겠다”고 장담을 했다. 그러자 그는 “도쿄를 나에게 2주일만 맡겨주면 비하르처럼 만들 수 있다”고 응수했다. 통쾌한 유머로 인도인의 자존심을 세운 일화다.
 
[불교신문 2372호/ 10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