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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깨달음의 성지 부다가야

 

깨달음의 성지 부다가야

 

인도 델리공항을 나서자 독특한 카레향과 무더운 기운이 확 몰려왔다. 11억 인구가 사는 인도의 중심 공항이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규모다. 다른 일행이 30여 분 걸려 짐을 찾을 동안, 기내에 들고 간 배낭 하나를 메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부처님의 나라에 온 것이다. 인도관광청 초청으로 지난 5일부터 14일까지 북인도에 위치한 불교성지순례에 나섰다. 인도정부가 처음 운행한 마하파리니르반 성지순례 특별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다. 4대 성지를 중심으로 인도성지순례기를 연재한다.

 

아!보리수…위대한 깨달음에 108배 올리고…

 첫 운행 성지순례 특별열차로 가야역 도착

 正覺 이룬 보리수 앞에 마하보디사원 위용

 곳곳에 부처님 삶의 흔적…참배 행렬 이어

 

델리 사프르다르정 특별역을 떠난 열차는 다음날 아침 5시 가야역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설산에서 6년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은 곳. 부다가야를 찾아가는 길이다. 인도 성지순례길을 개발한 것은 일본인들이다. 1980년대 일본인의 성지순례가 줄을 잇자, 일본과 인도의 기업이 합자해 곳곳에 깔끔한 호텔을 마련했다. 아침식사와 휴식을 겸해 여장을 푼 곳은 로터스 닛코 호텔. 이곳서 도보로 10여 분 떨어진 곳에 불교 최대의 성지인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부처님!” 사원에 들어서서 52m 높이로 솟은 대탑을 보자마자 터져 나온 감탄사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리수나무에,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대왕이 건립한 마하보디 선원에는 수많은 참배객들이 곳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하보디 선원은 평지에서 15m 정도 낮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폭우라도 내리면 사원에 물이 찰 텐데 왜 다른 곳보다 낮게 설계를 했을까. 사찰을 세운 사람은 기원전 3세기에 인도 통일을 이룬 아쇼카 대왕이었다.

<사진> 깨달음의 성지, 부다가야 마하선원 전경. 가운데 우뚝 솟은 52m높이의 정각탑이 장엄한 모습으로 성지순례객을 맞이한다.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아쇼카왕(Ashoka B.C 273~232)은 인도를 통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도 잔인한 왕이었다. 마지막 정복전쟁이었던 칼링가 왕국과의 전투에서 그는 10만 명이 넘는 병사를 죽였는데,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고 한다. 승리에 도취해 있던 아쇼카 왕의 마음을 바꾼 것은 죽어가는 한 병사의 눈빛이었다. 목에 화살이 꽂힌 채 아쇼카왕을 비난하며 죽은 병사를 보며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를 돌아보며 괴로움에 빠졌다. 이에 야사라는 스님을 통해 모든 생명의 귀중함과 평등함을 자각한 아쇼카 왕은 이후 전국에 8만4천기의 탑을 세우고, 부처님 성지마다 사원을 세웠다. <잡아함경>

하지만 1526년 인도를 침략해 무굴제국을 세운 이슬람 세력은 불교성지를 보이는 대로 파괴했다. 이곳 마하보디 사원도 부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병사들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차마 없앨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주변에 흙을 쌓고, 대탑 앞에 벽을 만들어 건축물을 감춰버렸다.

지혜롭게 이 성지를 보존해준 병사들에게 감사의 합장을 올리며 사원으로 들어섰다. 사원을 돌아서자 25m 높이의 거대한 보리수가, 금강좌에 새긴 부처님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틈에서 삼배를 올리고 나서 다시 보리수를 바라본다. 아쉬움이 느껴진다. 인도를 침범한 이슬람은 불교를 철저히 파괴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리수도 죽음을 맞아야 했다. 지금의 보리수는 스리랑카에 이종했던 원(原) 보리수에서 다시 종자를 받아 키운 것이라고 한다.

참배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49일간 선정에 잠기셨던 일곱 곳인 7선처로 이어졌다. 부처님이 천안통을 얻은 곳에 위치한 작은 보탑, 시방의 불보살에게 화엄경을 설했다는 자리, 길을 지나던 목동이 선정에 든 부처님을 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려고 돌을 던졌다는 붓다 나무, 보리수 바로 옆으로 경행(徑行)을 하자 연꽃이 피어올랐다는 18개의 연꽃대좌, 용왕이 코브라를 시켜 부처님을 비로부터 보호했다는 연못, 전법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생각의 나무를 하나하나 참배하면서 따뜻한 돌의 기운을 느껴본다.

‘이곳에서 수행하는 많은 불자들이 성불하게 하소서’ 마음의 기도를 올리고, 사원을 나와 니란자나 강으로 향했다. 어림짐작으로 2~3km 정도 떨어졌을까. 멀리 설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해 6년간 고행을 한 곳이다. 극단적 고행을 버리고 부처님은 이 강가로 내려왔다. 그리고 강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로부터 100마리의 소에서 짠 젖을 공양 받았다. 그리고 강을 건너 보드가야로 가서 선정에 들어 깨달음에 이르렀다.

<사진>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이 7일간 경행(徑行)을 했다는 연꽃대좌. 부다가야 마하보디 선원내 위치해 있다.

경전에는 걸어서 강을 건넜다는데, 부처님은 깨닫기 전부터 이적을 행하셨다는 말인가. 니란자나 강에 이르자 의구심을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젖줄인 니란자나 강은 넓지만 깊지 않다. 건기에는 물이 보다 줄어드는 까닭에 충분히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한다.

강에서 조금을 가면 수자타의 집터와 수자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탑이 자리하고 있다. 탑은 사암을 벽돌처럼 찍어 쌓은 형태인데, 돌 사이에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쌓아졌다. 수자타공덕탑은 그동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 마을 가운데 솟은 작은 동산으로 치부됐다가 최근에 발굴을 통해 일반에 알려졌다.

불교가 유럽에 전해졌을 때, 유럽인들은 불교의 이야기를 수많은 인도의 신화 가운데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신화적 상상력이 가공된 이야기로 치부됐던 불교는 하지만 19세기 영국인 고고학자들이 땅속에 묻혀있던 성지를 하나둘 발견하면서 ‘사실의 기록’임이 확인됐다. 아쇼카 왕이 곳곳에 세운 유물과 석주가 2500년 불교 역사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부처님이 출가해 6년간 고행을 한 설산. 니란자나 강에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아쇼카왕은 역대 왕 가운데 인도인들에게 가장 추앙받은 인물이다.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훗날에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그다. 인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에도 아쇼카(무우수, 근심없는 나무)라는 이름이 붙혀져 있을 정도로 인도인에게 사랑을 받는 임금이다. 불교성지를 찾아 길을 떠난 여행객에게는, 2500년 전 부처님의 발자취를 다시 밟게 해 준 고마운 위정자가 아닐 수 없다.

부다가야 주변에 태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세운 사원을 둘러보고 다시 마하보디사원으로 향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석양을 받으며 108배를 올렸다. 그리고 ‘부처님의 위대한 삶을 따라가 보겠노라’고 서원을 세워본다.

여행은 <법화경> 성지 영축산과 세계최대의 불교대학이 위치했었던 ‘나란다 대학’ 터로 이어졌다.

 인도=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 불교 8대성지란

탄생지 룸비니동산 등 8곳

수년 사이 많은 유적 발굴

인도 불교성지순례는 대부분 7대 성지를 참배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북인도 지역에 위치한 불교 8대 성지 가운데 부처님이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 마야부인께 설법하고 지상에 내려온 ‘샹카쉬야’는 너무 외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이다.

8대 성지는 부처님이 탄생한 네팔의 룸비니 동산,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부다가야, 5비구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신 사르나트 녹야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열반당 등 4대 성지와 6년에 걸쳐 <법화경>을 설법하신 영축산과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가 위치한 라즈기니, 24안거를 보내며 <금강경> 등을 설하신 기원정사, 릿차비족과 아쇼카왕의 스투파 등이 있는 바이샬리, 그리고 샹카쉬야를 말한다.

인도정부에서는 불교 성지 보존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 최근 수년 사이에 흙속에 묻혀있던 많은 유적들이 발굴돼 깔끔하게 정돈되고 있다.

 

[불교신문 2370호/ 10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