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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창동마애불좌상·계신리마애불입상

 

창동마애불좌상·계신리마애불입상

풍경소리 선사 발걸음 끊긴 곳 순례자 발길만…

남한강 주변의 불적들은 다양하다. 오대신앙의 본산인 강원도 평창 오대산을 떠난 물줄기가 베풀어 놓은 불적은 충주에 닿을 때까지는 드문드문하다. 석탑 한 기만이 덩그렇게 남은 진부의 수항리 절터와 영월의 보덕사 그리고 단양의 늪실 강변 이름 모를 절터에 서 있는 향산리 삼층석탑과 청풍의 정방사를 지나면 월악산 자락에 깃든다. 월악산은 삼층석탑과 사명대사 사행(使行)벽화가 있는 신륵사, 터만 남은 월광사와 사자빈신사 그리고 미륵리 절터를 비롯하여 마애불이 아름다운 덕주사를 품고 있으니 오대산에 이어 또 한 차례 아름다운 불법의 꽃을 피우는 도량인 셈이다.

<물안개에 젖어 있는 충주 창동 마애불좌상은 남한강 물길을 보살피는 수호신이었으며 남한강의 수운이 발달했던 즈음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산을 떠나 충주에 다다르면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찬란한 모습으로 맞이하지만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가 머물렀던 정토사는 물속에 잠겨 사라졌고 신필(神筆)이라 불리던 김생이 주석하던 김생사 또한 그 흔적이 가뭇하다. 청룡사며 거돈사와 법천사 그리고 고달사도 모두 폐사되어 그 터로만 남았으니 한때 물길을 따라 융성했던 불교문화들은 여주 신륵사에 닿아서야 숨을 돌리며 기지개를 켠다. 그 중 충주에서부터 여주로 이어지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 유난히 많은 절집이 들어섰고 또 사라졌다. 풍경소리 그치고 선사들의 발걸음조차 끊어진 그곳은 폐사지 답사의 일번지로 기억되며 뭇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니 과거의 영화로운 이야기들이 아직도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부처님이 여여하게 계시지만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 있으니 충주 창동 마애불좌상과 여주 흥천면 계신리의 석불암 마애여래입상이 그것이다. 남한강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불적들 중 강에 잇댄 곳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로는 두 분 밖에 없을 것이며 나라 안을 통 털어서도 이와 같이 강에 바짝 붙어서 새긴 마애불은 찾을 수 없다. 더구나 그분들이 바라보고 계신 곳은 다름 아닌 물길이어서 더욱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대동맥 남한강 물길

묵묵히 지켜온 ‘마애부처님’

뱃사람 무사안녕 기원한 수호신

겨울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른 새벽, 창동 마애불로 가는 길은 안개에 묻혀 앞을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동살에 붉게 물들며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을 기대했건만 희뿌연 안개에 싸여 있은들 어떠랴.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땅인지 겨우 가늠하며 붉은 바위가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강으로 내려서자 부처님은 예의 여여한 모습으로 새벽 강을 지키고 계셨다. 넘실넘실 부처님에게로 왔다가 강으로 돌아가 스러지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스멀거리며 피어나는 안개는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하얀 장삼을 너울거리며 나비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부처님은 잊고 말았다. 코가 매울 정도로 차가운 공기에 묻어 온 옅은 물비린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보니 주먹코를 한 부처님 또한 지긋한 눈길로 안개이 춤사위를 바라보고 계셨다. 땅이라고는 마애불 앞에 두어 평 남짓한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한눈팔다가 발을 헛디디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에 빠지고 말 것 같아 추위에 웅크린 몸이 더욱 쪼그라들어 조심할 뿐, 한눈에 부처님을 여유 있게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대략 부처님의 크기는 4m에 이르지만 코 밑에서 올려다봐야 할 지경인 것이다. 그러니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애불이 새겨질 당시에는 앞 쪽에 좀 더 넓은 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주댐과 조정지댐을 막으며 높아진 수위 때문에 부처님 앞의 땅이 사라진 것이려니 싶지만 아무리 후하게 생각을 해도 물과 너무나 가까운 곳에 계신 것이지 싶다. 아무래도 부처님을 온전하게 보려면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바위 높은 곳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말이다.

그것이다. 마애불이 이곳에 새겨진 까닭이 말이다. 마애불 앞에 전각자리는 물론 근처에서 발굴된 절터조차 없으니 이는 홀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강물과 맞닿은 곳의 바위 높은 곳에 새겨진 까닭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강위의 사람들을 굽어 살피기 위해 새긴 것이기 때문이다. 강위의 사람이란 어부는 물론이거니와 물길을 오가는 뱃사람들 모두를 일컫는 것이다. 지금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육운(陸運)이 발달하고 수운(水運)이 사라졌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남한강 물길은 곧 지금의 경부고속도로처럼 나라를 이어주는 대동맥과도 같은 길이었다.

이 지역이 창동(倉洞)인 것 또한 가까운 곳에 나라의 조세(租稅)를 보관하던 창고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흥창에는 낙동강을 따라 경북 상주까지 와서 다시 문경새재를 육로로 넘어 온 경상도의 조곡(租穀)은 물론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의 그것들도 모이던 큰 창고였다. 가흥창에서부터 한양의 경창(京倉)까지는 물길로 대략 260리 정도였으며 배를 이용해서 조곡을 운반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물길을 오가는 배들은 많았으며 더구나 가흥창 옆은 그 유명한 목계나루이다. 가흥창에는 관선(官船)이, 목계에는 상선(商船)이 끊일 날이 없었을 터이니 이 일대는 요즈음 말하는 항구도시와도 같았던 것이다.

<뱃사람들이 기원을 올렸던 흔적.>

목계는 한양에서 큰 배가 내려 올 수 있는 마지막 하항(河港)이었다. 목계에서 청풍이나 단양과 같은 한강 상류로 향할 때에는 다시 작은 배로 갈아 타야 했으니 배에 싣고 온 산물이 한 번 풀렸다가 다시 선적되거나 지게 짐을 지던 곳이다. 산물이 모이는 곳이니 사람이 들끓고 당연히 시장이 섰다. 시인 신경림의 ‘목계장터’라는 시가 말하고 있듯이 목계장터는 그 옛날 강으로 배가 다닐 때부터 1930년대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게 목계로 향하는 발길이 잦았으니 물길은 언제나 갖가지 사연을 담은 배들로 가득했으리라.

오늘 이처럼 물안개 속에 앉아 계신 부처님은 그들이 무사히 다녀가기를 묵묵히 빌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뱃사람들의 기원은 배를 멈추고 할 뿐 땅으로 내릴 일이 없었다. 더러는 기어코 부처님 아래에 배를 대고는 먹을 갈아 글 한 줄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처님 아래 바위에 남기며 무사안녕을 빌었으니 지금도 그 흔적은 먹 글씨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부처님 앞에 참배를 할 수 있는 공간 보다는 부처님이 바라보는 시선이나 멀리 배에서 부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새기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지 싶다.

부처님의 시선은 공사 중인 다리에 막히긴 했지만 달천(達川)과 남한강이 만나는 탄금대를 향하고 있다. 시선뿐 아니라 바위 높은 곳에 새긴 까닭 또한 보다 넓은 지역을 바라보는 것이 곧 보다 많은 중생을 돌보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인가. 뱃길을 오가는 이들의 염원을 담은 부처님의 상호는 세련되거나 근엄하기보다 오히려 마을 동구에서 만나는 돌벅수를 닮아 푸근하기만 하다. 주먹코와 가늘게 찢어진 눈 그리고 두툼한 반달형의 눈썹이 빚어내는 상호는 자주 대하던 부처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바위의 질이 좋지 않아서 균열이 심한 때문인가. 귀는 마치 최근에 다시 새겨 놓은 듯 어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래로 늘어뜨린 통견의 법의는 얼굴에 비해 더욱 정제된 세련미를 갖추었다. 혹 상호 부분의 바위가 떨어져 나가면서 후대에 손을 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또 입상인지 좌상인지도 헛갈리지만 가슴께에 U자형으로 모인 법의의 위치와 그 아래로 치마처럼 퍼진 법의 자락의 비례를 생각해보면 좌상임이 분명하지 싶다.

이로 미루어보면 마애불의 조성 시기는 대략 고려 중기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에 창고가 있지도 않았을 뿐 더러 조세창 곧 수참(水站)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은 고려 말의 문신인 포은(圃隱) 정몽주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비로소 물길을 이용하는 수운이 활기를 띠었으며 창동지역에는 고려시대에 덕흥창(德興倉), 조선 초에는 그 이웃에 경원창(慶原倉)이 세워졌으며 그 둘을 합해 가흥창이 생긴 것은 세조 11년인 1465년의 일이다. 그러니 마애불의 조성 시기 또한 그 이전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새벽부터 두어 시간 머물렀지만 안개는 걷히지 않고 그만 여주의 계신리로 향했다. 목계나루를 지나 폐사지마다 발길 멈추었다가 신륵사를 거쳐서 닿은 계신리 부처울 마애불은 여래입상이다. 오후 햇살을 가득 머금은 부처님의 법의는 통견이며 옷 주름의 표현이 섬세하여 바람이라도 불면 곧 날릴 것만 같다. 허리는 매듭을 묶은 허리띠로 표현했으며 세 겹의 두광 밖으로는 화염문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으니 아름답다. 나라 안 마애불들 중 그 빼어남은 손꼽을 만하다. 내 눈이 덜 익어서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만한 부처님이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받는 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아하며 세련된 표현기법들은 통일신라로부터 이어진 고려 초기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데 말이다.

마치 공중부양이라도 한 듯이 허공에 떠 있는 부처님의 시선을 따라가면 창동 마애불처럼 멀리 남한강에서 눈길이 멎는다. 이곳의 부처님 또한 물길을 오가는 모든 뱃사람들의 무사안녕을 보살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길 교통이 끊어지면서 뱃사람들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두 분 부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렇기에 오히려 한적하여 오롯하게 부처님과의 대화에 몰두 할 수 있으니 이만한 곳 또 드물 것이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충주 창동 마애불좌상

왜군 맞선 신립장군 ‘전설’

남한강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호신인 두 분 부처님에게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충주 창동 마애불(충북 유형문화재 제76호)이 바라보는 곳에 탄금대가 있다. 우륵이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전하는 탄금대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립 장군이 문경의 조령을 방어선으로 구축하지 않고 배수진을 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신립은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에게 크게 패하여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신립이 적군의 화살을 맞고 난 다음 강물에 뛰어들어 이곳까지 흘러와 마애불을 새기고 숨졌다는 것이다. 신립이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던 가슴이 지금 마애불을 붉게 물들인 흔적으로 남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바위 속의 철분이 녹아 흐른 것일 뿐이다. 또한 이 설화는 마애불의 양식과 비교해도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신립과 마애불을 연결시키면서 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가지려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여주 계신리 마애불입상

신륵사 머문 무학대사 그려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 곳을 부처울 혹은 불암동(佛巖洞)이라 부르는 여주 계신리의 마애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은 무학대사가 신륵사에 머물 때에 새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어느 날, 무학대사가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눈에 띈 바위에 긴 삿대를 들어 부처님을 새겼다고 하니 흥미롭지만 이 또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마애불은 조성 시기는 고려 초기이지만 무학대사는 여말선초의 스님이기 때문이다.

<여주 계신리 마애불 입상.>

 

#가는 길

충주 창동마애불좌상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간다. 북충주 나들목으로 나가서 82번국도 충주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0분 남짓이면 중원고구려비에 닿는다. 그곳에서 599번 도로를 따라서 중앙탑을 지나 5분 남짓, 탄금대교를 지나기 직전에 왼쪽으로 이정표가 보인다. 사유지여서 문을 지나야 하는데 잠겨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항상 열려 있다. 문으로 들어서서 100m 남짓,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강변에 있다.

여주 계신리 마애불입상은 양수리와 양평 읍내를 지나 천서리로 가야한다. 천서리에서 이천방향, 70번 도로를 따라서 이포초등학교를 지나 계신리 부처울 마을이라는 표지석으로 내려가야 한다. 마을 안길에 표지판이 없으므로 석불암(031-882-9560)을 묻는 것이 좋다.

[불교신문 2298호/ 1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