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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문경 관음리 마애보살반가사유상

 

문경 관음리 마애보살반가사유상

“급한 마음 내려놓고 환희심에 미소 머금어”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세계사에 있는 미륵불 입상.(왼쪽)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에 있는 약사여래좌상.(오른쪽)

 

 

 

 

 

신라시대 처음 만든 길 ‘하늘재’…2000년 세월 흘러

남북 잇는 관문 고개 넘으면 ‘미륵리 부처님’을 만나

 

우리 땅 곳곳에는 산이 많은 만큼 고개도 많다. 눈만 내리면 뉴스에 등장하는 미시령과 진부령 그리고 대관령을 비롯하여 진고개니 비행기재와 같은 익숙한 이름들은 모두 강원도에 있다. 그 외, 이름난 고개들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죽령이나 새재, 이화령, 추풍령과 저수령 그리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잇는 박달재가 있으며 덕유산을 넘어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육백령과 지리산 언저리를 넘어가는 성삼재나 정령치 그리고 여원치 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포장이 되어 아직껏 그 명성을 누리는 것일 뿐 그렇지 못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간 고개 또한 무수히 많다. 소백산맥을 넘는 고치령이나 마구령, 대관령 보다 더 먼저 사람들이 넘어 다닌 선자령과 같은 고개들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아니라면 찾는 이 조차 없는 쓸쓸한 고갯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금 찾아가고 있는 문경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하늘재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하지만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들 어떨까. 오히려 수선스러움이 사라지고 한갓진 정취를 벗 삼아 걸을 수 있을 것이니 그로 위안을 삼으며 길을 나섰다. 충주를 지났지만 그 이름 높은 문경새재는 어디에 있는가. 깜깜한 터널을 지났는가 싶더니 어느새 문경이었다. 갈평리에 다다라 저자거리 가운데에 있는 갈평출장소 마당을 기웃거리자 아담한 오층석탑이 반긴다. 본디 있었던 자리도 아니고 더러 깨진 곳도 있지만 몸돌이 여느 탑의 그것과는 다르게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특이한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전체적인 짜임새 또한 야무져서 쳐다볼수록 절로 미소가 감도는 탑이다.

하늘재로 가는 길은 이곳 갈평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저자거리를 벗어나 골짜기로 접어들자마자 이내 발길을 멈추어야 했으니 부처님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곁에는 탑도 있었지만 어느 때인가 도굴을 당하여 기단부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우견편단의 오른쪽 어깨에 소라마냥 둥글게 말린 의문(衣紋)이 독특한 약사여래 부처님은 몇 년 전만 해도 헛간 같은 건물에 방치되다시피 있었으나 얼마 전 전각을 새로 얻으신 모양이다. 그러나 지방문화재는커녕 문화재자료로조차 지정되지 않아 표지판도 없으니 마을 사람들만 찾을 뿐 타지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생겼다.

비록 상호는 문드러졌고 사각형의 연화대좌 또한 제 것이 아닌 듯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하늘재로 향하는 들머리의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늘재는 계립령(鷄立嶺)이라고도 불리며 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고갯길이다. 신라의 8대 왕인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서기 156년에 개척했으니 얼추 2000여년을 헤아리는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셈이다.

하늘재는 조령(鳥嶺)이 개척되기 전인 고려 때 까지만 하더라도 대원령(大院嶺)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원이란 이 고개를 넘어가면 만나는 충주시 상모면의 미륵리 절터가 있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미륵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 중 대원사라는 명문이 있었으며 절터 옆에는 미륵대원이라는 큰 원(院)이 있었으니 계립령이 대원령으로 불리게 된 것이리라.

이곳 또한 원이 있기는 고개 너머와 마찬가지였다. 갈평에서 2km 남짓한 곳에 관음원(觀音院)이 있었으니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묵어가던 곳이다. 추정컨대 고려의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가 29세 되던 해인 1196년, 상주목사로 있던 자형을 따라 가서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 상주로 갈 때 이 고개를 넘어갔다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는 한열병(寒熱病)에 걸려 3개월을 상주에 머물고 다시 돌아오는 5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90여 편의 시로 남겼는데 그중 미륵원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새재가 개척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분명 이곳 하늘재를 넘었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관음원을 노래한 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유곡역-요성역-화봉원-미륵원-충주로 이어지고 있으니 새재를 넘었으면 지금의 수안보인 안보역을 놔두고 구태여 먼 길을 에돌아 산골인 미륵원에 와서 묵을 까닭이 없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새재는 길이 험하기로 소문난 곳인 만큼 한열병을 앓고 난 그가 넘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관음원을 떠난 다음날은 충주에서 잤는데 고향인 여주가 코앞이어서 그랬는지 “미녀가 애교를 부려도 머무르기 어려웠네(越女笑難留)”라며 여독을 호소하고 있으니 보다 쉬운 하늘재를 넘은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게 이규보를 동행 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발길을 멈추어야 했으니 길 건너 언덕에 서 있는 약사여래입상 때문이었다. 그 또한 전각도 없이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서 계시더니 어느새 전각 속으로 들어 가셨다. 다행이다 싶지만 멀리서 보면 오히려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전각만 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씌워도 좋을 것을 왜 간살까지 만들어 아예 가두어 버리는지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을까. 때로는 멀리서 봐야 하는 것도 있는 법, 이곳에 서 계시던 부처님이 그랬다.

부처님 근처에서 더러 와편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 전각들이 있었던 흔적이려니 싶지만 부처님이 바라보는 쪽은 고갯길 방향이다. 그러니 길 가던 나그네들이 멀리서라도 참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 또한 그랬다. 예전 전각 속에 들어가시기 전,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지만 거개는 멀리서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여 눈인사 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흡족했으며 든든하기만 했다. 높이가 3m에 달하니 길에서도 뚜렷하게 그 모습을 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까이 가서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각을 좁게 지어 놓았으니 못마땅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길에서 보이는 앞 쪽의 간살과 문만 터놓았어도 좋았을 것을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물 한 모금 마실 참쯤 걸으니 오른쪽으로 문막(門幕)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일 동 말 동 서 있다. 이 마을에 관음원이 있었고 관음사가 있었다. 곧 본격적으로 하늘재가 시작되는 곳이며 하늘재가 뚫리고부터 이곳은 관문(關門)과도 같았다고 한다. 사과나무가 지천인 마을 들머리에 어른 볼기짝 만하게 논뙈기 있다. 그 논에서 여든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부처님 계신 곳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괜히 말을 걸어 볼 참으로 “할매요. 여 어데 부처님 있다 카던데, 어데 있는지 아십니꺼”하고 말을 던지니 한껏 웃는 얼굴로 대답이 금방이다.

“조 울로 빨간 지붕보이나, 그 짝 길로 쭈욱 올라가마 오른 핀으로 무덤이 몇 개 있니라. 고 앞에 있는데 한 십분 걸으마 될 끼라.” “사람들 부처님 구경하로 마이 옵니까”하고 다시 말을 건네니 “어데, 우야다가 따문따문 오지 안 온다. 자네는 어데서 왔는데, 말씨가 이짝 말인데…”라는 말에 웃음으로 답하고 걸었다. 500m 남짓이다. 부처님이라고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사실 이곳에 계신 분은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쓴 보살님이다. 그것도 오른 손으로 턱을 괴고 있으니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다. 어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후다닥 달려 가 그 앞에 좌정하고 앉아 그미소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15년이나 되었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잊지 못하는 세월이 말이다. 손이 농부의 손인 양 투박한들 어떨까, 조각이 섬세하지 않으면 또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섬세해지면 그만인 것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는 마치 봄날처럼 따사로웠으니 오랜만에 만난 단금지우에게서 느끼는 정겨움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그 마음으로 반가사유상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었다. “오늘, 비로소 한가하다”라고 말이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어찌 마음이 가라앉는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며 미소가 감도는 환희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인가. 아무리 급한 마음을 들고 찾아와도 그 앞에만 서면 모든 것은 멈추어 지고 말았으니 그 말이 절로 나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이 웃자랄 때에 무턱대고 찾아와도 아무 말 없이 맞아주는 것은 물론 마음까지 다스려 주는가 하면, 엇나가는 마음을 멈추게 까지 해 주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머리 숙여 감사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기댈 곳 없어 방황하던 마음 몇 조각은 제자리를 찾았으며, 잃어버릴 뻔 했던 그 마음 조각들에게서 새 살까지 돋아나왔으니 나에게 이곳은 또 하나의 비장처(秘藏處)인 셈이다. 그러니 그 앞에서 끝없는 한가함을 맛 본 후에는 언제나 바빠지기 마련이다. 그의 미소에게서 비롯된 한가함이 한가함에 그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쓸모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엇나가는 마음 멈추었으니 제자리 찾아가도록 갈고 닦아야 하리라. 마음 갈고 닦는 것에 어찌 한가함이 깃들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미소가 곧 죽비와도 같다. 두어 시간, 환희로움에 젖어 바라 본 그 미소가 모진 죽비라니, 아! 참으로 거룩한 미소가 아닌가. 기록문학가

 

마을 사람 힘 모아 다시 일으켜

■ 문경 관음리 석조보살 반가사유상

 

신라시대에 개척된 하늘재를 지키는 것인가. 반가사유상은 지긋한 눈길로 하늘재를 향해 미소 짓고 계신다.

 

관음원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보일 뿐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문막 마을에 관음사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마을로 들어서서 논이 끝나고 이어지는 과수원 가운데에 탑을 세웠던 기단이 묻혀 있다. 이곳에 있었던 탑이 갈평출장소의 마당에 있는 오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185호)이다. 과수원 전체에서 장대석을 찾을 수 있으며 석조반가사유상은 절터를 지나 300m쯤 더 들어 간 곳에 있다.

반가사유상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350호로 지정되었으며 2m 남짓한 작은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시선은 하늘재를 향해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쪽 다리를 꺾어 왼쪽 무릎에 올려놓았으나 왼쪽 다리의 조각은 분명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살집이 통통한 듯 표현되어 여느 반가사유상들에 비하면 둔중해 보인다. 대좌는 선각으로 처리했고 머리 둘레에 화불이 표현된 것 같지만 그 또한 선명하지 않다.

조성시기 또한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절터에 있었던 탑은 고려 초로 짐작되나 반가사유상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시기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각수법은 떨어지지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가사유상의 대좌와 오른발의 중간 부분이 깨져서 넘어지고 난 후 장질부사가 돌아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시 일으켜 세우니 돌림병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 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3번 국도를 따라가면 새재 터널을 지나 문경온천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동로면 방향으로 901번 도로를 따라가면 갈평리에 다다른다. 용흥초등학교 옆 출장소에 오층 석탑이 있으며 이곳에서 부터는 하늘재와 관음리 이정표가 되어 있다. 약사여래좌상은 하늘재를 향해 가다가 오른쪽에 있으며 이곳에서 채 2km를 가지 않아 관음리석조약사여래입상(지방 문화재자료 제136호)이 오른쪽에 있으며 다시 500m 남짓, 오른쪽에 문막마을 이정표가 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시멘트 포장길로 500m가량 가면 반가사유상이 있다. 큰길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걸어가는 것이 좋다.

하늘재 정상은 반가사유상으로부터 2km가 남짓하며 정상에서 충주의 미륵리 절터는 걸어서 가야하며 30분 남짓이다.

 

[불교신문 2300호/ 2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