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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삼존불과 마애탑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삼존불과 마애탑

천년 비바람에도 미소 간직한 ‘아름다운 부처님’

<사진설명>이 작은 바위에 삼존불과 승상 그리고 마애탑이 베풀어져 있다. 이렇듯 복합적으로 부처님 세계가 조성된 경우는 드물어 주목할 만하다.
몹시 추웠다. 영하 18도, 엊그제 푹했던 날씨 때문에 생겨난 습기는 온통 얼어붙어 풀밭을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한 걸음씩 뗄 때 마다 바삭바삭한 느낌이 전해졌으며 덩달아 소리까지 오묘했으니 발이 시린 것도 잊어버린 채 걷기에 열중했는가하면 쭈그려 앉아 서릿발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오늘,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을 마다않고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걷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먼 산등성이로부터 달구어진 햇살이 부처님에게 비쳐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무수히 이곳을 찾았건만 늘 다른 곳을 먼저 들러서 오는 바람에 그 순간을 단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으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사진설명>국보 제201호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경북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삼존과 마애탑이라는 명호는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 이곳의 부처님은 마땅한 이름 하나도 얻지 못했다. 엄연히 실재함에도 부재의 존재와도 같은 것이다. 그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실재하고 있음에도 뭇 사람들은 그 존재를 쉽사리 알지 못한다. 설사 그 존재를 알았다 손 치더라도 상호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은 이내 돌아서고 만다. 바로 그 곁에 국보 제 201호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따질 것도 없이 국보와 무명의 차이는 별 것 아니다. 엄밀한 미술사의 잣대를 들이대면 모를까, 순례자에게 그것은 한낱 지적(知的) 사치와 같은 것일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들이 부처님을 학문의 대상으로, 또 잘 생기고 못 생김을 가리고, 미술적 양식만을 따지고 가늠하며 바라봤을까.
 
그것은 아니다. 혹여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등급 매기기에 부처님조차 포함시킨 것은 아닌 지 되돌아 봐야 할 일이다. 그것은 결과만을 놓고 따지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과정을 이야기 했을 뿐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 앞에 서서 결과만을 따지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상념에 젖어 고개 들고 바라보니 바위가 발그레 물들기 시작했다. 발아래의 서리들도 윤슬처럼 빛나고 바람도 이제 막 깨어난 듯 햇빛을 싣고 왔다. 그 바람과 함께 바위 아래로 갔지만 얼굴은 에이듯이 시렸고 얼굴로 들이닥친 바람 때문인가.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나 바람은 핑계일 뿐 이곳의 삼존불은 마주 대하면 대할수록 눈물이 난다. 마치 천년이 넘도록 풍장(風葬)이라도 치르고 있는 양, 살집은 가뭇없이 떨어져 나가고 문드러졌으니 그 아니 처연하겠는가.
 
그러나 정작 내가 눈물짓는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니다. 미술사로 따지고들 근거조차 희미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우담바라와 같은 미소를 봤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그 미소를 처음대하고 부터 머리 숙여 경배를 올리며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 이전만 하더라도 나 또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국보 부처님만 부처님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우연히 그 미소를 대하고부터 오히려 국보 부처님에게는 삼배만 올릴 뿐 머무는 것은 이 명호도 없는 삼존불 앞이었다. 그 앞에서 마음의 눈을 크게 뜬 채 샅샅이 우러르면 부처님은 언제나 그 지순한 미소로 맞이하곤 했으니 오늘이라고 다를까.
 
국보 201호로 지정
 
본존인 여래좌상은 감실에 든 채 겨우 눈과 코 그리고 입에 낀 이끼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지만 그 근엄하고 지긋한 눈길을 어찌 감추겠는가. 법의나 수인 그리고 목의 삼도, 가부좌한 다리와 대좌의 조각조차도 분명치 않지만 누군들 바라보면 부처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온갖 풍상을 겪었음에도 얼굴은 눈부시도록 해맑으며 눈과 코 그리고 입은 군더더기 없이 검은 이끼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간결하고도 깊은 선화(禪畵)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감히 그 누가 부처님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세월과 비바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온갖 풍상 겪었지만 相好는 눈부셔…통일신라시대 조성 추측
우협시 본존불 아래 동자상 있어…월출산 마애좌불상과 비슷
 
머리 위에 따로 새긴 불감을 이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우협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루뭉술한 전체적인 느낌만 전달 될 뿐이다. 본존이 홀쭉하며 갸름한 상호를 지닌 반면 우협시는 작달막하며 목이 없는 채 얼굴과 어깨가 붙어 있어 잔뜩 움츠러든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약간 뒤로 기댄 것 같은 자세이지만 얼굴은 그 어떤 표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닳아버렸다. 하지만 새벽 햇살에 보면 가슴께에 이어지는 굴곡이 있어 수인이나 법의가 표현되었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대좌 또한 조각을 알 수는 없지만 결가부좌하고 앉았던 만큼 연화좌이리라.
 
그러나 어이가 없었던 것은 우협시와 본존불 사이 아래쪽으로 새겨진 동자상 혹은 승상 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나의 둔한 눈은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수차례 걸음을 하고 수년이 지난 다음에야 문득 알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산청의 도전리 마애불상군의 가장 아래에 있는 10cm 남짓한 마애불도 그랬으니 내 눈은 더디고 어둡기만 한 것이다. 채 30cm가 되지 않는 승상은 간결하다. 얼굴만 겨우 돋을새김으로 새긴 듯 보이지만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손을 가슴께에 모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본존불처럼 감실을 표현하고 그 안에 새겼다는 것이다. 머리와 상체 부분은 감실 안에 들어 가 있으며 무릎 이하 대좌는 노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동자상인지 아니면 승상이거나 불상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승상이라고 표현 한 것은 이와 같은 양식이 나라 안에 또 한 곳이 있기 때문이다. 국보 제 144호인 월출산마애불좌상에서 그와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의 오른쪽 무릎 옆에 오른손으로 지물(持物)을 든 선재동자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크기는 6m에 달하지만 입상인 동자상은 불과 65cm 밖에 되지 않으니 그 비례가 마치 이곳에 새겨진 그것과 같아 보인다. 더구나 내가 이곳의 조각을 두고 승상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곁에 새겨진 동자상들은 하나같이 입상이기 때문이다.
 
무릎이하 대좌 ‘희미’
 
그러나 이곳의 조각은 무릎 이하의 대좌가 희미하기는 하지만 흔적을 가늠할 수 있으니 좌상인 셈이다. 부처님 곁에 앉아 있는 승상의 조각들은 경주 남산의 부처바위라 불리는 보물 제 201호인 탑곡마애조상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면에 베풀어진 조각들 중 본존불 아래에 차 공양을 올리며 방석에 앉아있는 승상이나 그 왼쪽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든 승상, 그리고 남면의 삼존불 앞 바위에 새겨져 있는 부처바위의 주지스님이라 불리는 승상이 그것이다. 그러니 대개 동자상은 서 있는 셈이고 승상은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좌협시 또한 조각은 문드러져 겨우 좌상인 것을 알아 볼 수 있으며 얼굴은 이끼가 덕지덕지 끼어 있어 본존불에 비해 더욱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대좌가 결가부좌한 무릎의 크기보다 작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협시와 마찬가지로 삼도가 없는 목의 표현이 뚜렷하지 않으며 또한 어깨는 좁고 짧다. 두 손은 아랫배 근처에 모은 듯 보이며 머리 위의 육계와 얼굴의 눈과 코 그리고 입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으며 볼은 통통하다.
 
그러나 왼쪽 뺨에 두껍게 앉은 이끼 때문에 얼굴의 전체적인 느낌을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아래턱의 넓이로 미루어 봐서 후덕한 인상임은 분명하다. 내가 이 앞에만 서면 눈물을 찍어내는 까닭은 바로 이 좌협시에 있다. 그처럼 분간하기조차 쉽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습은 비록 처연하되 고졸한 미소를 품고 있으니 그 아름다운 모습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 그 미소를 대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충만감을 느꼈었다. 여태껏 봐 온 부처님의 미소가 어찌 가벼울 수 있을까. 그러나 이곳 좌협시 부처님의 미소와 같은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대략 이곳의 삼존불 조성시기를 국보 부처님이 새겨진 즈음으로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잡는다고 하더라도 천년은 훌쩍 넘었을 터, 아직껏 그 미소의 끝자락이나마 대할 수 있음을 무엇 다른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눈물 한 방울로 대신 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 저 미소를 두고 어찌 우담바라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에게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삼존불 좌협시의 미소는 우담바라와 같은 것인 셈이다.
 
그 곁에 또 하나의 조각이 있다. 흔치 않은 마애삼층탑이며 단층으로 표현 된 기단부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탑이 삼층인 점 그리고 탑신부의 굵기가 목탑에 비해 가는 점들로 미루어 석탑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마애조상군의 조성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애매하기는 하지만 나라 안에 있는 삼국시대의 목탑들이 삼층인 것은 없었으며 신라나 통일신라를 통 털어 석탑들은 대개 삼층으로 조성됐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정오가 지나고 삼존불에 그늘이 드리워 질 무렵 물끄러미 고개 들어 다시 한 번 좌협시의 미소를 바라보고 돌아서는 길, 제 아무리 칼바람이 옷섶을 헤치고 들어와도 훈훈했으며 절로 미소가 감돌았던 까닭은 그 미소를 내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이리라. 기록문학가
 
 
 
 
■ 마애삼존불과 마애탑 어디에 있나
 
500명 스님 수행했던 지림사에 위치
 
<사진설명>본존불을 확대한 모습.
봉화 북지리 마애삼존불과 마애탑은 물야면 북지리의 지림사(智林寺) 경내에 있다. 같은 경내에 국보 제 201호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며 이곳에서 1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경북대 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 997호로 지정 된 반가사유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문수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인 호거산(虎踞山) 자락에 자리 잡은 지림사는 〈신중동국여지승람〉 봉화현조에 문수산에 있는 것으로 간략하게 나와 있을 뿐 더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경내에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서 그보다 조금 늦은 시대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이 출토 된 것으로 미루어 예전의 사격을 짐작 할 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대사(大寺), 곧 ‘한절’이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500여 명의 스님이 수행에 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밝혀 진 것은 없다.
 
원통전과 요사채 뒤 암벽에 새겨진 마애삼존불과 승상 그리고 마애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주변의 불적을 감안하면 신라시대 말 까지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섣불리 판단 할 수는 없다. 다만 마애삼존불의 고졸한 모습이나 감실을 사용하여 본존불을 모신 점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조성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진설명>마애탑을 확대한 모습.
그러나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풍화가 심해 날이 갈수록 삼존불의 모습이 쇠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인지 무심한 탓에 자칫 귀중한 성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럽기만 하다.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풍기로 진출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 북영주 방면으로 나간다. 가는 길에 부석사를 들러서 가도 되는데 나들목을 나가서 좌회전 해 931번 도로를 따라서 순흥을 거쳐 40분 남짓(24km)이면 부석사에 닿는다. 부석사에서 북지리 마애삼존불까지는 17km 남짓하며 부석면의 사거리에서 931번 도로로 좌회전, 그리고 다시 봉화읍으로 나가는 915번 도로로 우회전해 따라가면 지림사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이정표가 보인다. 절 마당 가까이 주차장이 있다.
 
[불교신문 2302호/ 2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