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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

 

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

천년세월에 깨져버린…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미소

지난해 7월부터 남한강을 따라 걷고 있다. 오대산 서대 염불암 곁의 작은 샘인 우통수로부터 순전히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멈추었을 뿐이지만 어느덧 발길 닿은 곳은 충주이다. 충주는 산길과 물길이 만나 어우러지며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 놓은 곳이다. 고대 삼국이 남한강 물길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덕분에 삼국의 문화가 혼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에서는 흔치 않은 고구려의 유적들을 볼 수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고구려에서 세운 비석으로 알려진 중원 고구려비 뒷산인 장미산은 백제가 축성을 했지만 고구려가 보수를 했으며 최후에는 신라가 차지했으니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사진설명: 미륵반가사유상과 다섯 분의 보살상. 서로 중첩되어 원근감이 나타나며 이는 회화적 표현양식이다.>

그것은 불교문화에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중앙탑이라고 불리는, 신라의 탑 중 가장 높은 탑인 중원 탑평리 7층 석탑과 같은 경우는 주위에 절집이 발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우뚝 솟았으니 궁금증이 더한다. 더구나 탑 주위에서 발굴되는 와편들은 모두 고구려 계열의 것들이어서 의문은 증폭된다. 추정컨대 고구려의 와편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고구려의 영토이었을 당시 치소(治所)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라가 영토 다툼에서 승리를 하고 난 후, 물길을 확보한 기념으로 물길과 맞닿았으며 고구려의 치소가 있었던 이곳에 거대한 탑을 세운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7층탑은 평지에 방형의 단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탑을 세운 모습이다. 그것은 신라의 탑 중 가장 높은 것이며 규모보다는 높이를 더한 것이니 상징적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한 까닭은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조성 시기를 통일신라 초에서 원성왕 재위(785~798)년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찾아가야 하는 부처님도 계신다.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그것이다.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 중턱의 작은 암벽에 베풀어진 불보살은 모두 9구나 된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애불상군이어서 불쑥 찾아와 마음을 쉬는 곳이기도 하다.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둔곡(遁谷)과도 같았다. 찾는 이 귀하고 혹 찾더라도 머무는 이 드물었으니 나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여래좌상과 공양상. 

더구나 여여하게 자리를 지키는 불보살이 아홉 분이나 계시니 그 아니 든든했겠는가. 그들에게 기대어 그친 생각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일군 마음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정(靜)을 동(動)의 반대개념으로 둔다면 정양(靜養)이란 고요할 때 기른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사상가인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9)는 〈기측체의〉 ‘추측록’에서 말한다. “정(靜)할 때에는 비록 소리가 없으나 듣는 정신은 그대로요, 형체가 없으나 보는 정신은 그대로인 것이니, 기틀을 잊어 혼매하지 말며 또한 생각을 일으켜 소란하지 말아서, 먼지 없는 거울과 티끌 없는 물같이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곳에 앉아 숱한 시간을 둔곡에 찾아 든 은자처럼 보냈었다. 늘 따라붙는 그림자가 성가시기도 했지만 모든 행동을 나를 따라 할 지언 정 오로지 말을 하는 것만은 따라하지 않는 그를 보며 부끄럽기도 했었다. 부처님이라고 달랐을까. 마치 은자처럼 숲 그늘로 스스로를 가린 채 대여섯 평의 마당만을 남기고는 깎아지른 절벽만을 남겨 놓았다. 그는 이토록 후미진 곳에서 천년이 넘도록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 놓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어찌 그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웅숭깊은 말을 헤아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고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소리 없는 말은 귓전에 더욱 큰 울림으로 들리기만 했다. 이곳을 찾을 때 마다 그 깊은 울림에 마음을 떨면서 서성거렸으니 그만큼 나를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감사한 불보살들의 생김생김 또한 글머리에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삼국의 미술양식들이 혼재되어 있어 더욱 잦은걸음을 나누었던 것이지 싶다.

고구려의 감성이 느껴지는 여래좌상. 

더구나 이만한 불보살이 베풀어져 있음에도 남아있는 기록이라고는 조선후기에 이병연이 쓴 〈조선환여승람〉 한 곳 밖에 없다. 그 책에 “가금면 봉황리에 높이 1장의 미륵불이 있다(彌勒佛 在可金面 鳳凰里高一丈)”고 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1장이란 10척(尺)을 말하는 것이니 대략 따져 3m남짓 한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불상들 중 3m에 달하는 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독존으로 새겨진 여래좌상 정도이다. 바위 전체의 높이는 3m 가량 되지만 실제 조각된 불상의 높이는 2m남짓하다.

불상의 대좌는 없으며 무릎은 상체에 비해 너무 넓어 크게 과장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시무외인이며 왼손은 여원인으로 삼국시대에 유행한 수인이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마멸이 심해 의문(衣紋)의 확인은 쉽지 않으며 어깨 또한 무릎처럼 넓게 표현되어 있다. 목의 삼도는 선명하며 상호는 방형으로 투박한 느낌이다. 머리의 나발은 불거진 듯 뚜렷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사각형의 투박한 상호와 부어 있는 것 같은 눈두덩이다. 그것은 화불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체에 비해 과장되어 있는 두광 안에 모셔진 다섯 구의 화불 중 맨 아래의 화불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데 눈이 부어 있어 불거져 보인다. 이는 불상의 조성 시기가 고대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식은 주로 북제(北齊)와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것이며 눈이 부어있는 것 같은 상호는 보물 제 198호인 경주 남산의 불곡석불좌상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부처골 감실부처라 부르는 그 불상의 조성 시기 또한 애매하지만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로 잡고 있으니 이곳 봉황리 마애여래좌상 또한 그 무렵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에서 부드러운 신라의 향기를 맡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투박하며 당당하고 거칠기까지 한 고구려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불곡석불좌상이나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 201호인 경북 봉화 북지리마애여래좌상이 투박하여 세련된 미감을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럽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머무는 이 드문 그곳에 아홉 불보살이

‘독존 여래좌상’ 당당하고 거친 고구려 향기

미륵반가사유상 등 독특한 회화적 구성 눈길

독존으로 계시는 여래좌상에서 20m남짓 떨어진 곳에 다시 작은 암벽이 있는데 이곳에는 모두 8구의 불보살이 베풀어져 있다. 지금은 그나마 철제 계단으로 다리처럼 만들어 놓았기에 망정이지 전에는 이 곁을 지나면서도 이곳에 불보살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발밑이 워낙 아찔하니 바위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기 급급할 뿐 쳐다볼 엄두는 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보고나면 어찌 잊으랴. 비록 깨져버린 상호이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계시니 처연한 아름다움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곳의 불보살들은 크게는 한 곳에 새겨졌지만 마치 두 군데에 나뉘어 새긴 것 같다. 왼쪽에는 시무외여원인을 한 여래좌상과 그를 향해 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다섯 분의 보살들이 에워싸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것 같은 여래좌상은 무릎 아래가 깨졌지만 법의는 통견이며 U자형으로 가슴 아래에 모이고 있다. 여래상을 향하고 있는 공양상은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은 꿇었다. 왼손은 보주이거나 혹은 찻잔을 들고 팔꿈치는 왼쪽 무릎에 올려놓았다. 허리춤에 둥근 고리의 장식이 있으며 오른쪽 발 아래로 한 가닥 천의 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몸의 일부분이 깨지긴 했지만 이만하면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옆의 바위에 새겨진 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보살군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륵반가사유상의 왼쪽보살상이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는 조각되어 있지만 그 아래는 없다. 또 오른쪽 치마를 입은 보살상 또한 그렇다. 미륵반가사유상의 왼쪽 팔에 가슴 부분이 가린 것이다. 그것은 왼쪽에 있는 세분의 보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두 조금씩 겹치며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위 면이 좁은가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더욱 궁금증이 더한다. 이는 불화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인 구성이며 나라 안의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또한 이들이 디디고 선 역삼각형의 대좌들 또한 북방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비록 얼굴은 깨졌지만 삼국시대후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턱을 괸 오른손이나 발목을 잡은 왼손의 손가락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마애 미륵반가사유상은 드물기도 할뿐더러 이렇듯 많은 보살들에게 둘러싸인 곳은 또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황홀하지만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백제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보살상들이 머금고 있는 미소이다.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눈과 코 그리고 입을 찾고 나면 그들이 머금은 여린 미소가 보이리라. 그 미소 만나기 전에 돌아오지 말 것이며 못 보았으면 다시 가야하리라. 그 아름다운 모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시기적으로는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할 무렵에 조성되었다고 짐작하지만 그들이 내뿜고 있는 향기는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 국의 특징들이 불거지지도 않았으니 더욱 묘한 것이다. 그 매력 때문에 이들에게로 향하는 나의 발길을 아직껏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문학가

■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남한강 물길이 젖줄처럼 흐르는 충주는 예로부터 중원(中原), 예성(城) 그리고 국원(國原)이라고 불렸으며 정토사지(淨土寺址)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에 따르면 중주(中州)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대 삼국들이 남한강 물길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장미산 아래에 있는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한 기념으로 세운 척경비(拓境碑)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삼국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접전이 이루어졌음인지 이곳은 나라 안 어느 곳보다 삼국의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삼국문화 섞인 복합성 특징

2004년 보물 1401호로 지정

가금면 인근의 노은면에서 출토된 ‘건흥오년명금동광배(建興五年銘金銅光背)’도 처음에는 백제의 것이라고 추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백제는 연호 대신 간지를 사용했던 것으로 미루어 6세기 후반인 596년에 주조된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혼재된 문화 때문에 충주 지역의 고대 불적 중 아직껏 뚜렷한 조성 시기가 밝혀진 것은 드물다. 2004년 보물 1401호로 지정된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도 그 중 하나이다. 다만 삼국시대에 조성되었다고 볼 뿐 정확하게 어느 나라에서 새긴 것인지 그 미술사적 양식이 모호하다.

보살상들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고구려의 양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여래좌상의 당당함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라고 해도 무관하지 싶다. 이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간 안골에 절터가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가뭇하지만 충주박물관 마당에 이곳에서 수습한 탑재가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탑재는 고려시대의 것이어서 마애불상군과의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감곡 나들목으로 나가서 목계방향으로 38번 국도를 10분 쯤 달리면 된다. 도로상에 봉황자연휴양림이라는 이정표가 있는데 그곳으로 빠져나가 마을길을 2km 정도 들어가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 끝에서 둑길로 우회전해 300m남짓이면 주차장에 닿으며 그곳에서 마애불상군이 빤히 보인다.

[불교신문 2296호/ 1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