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도전리마애불상군

 

도전리마애불상군

동짓날 매화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레임으로 만나는 도전리부처님

전국 방방곳곳에 많은 불교유물이 산재해 있다. 1700여년의 세월동안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의 정신문화다. 이지누씨의 ‘골골샅샅 찾아간 부처님’은 그 가운데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불교유물을 찾아가는 순례기다. 이 기획을 통해 성보의 가치를 돌아보고, 문화유산의 다양성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주〉

동짓날이면 해마다 그리던 소한도(消寒圖)를 올해는 그리지 않았다. 대신 뜰 앞에 긴 가지를 드리운 수양버들이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진중하게 기다린다는 말인 정전수양진중대춘풍(庭前垂楊珍重待春風)이라는 글씨를 쓰기로 했지만 한꺼번에 대뜸 쓰지는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쓰기는 썼지만 컴퓨터로 글씨의 외곽선만 따 놓았을 뿐 그 안은 하얗게 비워 놓았다. 그리고는 하루에 한 획씩 그 속을 먹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오늘이 동짓날로부터 열여섯 새가 되는 날이니 이제 겨우 정(庭)자를 먹으로 채웠고 전(前)자는 글씨꼴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글자들은 모두 아홉 자이며 전체 획수가 81획이다. 庭이 열, 垂가 여덟 획인 것을 빼면 나머지는 아홉 획씩이며 그 획이 모두 채워지는 날이면 어느덧 꽃피는 봄인 3월10일 경이 된다.

 

나라 안에서 가장 작은 마애불이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의 가운데 맨 아래쯤에 있다.

 

곧 매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이 뜨거운 마음을 어찌 달랠거나. 길 떠나는 수밖에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다시 행장을 챙겼다. 눈보라가 몰아칠 지언 정 봄은 오고 있을 것이기에 그를 찾아 나서는 길에 경남 산청은 빠질 수 없는 곳이다. 북종선의 탯자리인 단속사터를 비롯해 지리산과 덕유산 기슭에 뭇 절터들이 흩어져 있으며 가까이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합천의 영암사터까지 있으니 나만의 성지 순례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단속사터에는 정당매가, 남명 조식의 서재인 산천재 뜰에는 남명매가 움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터이니 언제나 이맘때면 걸음이 잦아지는 곳이다.

휘둘러 절터를 더듬고 아직 맨 가지로 찬바람을 견디고 있는 매화나무를 만나고 나면 나는 언제나 생비량면 도전리의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벼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동살이 비쳐드는 새벽부터 노루꼬리 만큼 짧은 동짓달의 해가 서산에 걸릴 때 까지 종일 머무르곤 했던 것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폭은 겨우 1m 남짓, 너비는 채 20m가 넘지 않으며, 발아래는 수직 절벽이고 머리 위로는 곧 떨어질 것 만 같은 바위들이 박혀있는 곳으로 찾아 든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아예 꼼짝도 하지 않을 심산으로 물 몇 모금과 주먹밥까지 챙겨왔으니 스스로를 묶어 버린 것이나 다르지 않다.

진표율사가 망신참법으로 법을 구했다는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方)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나는 몸을 제대로 운신하기도 쉽지 않은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했으며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를 옭죄고 있던 것들을 한 순간에 풀어버린 해박대(解縛臺)와도 같았다. 풀린다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마치 바늘 끝으로 찔린 것 같았지만 오히려 둔기로 얻어맞은 것 보다 더 크게 열렸으니 실오(實悟)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부터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무리 익숙한 것이라도 다시 되새겨서 찬찬히 보게 되었고 이미 읽었던 글이라도 또 다시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눈길 나누는 것 마다하지 않았으며 게으르고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깊고 깊게 성찰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큰 선물을 또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싶은 것이다.

5년 전, 이른 봄날이었다. 그날도 오늘과 같이 마음 급한 봄맞이 순례 길에 나섰고 사흘 째 되는 날은 부처님 곁에 머물렀었다. 그 해는 이곳에 마애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다니기 시작한지 12년이 되던 해였다. 나라 안 어느 곳에도 이토록 좁은 공간에 29구나 되는 부처님을 마애로 새겨 놓은 곳이 없으니 마음에 차 올랐으며 더구나 그 부처님들이 하나같이 상처 입은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욱 걸음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지금까지는 그 많은 부처님들 중 유독 한 분을 뵈러 간다. 많으면 일 년에 서너 차례 아니면 한 차례일지라도 걸음을 그치지 않는 까닭은 그 분이 바로 나를 바늘로 찔렀기 때문이다.

그 부처님은 이 좁은 공간을 나에게 무한의 넓이로 재생시켰으며 세상과 자연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하나 더 준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더 섬세해 질 수 있었으며 더욱 침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십년이 넘도록 걸음을 나누며 서성거리고 나서야 겨우 뵐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전리 마애불상의 특징은 넓지 않은 바위 면에 29구의 부처님들을 다닥다닥 새겨 놓은 것이다. 그것도 편편한 면이 아니다. 바위는 위가 튀어나오고 아래는 들어 간 경사진 면이어서 위에 새겨진 부처님들은 그나마 제대로 뵐 수 있지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쭈그리고 앉기도 쉽지 않은 탓에 눈여겨보기가 만만치 않다. 그분은 그 중 가장 아래쪽에 계신다. 더구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로는 나라 안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부처님이니 더더군다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서 가장 작은 마애불상군

                                      통일신라말기 조성된 듯…

그 때문에 늘 익숙하게 다닌 곳이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여여히 계셨던 부처님을 그제야 뵙게 되었으니 나의 회오는 크고도 무거웠다. 그것은 겉만 보고 제대로 속을 짚어 보지 못한 것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곁에 두고 읽는 책인 〈죽창수필(竹窓隨筆)〉에 세상 모든 것은 마음으로 얻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저 귀와 눈으로만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싶어 그 얄팍한 오만함이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했던 것이다. 옷이 더러워지면 어떨까. 손이 시리고 무릎이 저려온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부처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나를 되돌아 봐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제대로 바라보기 조차 힘들어 아예 그 자리에 드러눕기는 또 몇 번 이었던가. 비록 나 자신을 향한 참회였지만 부처님 계시지 않았으면 겪지 못했을 일이니 절로 몸이 숙여졌던 것이다.

두 손을 선정인으로 모으고 앉아 계신 부처님은 높이가 겨우 10cm남짓하며 폭 또한 채 6cm가 되지 않는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훼손당한 눈은 또렷하지만 입 모양은 잇는 듯 만 듯 희미하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부처님들은 모두 동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은 부처님 또한 같은 시기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비록 대좌는 없지만 이곳에 새겨진 여느 부처님들과 같이 돋을새김을 한 것이 그렇고 유난히 많은 선정인을 하고 있으며 입상이 아니라 좌상이기 때문이다. 크기 때문인지 세부적인 표현은 곁에 계신 부처님들보다는 간략하지만 상호와 몸의 구분이 확연하며 가슴께에 U자형으로 모인 법의의 표현 그리고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결가부좌한 다리의 모습은 뚜렷하다.

29구의 부처님들 중 수인으로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님이 한분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조성시기가 통일신라시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싶다. 또한 통일신라시대가 지녔던 세련미나 탄력성은 보이지 않지만 앉음새가 단정하며 법의의 주름들은 촘촘히 밀집되어 있다. 더구나 바위 전체의 부처님을 선새김이 아닌 돋을새김으로 조성했다는 것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들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잘 부서지며 떨어지는 사암류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화강암에 새긴 것들 보다는 세부 묘사나 양감이 뒤처지지만 불상 하나하나가 지닌 전체적인 균형미는 안정된 편이다.

조각 솜씨를 뜯어보면 여러 사람이 따로 새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더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부처님 곁에 제각각 ‘○ ○ ○先生’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그 글씨 또한 여러 사람의 글씨라고 보기는 힘들며 한 사람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곧 누군가에 의해 집중적인 관리를 받았던 흔적인 것이다.

부처님의 크기는 30cm 내외이며 ‘○○○先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곁에 개인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자리를 잡아가던 혼란기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미감을 채 떨어내지 못했지만 생각은 이미 분방하여 부처님을 개인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미술사를 논하고 미학을 풀어 놓는 일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나는 그 작용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며 변화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도전리의 부처님들은 조각이 빼어나지도 않을 뿐 더러 그 마저도 하나같이 훼손 되었기에 미술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찮은 조각이라고 치부 되겠지만 나에게는 석굴암 본존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서로 견준다는 것조차 마뜩치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불자들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팽배해 있는 국보나 보물 그리고 영험있다는 부처님에게만 경배가 집중되는 풍조는 한번 쯤 되짚어 봐야 할 일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던가. 무엇이 다른 무엇에 우선 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나는 들은 적이 없고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들은 부처님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 차이에 따라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매화 필 즈음 다시 찾겠다는 인사 올리고 〈죽창수필〉의 글 한 줄을 흥얼거리며 그만 일어섰다. “귀로 듣고 얻은 것은 눈으로 직접 보고 얻은 것 보다 넓지 못하고, 눈으로 얻은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얻은 것 보다 넓지 못하다 … 눈으로서 마음으로 얻은 것을 대신 하는 것은 못난 짓이요, 귀로서 눈으로 얻은 것을 대신하는 것은 더욱 못난 짓이다.” 기록문학가

 

●  도전리 마애불상군

조선시대 유생의 고의적 훼손 추정

29구의 불상 유형문화재로 지정

경상남도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에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마애불이 있는 곳을 ‘부처덤’, 도전리는 ‘도밭골’로 부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09호로 지정되었으며 바위 면에 모두 29구의 부처님을 새겨 놓았다. 더러 깨져 나간 채 대좌만 남거나 불두는 간 곳 없고 몸만 남은 것들도 있다. 더구나 성하게 남아 있는 부처님들조차도 모두 눈을 파냈는데 이는 민간신앙의 속설에 따라 행해졌다가 보다는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이지 싶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의 부처님들은 하나같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속설에 따라 민간에서 부처님의 코를 갈아 먹기는 했지만 눈을 파내거나 아예 상호 전체에 둥근 구멍을 움푹하게 판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산청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안동의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은 경상 좌도를 그리고 산청의 남명(南冥) 조식(1501~1572)은 경상 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다. 남명이 머물렀던 산천재에는 후학들이 줄을 이었고 산청 군청 뒤의 웅석봉 기슭에 있던 지곡사(智谷寺)에는 그와 함께 글을 읽던 유생들의 출입이 잦았던 곳이다.

남명 또한 지리산 유람을 떠나거나 유정산인(惟政山人) 사명을 만나러 단속사로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이 단속사가 바로 남명의 문인(門人)인 부사(浮査) 성여신(1512~1571)에 의해 불탔다. 1568년 마침 그가 단속사 곁을 지날 때 절에서는 책을 찍고 있었는데 ‘중이 염불만 하면 되지 무슨 책이냐’며 목판을 불사르고 사천왕을 부수었으며 경판을 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불은 절집까지 번졌으며 그때 불탄 경판이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삼가귀감〉(三家龜鑑)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 속에 부처님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무사할 리 없었을 것이다.

가는 길은 대전 - 통영 간 고속도로의 단성 나들목으로 나가 좌회전, 단성교를 건너 100m 남짓가다가 원지 삼거리에서 20번 도로로 고령 방향으로 향하면 된다. 단성 나들목에서 15분가량 걸린다. 단성 나들목에서 우회전해 남사마을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단속사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지곡사는 산청읍내에서 웅석봉군립공원 이정표를 따라 가면 된다.

이지누/ 기록문학가

[불교신문 2292호/ 1월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