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개령암터 마애불상

 

개령암터 마애불상

지리산 정녕치서 고요를 여는 부처님

 

개령암터 마애불상군의 주존불이며 입상이다. 양 손을 소매 자락에 넣은 수인이 독특하며 사진 오른쪽 부분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라는 명문이 있어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 개령암터 마애불상군

개령암터 마애불상군은 지리산의 정령치와 고리봉을 잇는 능선 상에 있으며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되었다. 개령암은 유생들이 남긴 수많은 〈지리산유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남 구례의 천은사에 전하는 필사본인 〈호좌남원부(湖左南原府)지리산감로사(甘露寺)사적〉에서 도선이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애불상군 앞에 있었던 암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보물로 지정되던 1992년에 개령암터 마애불상군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마애불은 모두 12구이며 만약 개령암이 도선국사가 세운 것이 확실하다면 전남 화순의 운주사 불상들과 연결하여 조성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곳의 주존불이라 할 수 있는 높이 4m에 이르는 입상은 소매 자락 안에 양손을 끼고 있는 수인을 하고 있으니 이는 운주사의 불상들에서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의 표현 또한 운주사의 마애불과도 닮았으며 월출산 용암사터 마애불좌상이나 남원의 용담사터 석불입상들과 많이 닮아 있어 조성 시기를 고려시대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불상의 조각 수법이나 표현 양식이 모두 일정하여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존불의 왼쪽 어깨 근처에 새겨진 명문이 ‘세전명월지불(世田明月智佛)’이라고 되어 있으니 비로자나불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의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하고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은 지권인을 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 이토록 작은 규모의 바위에 12구의 부처님을 한꺼번에 조성한 예는 없으며 토속미가 물씬 풍기는 파격미는 운주사의 불상을 능가하는 것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구의 부처님을 모두 보려면 나뭇잎이 자라지 않는 계절을 택하는 것이 좋다. 시간 또한 해 뜰 무렵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는 머물러야 찬란하게 빛나는 부처님을 대할 수 있다.

응달진 곳에는 흰 눈이 두툼하게 쌓였고 먼 산은 스무 살 시절 언뜻 봤던 아버지의 머리와도 같았다. 거뭇하여 앙상한 나무와 바닥에 깔린 눈이 어우러지며 내놓는 정경이 50줄에 들어서면서 부터 이고 다니시는 백발 같아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머리가 일찍 그렇게 된 까닭이 100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면 50가지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금 가고 있는 지리산을 가겠다며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집을 나왔을 때였지 싶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하루를 집에 머물렀을까, 배낭을 꾸린 12명의 까까머리들은 어느새 화엄사를 에돌아 노고단으로 오르고 있었다. 그 나이에 바위인들 지고 오르지 못했을까. 등에는 키보다 큰 배낭을 둘러메고 능선을 종주하여 유평리 가랑잎 초등학교 마당에 내려서기까지 5일 남짓한 시간이 걸렸었다. 그것이 지리산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헤아리지 못할 만큼 숱하게 걸음을 나눴지만 정령치(鄭嶺峙) 마루에 계신 개령암터(開嶺庵址) 마애불상군의 부처님을 만난 것은 불과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당시 전국을 떠돌며 한 마을에 붙박이로 사는 토박이들을 만나 그이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채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1994년 늦가을부터는 지리산 일대를 누비고 다녔으며 어느 날, 정령치 아래 마을인 운봉면 고기리에 사는 이승우 할아버지를 만났다. 토방과도 같은 방에 앉아 그이가 산에서 살아 온 70년 인생을 낱낱이 채록하고 있을 때였다. 산전벌이며 사냥을 하며 살아 온 탓인지 지리산 언저리마다 그이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집 바로 뒤에 있는 연화폭포 옆으로 난 길이 소금을 지고 달궁으로 넘어 다녔던 길이며 정령치 마루로 통한다는 것도 그이를 통해서 알았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야기 끝에 늘어질 무렵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이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해발 1,172미터 높이의 정령치 마루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이 말에 따르면 한 분도 아니고 떼를 지어 있다고 했지만 내처 달려가지는 못했다. 이태나 지났을까. 문득 그때 일이 생각 나 냉큼 정령치로 올랐었다. 그러나 부처님을 찾기란 숲에 떨어진 바늘 찾기였다. 두어 차례 헛걸음을 하고 난 다음 이승우 어른을 모시고 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그이는 부처님을 두고 처음에는 장군(將軍)이라고 했다. 정령치는 마한(馬韓)의 어느 왕조에 속해 있던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이 성을 쌓고 머물렀던 곳이었으니 아마도 장군의 얼굴을 새겨 놓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처음 대면한 부처님의 기개는 대단했다. 크기도 그렇지만 상호에서 풍기는 인상이 여느 부처님과는 달라 보였으니 산중의 사람들이 장군으로 섬길 만도 하다 싶었다.

지리산 일대에 사람의 성씨가 들어가는 고개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정령치요, 다른 하나는 황령(黃嶺)이다.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이 쓴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만복대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다시 그 남쪽에 우번대(牛臺)가 있는데 이는 신라의 고승인 우번선사의 도량이라고 하니 지금의 우번암을 일컫는 것이며, 만복대의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황령암(黃嶺庵)으로도 부른다고 했으니 서산대사가 쓴 〈황령암기〉가 남아있다. 기문에 따르면 한나라 소제(昭帝) 3년인 BC 85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개 마루에 성을 쌓을 때 황 장군과 정 장군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고개 이름을 각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고 한다.

더구나 12구나 되는 부처님 중 유독 두 분만을 장군의 기개를 가진 듯 크게 새겨 놓았으니 산중 사람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승우 어른은 큰 부처님들은 백호와 삼도가 뚜렷하여 구분되지만 다른 부처님들은 대부분 그것마저 잘 보이지 않으니 두 분을 보좌하는 신하들 쯤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백호는 장군이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어찌 그것을 탓하고 나무라겠는가. 다만 성스럽게 여겨 훼손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이는 때로 산으로 일을 나갈 때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앞에 움막을 지어 놓고 다니기도 했으며 짐승을 잡아도 바위 앞에서는 피를 흘리는 일을 삼갔다고 했다. 지나는 길에라도 주위가 어지러우면 말끔하게 치워 놓고 떠나곤 했는데 비단 자신 뿐 아니라 산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 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이 마애불상군의 매력에 흠씬 젖어야 했다. 여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호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아무리 칼바람이 기세등등하게 몰아치더라도 이곳만은 아늑했기 때문이다. 눈 덮인 지리산의 주능선을 한 눈에 바라보며 고요하게 선정에 들 수 있는 곳이 몇 곳이나 되겠는가. 바람에 서로 부딪히는 나무들을 간당(看堂)틀로 삼아 한 번 부처님 앞에 들고 나면 다시 나갈 때 까지 묵언默言은 물론이거니와 입을 닫으면 닫을수록 명징하게 드러나는 자신을 맞대면하기에 이만 한 곳이 또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 주굉스님(1535~1615)이 말했던가. 세간의 술이나 식초 따위들은 갈무리 해 둔 지 오래 될수록 맛이 좋은 법이라고 말이다. 그 까닭은 단단히 봉하여 깊이 넣어 두어 다른 기운이 스며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옛 선사의 말을 전한다. “20년 동안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후에 어찌 부처를 이루지 못할 것이냐”고 말이다. 그 말을 전하며 주굉 스님이 한마디 거든다. “아름답다, 이 말씀이여!”

외롭고 높고 그리고 쓸쓸한 정령치 마루의 부처님들 앞에 스무 번 쯤 머물고 대여섯 밤을 자고 난 후 나는 주굉스님의 마지막 말에 동의 한다. 어느 날부터 나는 이곳에 부처님을 뵈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멈추러 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녕 몰랐다. 처음부터 대뜸 말을 멈추면 되리라 생각했을 뿐 말을 멈추려면 생각부터 그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말은 멈추었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말할 상대가 없는 것일 뿐 나 스스로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말은 내 속에서 풍선처럼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웃자란 말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날부터 마치 종기처럼 나의 겉에 흉측한 모습으로 돋아났으니 그 무슨 꼴불견이었을까.

그렇게 진세(塵世)를 떠돌다 다시 이곳으로 향하기를 예닐곱 차례, 그때야 깨달았다. 말을 그친다는 것은 곧 남을 향한 것을 거둘 뿐 나를 향한 것은 더욱 넓고 깊게 펼쳐야 하며, 내 속에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삭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진리조차도 고요하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깊이 참구하여 급히 깨달으라고 했거늘 스스로를 깊이 참구하기에 고요함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고요할 때에는 고요함도 모르고 또한 고요하지 않음도 모르는 법이다. 그러던 것이 움직임에 다다르고 나면 비로소 조금 전의 고요함을 아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진세에 머물지 않는다면 이 고요함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 아! 나에게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고요는 참으로 넓고 깊은 선물이다.

간혹 구슬픈 산비둘기 소리가 귓전에 다가들다가 멈추면 오직 햇살과 바람소리만이 부처님 말씀인양 나를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이곳, 그렇다고 줄곧 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른 새벽부터 이곳으로 깃드는 까닭중 하나는 열두 분 부처님 모두 햇빛에 빛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니까 말이다. 시절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듯이 이곳의 부처님들 또한 그렇다. 알맞은 시간이 아니면 제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종일 머무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비록 칼바람이지만 웅숭깊게 불어대는 지리산 바람과 벗하며 바위에 비춰드는 햇빛을 쫓아 부지런히 마음을 움직이면서 말이다. 그 마음이 가 닿지 않으면 부처님은 바로 곁에 계셔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은 친절하게 큰 바위의 어느 곳에 부처님이 계신지 그림으로 그린 표지판을 세워 두었지만 그것이 없던 시절, 부처님을 찾기란 숨은그림찾기와도 같았다. 큰 부처님들은 그렇다 치지만 작은 부처님들은 햇빛이 들면 나타났다간 그늘이 지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으며 지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안내판만 믿고 그곳을 바라봐도 막연하여 눈길을 돌리기 일쑤니까 말이다. 곧 지순한 마음으로 진정 성실하게 대하지 않으면 세상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주는 것과도 같다.

깨달음을 구하고 부처님을 만나는데 무슨 마음들이 그리 급할까. 정존(靜存)과 동찰(動察), 곧 고요할 때에 그 흐름을 헤아려 마음속에 깊이 젖어 들게 하고 또한 움직임이 있을 때 그 흐름을 잘 헤아려 그 일에 맞도록 애쓰는 마음으로 만나는 부처님이야 말로 진정 내 안의 불성을 찾는 것이지 싶다. 반야봉 너머로 해가 기울자 더욱 거세진 바람이 빈 나무를 흔들며 방선(放禪)을 알리는 듯 했다. 그 바람에 날려버리고 싶은 것 한두 가지 이겠는가마는 오늘만큼이라도 그것을 내 안에서 삭히기로 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록문학가

가는 길

전북 남원에서 운봉을 거치거나 아니면 뱀사골을 거쳐 정령치로 오르면 된다. 정령치 휴게소에 자동차를 세우고 능선 길로 20분이면 너끈하게 닿을 수 있으며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놓칠 염려는 없다.

[불교신문 2294호/ 1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