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9> 강서성 청원산 정거사

육조혜능 선법 이은 청원행사선사 28년간 홍법

청원행사 선사의 행화가 깃들어 있는 정거사 대웅보전으로 사방에 물길이 나 있다.

714년 행사(行思)선사는 육조 혜능선사의 배려로 광동 소관 조계산 남화사로부터 청원산(靑原山)으로 옮겨와 불도량을 세웠다. 선사는 이곳에서 혜능선사가 제창한 돈오(頓悟)의 선법을 선양해 세상에 알려져 청원 행사(靑原 行思)선사로 칭해졌다. 한때 청원산은 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명성이 강남불교 성지로 남방선불교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 문하에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등 세 종파가 개창되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선종의 ‘청원계’로 칭해졌다.

사원의 역사
청원산에는 오래전부터 사찰이 많이 있었지만, 정거사(淨居寺)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정거사는 당 개원 신룡 원년(705) 아란야(阿蘭若)로 시작되었고, 이후 천보 10년 신묘년에 정식으로 건립됐으며, 회창법난 시기에 폐쇄되었다가 대중 5년 재건되었다. 전성기에는 사찰 내에 건축물이 47개소에 이르렀다. 당 희종은 ‘안은사(安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였고, 송 숭녕 3년(1104)에 사원이 건립된 지 399년에 이르러 휘종은 ‘정거사’ 편액을 하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사선사는 청원산 정거사에서 28년간 홍법하였다. 선사는 혜능선사가 제창한 남종선의 홍법을 위하여 필생의 정력을 바쳤다. 달마조사의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 가운데 ‘조동, 운문, 법안’의 삼엽(三葉), 즉 남종선의 세 종파가 개창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유불도 삼교를 모두 섭수하여 청원산을 ‘형행쌍수(荊杏雙修), 삼교통종(三敎統宗)’으로 칭해지는 문화명산을 이루게 하였다.

청원행사 선사 탑.

정거사는 1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본, 동남아 등 각 나라에까지 선풍(禪風)이 알려져 행사선사 이후에도 명승들이 주석하였다. 당대 감진화상이 일본에 돌아가는 길에 길주를 지나 청원산에 머물며 참선한 적이 있다. 청원유신, 본적진원, 전우관형, 미엄행수, 소봉대연 등의 고승들도 청원에서 주석하였다. 역대 문인 학사들도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예불하고, 시를 지어 진귀한 묵적들을 남겼는데, <청원산지략(靑原山志略)>에 수록된 것만 해도 500편이 넘는다.

당조 대서예가 안진경이 쓴 ‘조관(祖關)’은 석비에 새겨져 산문에서 볼 수 있다. 산문 벽 위에 쓰인 ‘청원산(原山)’ 3자는 문천상 친필이다. 명대 양명학을 창시한 왕양명은 청원산을 그리워하며 정거사를 위해 “조계종파(曹溪宗派)”라는 비문을 썼다. 송대 황정견, 양만리, 명대의 사진(謝縉)과 청대 건륭제 친필도 있다. 1930년 10만 명의 농공(農工)들이 길안을 점령한 후 모택동, 주덕, 팽덕회 등도 이곳에 머물렀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정거사는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 원대 말기에 전란으로 파괴되었고, 명대 홍무 9년(1376)에 사원을 복원하여 총림(叢林)을 회복하였다. 가정 연간(1522~1566)에 신도들이 강학사(講學寺) 옆에 회관을 지었다. 만력 연간(1573~1620) 말기에 회관을 산의 남쪽으로 옮겼다. 청조 순치 강희 연간에 미암, 소봉, 약지 등이 주지로 주석하였는데, 사원에는 그들과 관련된 많은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화혁명 시기에 폭약으로 칠조탑(七祖塔)을 폭발시켰으며, 그 당시 비로각에 소장되었던 많은 불전이 사라졌고, 대웅보전은 농민들의 외양간으로 사용되었다.

사원 현황
정거사는 길안시(吉安市) 청원구(靑原區) 하동가도(河東街道) 청원산풍경명승구에 있다. 길안시 중심에서 13km 떨어진 청원산 중턱 해발 약 320m에 정거사가 있다.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10여Km 어우러져 있고, 산위의 고목들이 자태를 뽐내며, 진귀한 화초, 맑은 샘물, 푸른 봉우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거사로 들어가려면 산문 3곳을 거쳐야 한다. 청원산풍경명승구 길가 붉은 정자가 첫째 산문이다. 길을 따라 가다 대월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보이는 ‘조관(祖關)’이 두 번째 산문이다. ‘조관’을 지나 병풍 같은 작은 산을 지나고 영풍교를 지나면 세 번째 진정한 산문에 도착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산문 위의 ‘청원산’이라고 쓴 세 글자는 남송 말기 원나라 전쟁영웅 문천상이 직접 쓴 것이다. 글체가 힘이 있고 기상이 비범하다. 두 번째 산문위의 ‘조관’ 두 자는 당나라 대서예가 안진경이 767년에 쓴 것이다. ‘조관’이 새겨진 비가 정거사를 향하는 길 입구에 세워져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원에 와서 참배를 하는 사람들이 ‘조관’을 보면 ‘문관은 가마에서 내리고, 무관은 말에서 내려(文官要下轎, 武官要下馬)’ 걸어 들어감으로 경건함을 표하였다고 한다.

세 번째 산문에 들어서면 2m가 넘는 조벽(照壁)이 시야에 들어온다. 벽 사이에 굴을 파서 안치한 비석에는 명대 왕양명이 쓴 ‘조계종파(曹溪宗派)’ 네 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조벽의 오른쪽 위에는 정거사 노재당(老齋堂)의 유적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송조의 유명한 재상 이강이 청원산을 유람하면서 <유청원산기(游原山記)>를 지었는데, 그 후에 사십이통비석(四十二通石碑)에 새겨 노재당 벽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손상되어 원래 모양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어 조벽을 돌아가면 천왕전이 있고 그 앞에 행사가 심은 오래된 측백나무 두 그루를 볼 수 있다.

정거사의 전체적인 배치가 문 앞 왼쪽은 코끼리상, 오른쪽은 사자상이 있고, 앞으로는 시랑을 바라보고 있다. 사원은 동남쪽에 자리 잡아 서북을 향하고 있고, 전체면적이 20여 묘(畝)를 차지하여 거의 10,000 평방미터가 된다. 기둥이 네 개가 있고 겹처마 지붕 3개로 되었으며, 전형적인 강남의 수향(水鄕) 정원 특색을 지니고 있다. 전체 사원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천왕전, 비로각이 중간쯤에 있고 공덕당, 조사전, 선당, 재당, 가람전, 객당, 지장전이 양측에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웅보전은 3면이 물로 둘러 싸여 있고, 3개의 다리가 그 위에 놓여있다. 이러한 풍경은 사원건축사에서 아주 드문 것이다. 그 외에 북송 문학가 황정견이 청원산을 유람할 때 쓴 ‘유청원사기차운주원옹(游原山記次周元翁)’라는 시가 전한다. 이 시를 팔통석비(八通石碑)에 새겼는데 지금도 대웅보전 양측의 외벽 사이에 보존되어 있다.

천왕전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칠조탑으로 향하는 작은 자갈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은 완연하게 산세를 따라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거사 내의 수많은 고목이 말라죽었는데 1990년대 초에 정거사 제42대 방장 체광법사가 주석하면서 도량이 부흥하기 시작하니, 시들었던 고목들이 다시 싹이 트며 생기를 회복하였다고 한다.

길을 따라 오르면 칠조(七祖)의 ‘귀진탑(歸眞塔)’에 도착한다. 이 탑은 당대 개원 연간에 지은 것이다. 그 옆에 가시나무가 있는데, 행사선사가 가시나무를 거꾸로 심은 것이다. 황휘는 ‘법음인천(法蔭人天)’이라는 커다란 네 자를 남겼다.

사내에는 적지 않은 문물이 보존되어있다. 이미 언급한 저명한 비석과 석각 외에 명대 정덕 연간(1516)에 제조한 청원정거선종(原居禪鐘)을 비롯해 영신북향십삼도배사(永新北鄕十三都倍士)가 선물한 철족정로(鐵足鼎爐)와 천승대동과(千僧大銅鍋) 등이 있다. 현재 정거사는 많은 신도들이 예참하고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특히 대만 거사들과 해외 신도들의 모습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청원행사선사와 그의 선사상
청원 행사(673~740)는 속성이 류(劉)씨 이고 강서성 길안 안복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 도를 논하는 곳에서도 항상 홀로 잠자코 있었다고 한다. 조계의 법석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참례하러 갔다. 행사는 혜능대사의 중시(重視)를 받아 ‘상좌(上座)’라고 칭찬받았다고 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청원 행사가 처음 혜능대사를 만났을 때 문답이 실려 있다. 청원 행사가 “어떻게 공부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혜능대사는 “그대는 일찍이 어떻게 공부했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행사가 “성제(聖諦) 성인(聖人)의 법마저도 짓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혜능대사는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라고 물었고, 행사는 “성인의 법마저도 짓지 않거늘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청원행사 선사 진영.

어떻게 하여야 성(聖)과 범(凡), 유(有)와 무(無), 존(尊)과 비(卑) 등의 상대적인 관념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는 선리(禪理)를 추구하는 이들이 자주 탐구하는 주제이다. 혜능대사는 그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공부하였는지 물었다. 행사는 언하에 돈오하여 불교도가 추구해야 할 제일의제도 중히 여기지 않음을 보여 이미 ‘성’과 ‘범’을 초월하는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밝혔다. 혜능이 또 물으면서 ‘성인의 법마저도 짓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자신이 깨달은 줄 아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보아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라고 질책하니, 다시 “성인의 법마저도 짓지 않거늘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라고 명백하게 밝히자 혜능대사가 인가하였다고 한다.

후에 혜능대사에게 “한 지방을 나누어 교화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分化一方, 無令斷絶)”는 당부를 받고 행사는 고향의 청원산으로 돌아와 정거사에서 수행하고 홍법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 “사방의 선객들이 몰려와 법당에 가득하였다.(四方禪客, 繁其堂)”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청원 행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원 28년(740) 입적하였다. 당 희종황제는 ‘홍제선사(弘濟禪師)’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탑호를 ‘귀진(歸眞)’이라 하였다.

행사선사는 정거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원을 확장하고 승도들을 많이 받아들여 선객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였다. 선사는 육조혜능 대사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돈오성불(頓悟成佛)’의 선리를 견지하여 혜능의 남종을 널리 펼쳤다.

한번은 한 승려가 행사선사에게 물었다. “불법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선사는 반문하였다. “요즈음 여릉(驪陵)의 쌀값이 얼마인가?” 선리는 언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 매사에 적용되는 것이다. 선사의 대답은 겉으로 보기에는 동문서답 같지만, 사실은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논리가 있다. 여릉의 쌀값과 불법의 대의는 갈라놓을 수 없다. 쌀값은 생활 속의 일이고 선은 수행하는 자 본심의 각성이다. 본성과 본심을 보려면 지견(知見)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불법은 쌀값과 같은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이지 현묘한 신비로운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행사선사가 학인을 인도하는 방식은 남종(南宗) 문하의 기타 선사와 비교하면 더 섬세하고 평온하지만, 마음의 근원을 고심하게 하고 당하(當下)에 돈오(頓悟)를 이끄는 법문은 일치한다. 선사의 선풍은 간결하고 소박하며 영활(靈活)하다. 한 승려가 “어찌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선사는 “누가 그대를 묶어두었는가?”라고 반문하고, “어찌하여야 정토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선사는 “누가 그대를 더럽혔는가?”라고 되묻는다. 또 “어찌하여야 열반합니까?”라고 물으면 선사는 “누가 그대에게 생사를 주었는가?”고 다시 질문한다.

행사 회상에서 정진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행사의 문하는 배우려는 자가 무리를 이루었다”라고 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잘 알려진 제자는 석두 희천(石頭 希遷)이다. 희천(700~790)은 속성이 진(陳)씨이고 단주고요(지금의 광동성 고요현)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조계에 이르러 혜능 문하에서 사미가 되었으며, 혜능이 입적하자 행사선사에게 의지하였다. 그와 행사가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기연 문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승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희천은 “조계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스승이 “무엇을 얻으러 왔는가?”라고 하자, 희천은 “조계에 이르기 전에도, 또한 잃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스승이 “그렇다면 조계에 무엇 하러 갔었는가?”라고 묻자, 희천은 “만약 조계에 이르지 못했다면, 어찌 잃지 않음을 알았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정거사 지도.

여기에서 희천이 말하는 “잃지 않음”이라는 것은 바로 ‘자성(自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불성을 가지고 있으나 중생이 미혹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성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희천의 대응에 행사선사는 매우 만족스러워, “여러 제자들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기린 하나면 족하다”라고 하였다.

조계의 돈오법문 계승
정거사는 역대로 조계의 ‘돈오(頓悟)’ 법문을 계승하고, 근래에 와서는 선종의 대선사 허운노화상(虛雲老和)이 오래된 선종문화의 소박한 선풍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대중들은 오늘도 옛날과 다름없이 상과(上課, 경전 공부), 과당(過堂, 예불), 보청(普請, 대중운력), 좌향(坐香, 좌선) 등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정거사는 세속적인 욕망이 미칠 수 없고, 오직 참선하고 경을 읽고 실천하는 즐거움으로만 넘쳐 난다. 그야말로 “산 밖의 세속은 물결이 출렁이나, 산중의 꽃은 그저 피고 질뿐(任山外潮起潮落, 憑山中花謝花開)”이라는 시상(詩想) 그대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