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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6> 호북성 당양 옥천사

신수대사, 황매에서 道 깨닫고 법을 펼친 도량

 

옥천사 산문으로, 당대에 신수대사가 20여 년 동안 법을 널리 펼쳐 선종 도량이 되었고, 도신과 홍인의 동산법문을 북방지역에 가지고 가서 선양하여 선종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옥천사(玉泉寺)는 호북(湖北) 당양(當陽)에 위치하며, 풍경이 수려하고 인간 세상의 소란스럽고 번잡함과 멀리 떨어져 역대로 사람들에게 즐겨 칭송받는 곳이다. 옛날에는 절 모양이 거꾸로 뒤집어진 배와 비슷해서 '복선사(覆船寺)'라고 했다. 옥천산(玉泉山) 동쪽 기슭에 자리한 옥천사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동한(東漢) 건안(建安) 연간(196넙219)에 고승 보정(普淨)선사가 이곳에 초가집을 엮고 참선하였다.

이후에 '형초 총림의 으뜸(荊楚叢林之冠)'이라는 명성을 누렸는데 형초는 중국의 호북과 호남 지방을 통칭한다. 수(隋)나라 지자(智者, 天台 智)대사가 절을 세운 이래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역대 황제에게 '국사', '대사'의 칭호로 봉해진 고승이 10여 분에 달한다. 그 가운데 한 시대를 가장 풍미한 인물은 당연히 당대(唐代) 양경(兩京, 長安과 洛陽) 법주이자 세 황제의 국사였던 신수(神秀)대사이다.

신수대사는 선종 오조 홍인(弘忍)선사에게 가르침과 깊은 신임을 받아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으로 "동산법문(東山法門)은 모든 것이 신수에게 있다"고 칭찬받았다. 홍인선사가 입적한 뒤, 신수대사는 일찍이 오랜 기간 은거하여 사람들이 행방을 알지 못했다. 의봉(儀鳳) 연간(676넙679)에 신수대사는 은거 생활을 끝내고, 옥천사에서 법을 널리 펼쳤다. 그 뒤 측천무후가 동도(東都) 낙양의 궁으로 초청해 후한 예우로 대접하였고, 친히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문의하였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 중종(中宗)은 신수대사를 더욱 받들었다.

사원의 역사

남북조 대통(大通) 2년(528)에 진(陳)나라 선제(宣帝)가 칙령을 내려 복선산사(覆船山寺)를 지었다. 수(隋) 개황(開皇) 12년(592)에, 진왕(晉王) 양광(楊廣)은 천태(天台) 지의(智) 대사의 주청에 응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고, 칙명으로 일음(一音)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옥천사(玉泉寺)로 바뀌었다. 개황 14년(594)에 양광이 칙명으로 지의대사를 '지자(智者)대사'에 봉하고 '지자도량(智者道場)'이라고 쓴 편액을 내려주었다.

지자대사는 이곳에서 천태의 3대 경전 가운데 두 경전인 <법화현의(法華玄義)>와 <마하지관(摩訶止觀)>을 설법하였다. 중국불교사에 있어 "구순담묘(九旬談妙, '妙' 한글자만 설명하는데 90일이 걸림)"과 '동토석가(東土釋迦)'라는 유명한 이름을 남겼다. 당나라 초에 옥천사와 절강 국청사, 산동 영암사, 강소 서하사를 '천하의 사절(四絶)'로 불렸다.

신수대사 진영.

신수대사가 황매에서 도를 깨닫고 얼마 동안 은거한 뒤, 옥천사에서 법을 널리 펼치고, 절의 동쪽에 도량을 열어 선(禪)을 전했다. 남종의 하택신회(荷澤神會)도 일찍이 이 사찰에서 신수대사에게 법을 배웠다. 신수선사가 옥천사에 주석하던 20여 년 동안, 교화가 상당히 성행하였다. 나중에 낙양 천궁사(天宮寺)로 초청되어 측천무후, 중종(中宗), 예종(睿宗)이 모두 선사에게 예우를 갖추어 양경(兩京) 법주(法主)이자 세 황제의 국사로 존숭되었다.

측천무후는 신수국사를 표창하기 위하여 그가 일찍이 초가집을 짓고 수도했던 곳에 도문사(度門寺)를 건립하였는데, 옥천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또한 신수대사의 고향에 보은사(報恩寺)를 세웠다. 신수대사가 낙양에 있는 동안 옥천사에 돌아가겠다고 여러 차례 주청을 올렸으나 모두 허락을 받지 못했다. 101세에 낙양 천궁사에서 입적하며, 도문사에서 장례를 지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종황제가 대통선사(大通禪師)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며 친히 국사의 유해를 성 밖까지 전송하였다.

당나라 황제의 수계사인 홍경율사(弘景律師)도 옥천사에서 출가하고 법을 펼치다 입적하였다. 의봉(儀鳳) 2년(677)에 당 고종이 홍경을 초청하여 스승으로 삼고, 무주(武周) 장수(長壽) 3년(694)에 홍경율사가 옥천사로 돌아왔을 때, 측천무후가 친히 부처님 사리를 하사하고, 칙령으로 7층 전탑(塔)을 세워 봉안하게 했다. 남종의 남악회양(南嶽懷讓), 북종의 보적(普寂), 천태종의 혜진(惠眞)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당대(唐代) 밀종(密宗)의 일행(一行)대사는 일찍이 옥천사에서 혜진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나중에 조정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 선무외(善無畏)를 도와 <비로자나불신변가지경(毗盧遮那佛神變加持經)>을 번역하였다.

송나라 경덕(景德), 천희(天禧) 연간(1004넙1020)에 진종(眞宗)의 비 명숙황후(明肅皇后)가 옥천사를 증축하고, 편액을 내려 경덕선사(景德禪寺)로 고쳤다 숭녕(崇寧) 연간(1102넙1106)에 다시 칙령으로 보국사(報國寺)로 개명하였다. 당시 사원 규모는 '부지가 좌우로 5리(里), 앞뒤로 10리에 달하며, 누각이 8채, 전당이 18채, 승사(僧舍) 3700여 좌가 성운(星雲)처럼 둘러 있어, 형초(荊楚) 총림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도원(道源)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은 이때 경덕선사에서 편찬하여 완성된 것이다. 송대 운문종의 고승 승호(承皓)선사도 일찍이 옥천사 주지가 되어 명망이 높았다.

당대 이후 임제종(臨濟宗)은 옥천사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송대에 이르러 임제가 주가 되어 천태와 정토수행을 겸했다. 원나라 세조, 무종, 인종 황제가 모두 칙령으로 사찰을 중수하였다.

명초에 다시 '옥천사'의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 만력(萬曆) 연간(1567넙1620)에 신종황제가 '형초제일총림(荊楚第一叢林)'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연월선사가 주지를 맡으면서 사방의 총림들이 옥천사 소속이 되었고, 사내(寺內)에는 임제와 조동이 병존하며 사제들이 불법을 전수하였다. 1949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전당과 누각은 명〔청대 궁궐 양식인데, 부분적으로 송· 원 형식도 남아 있다.

사원 현황

옥천사 관광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삼원문(三園門)이다. 옥천사의 산문으로, 회색 벽돌로 된 벽에 청색 기와가 얹혀 있고,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 만력 연간에 이 사찰 승려 성미(性美)가 복구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지금 문패 '삼초명산(三楚名山)'은 조박초(趙樸初) 선생이 쓴 것이다.

옥천사에 현존하는 주요 전당은 미륵전, 대웅보전, 비로전, 위타전(韋馱殿), 가람전, 천광당(天光堂), 대비각(大悲閣), 시방당(十方堂), 장경각, 문수루, 전등루, 강경대, 반주당(般舟堂), 원통각(圓通閣), 천상천(天上天) 등이다. 그 가운데 대웅보전이 가장 웅장하고 수려하며, 중국 남방을 통틀어 가장 큰 고건축물로, 수대(隋代) 초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982년과 2007년에 보수되었다. 처마에 달려 있는 '지자도량(智者道場)'이란 편액은 진왕 양광이 하사한 것이라고 전해지며, 지금 있는 것은 조박초 선생이 쓴 것이다.

대전은 중첨헐산식(重歇山式: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축 면적은 2000여 슨, 높이는 21m 넓이 9칸, 길이 7칸이다. 대전에 쓰인 목재는 대단히 크며, 전당 안에 48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 주위가 1m 이상이며, 온통 녹나무(楠木)를 사용해 지었다. 모든 건축물은 쇠못을 쓰지 않았고, 구조가 치밀하며, 기술이 정밀하고 심오하여 호북성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중축선의 가장 끝에 있는 건축물이 천상천이다. 사원 전체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불문의 하늘 속 하늘이란 의미가 숨겨있다. 원래 고건축물은 1960년에 무너졌고, 지금 것은 2006년에 복원한 것이다.

수대 철솥, 당대 오도자(吳道子)가 석각한 관음상, 북송 철탑을 '옥천삼절(玉泉三絶)'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수대 철솥과 당대 오도자가 석각한 관음상은 현재 비로전의 문물진열실에 있다. 철솥은 수 대업(大業) 11년(615)에 주조한 것으로, 모양이 중후하면서 고풍스럽고 소박하며, 명문(銘文)이 뚜렷하고, 무게는 1500kg이다. 중국 수대의 물건 무게를 다는 기구(衡器)를 고증하는 중요 자료이다.

석각 관음상은 장엄하면서 엄숙하고 선이 부드러우면서 얼굴은 풍만하다. 색다른 것은 이 관음은 남자의 머리에 여장을 하고, 입가에 수염 세 가닥이 있으며, <구옥천사지(舊玉泉寺志)>에 '천남상(天男像)'이라고 실려 있다. 이밖에 원대의 철 가마솥, 철종 등 진귀한 대형 철제기물 10여 개가 보존되어 있다. 사찰 내에는 푸르고 굳센 오래된 측백나무와 잎이 무성한 은행나무가 있으며, 병제련(幷蓮)이 농염하게 피어 있고, 계화향이 가득하며, 쭉쭉 뻗은 푸른 대나무 숲이 있어 장엄하며 조용하고 평온하다.

대웅보전 왼쪽에 있는 반주당 담장 안에 월월계(月月桂)라는 명대 고목 2그루가 있는데, 높이가 약 14m이고 둘레는 1m가 안 된다. 겉모습은 보통 계화나무와 다르지 않으나, 열두 달 내내 꽃이 피며, 때로는 대설이 휘몰아치는 한 겨울에도 여전히 꽃의 향기를 풍긴다. 사원 안에는 당대에 심은 1000년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가지와 잎이 울창하고 무성하며, 크고 웅장해서 여러 사람이 껴안아야 한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두 연못에 피는 천판련(千瓣蓮)은 일찍이 수대에 절을 건립할 때부터 있던 것으로, 옥천사가 천판련의 원산지임을 증명한다.

옥천철탑은 절 앞에 있는 삼원문 북쪽 청룡산(靑龍山)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철탑의 본명은 '불아사리탑(佛牙舍利塔)'이지만, 또한 '능금철탑(金鐵塔)', '천불탑(千佛塔)'이라고도 한다. 북송 가우(嘉祐) 6년(1061)에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하사한 홍경율사의 불사리를 다시 모시기 위해 목조 누각을 모방한 형식으로 지었다. 8각 13층으로 높이는 약 17m이며, 10만 6600근의 무쇠로 제조하였다. 철탑은 지궁(地宮), 탑기(塔基), 탑신(塔身), 탑찰(塔刹)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지궁은 석재로 6각형의 곧은 바닥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한백옥수미좌(漢白玉須彌座)가 설치되어 있고, 자리 위에 사리를 모신 3중 석함(石函)이 있다.

이것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선남선녀들이 참배할 수 있다. 탑기의 수미좌 8면에는 철위산(鐵圍山), 바다, 여의주를 갖고 노는 용 두 마리, 석류꽃으로 장식된 무늬가 있고, 여덟 모퉁이 끝에는 각각 온몸에 갑옷을 입고, 발은 천산(仟山)을 밟은 매우 용맹스럽고 매서운 모양의 역사(力士) 한 분씩이 있다. 탑신 평좌(平坐)에는 단구란(單鉤)이 있고, 탑신에 각기 네 개의 문을 만들어 두 개씩 서로 마주하고 있다.

격층으로 교차하며, 구획을 나누어 주조하여 층을 따라 서로 번갈아 들어가게 하여 용접을 하지 않았다. 탑신에는 1397자의 명문(銘文)이 적혀 있는데, 탑명, 탑 무게, 건립 연대, 장인과 공덕주(功德主)의 성명 및 관련 사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2279좌의 불상이 있는 불국세계도가 철로 주조되어 있다. 탑찰은 동으로 되어 있으며, 모양은 보배 호리병과 비슷하고, 청대에 다시 주조된 것이다. 철탑 전체는 섬세하고 수려하며 굳게 우뚝 솟아 평온하면서도 영롱하여 마치 옥으로 된 죽순이 서 있는 듯하다.

옥천 철탑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높고, 가장 무거우며, 가장 완벽한 철탑이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 야금주조(冶金鑄造), 금속 방부, 영조법식(營造法式), 건축역학, 주조(鑄雕) 예술 및 불교사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옥천 철탑 한 쪽에 지자대사 광장과 지자대사 기념당이 새로 건립되었다. 광장에 높이 8m쯤의 석각으로 된 지자대사 조각상은 연꽃 보좌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항마인(降魔印) 수결을 하고 있다. 표정과 자태가 편안하며 침착하고, 두 눈은 가늘게 드리우고, 오묘한 모습이 장엄하다.

현열산 기슭에 자리한 소관묘(小關廟)는 관우를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최초의 사당이기 때문에 천하관공제일묘(天下關公第一廟)라고 부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자대사가 옥천사를 지을 때, 일찍이 관우가 현성(顯聖)하여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명대에 이르러 그가 처음으로 현성한 곳에 한운장현성처(漢雲長顯聖處)라는 6개의 큰 글자를 새긴 높이 4m의 네모난 기둥 모양의 석망표(石望表)를 세웠다.

신수선사의 선사상

대통신수(大通神秀)대사(606넙706)는 속성(俗姓)이 이(李)씨이고, 진유(陳留) 위씨(尉氏, 지금의 하남성 위씨현) 사람이다. 어려서 유가와 도가의 경전을 배웠고, 박학하며 견문이 넓었다. 수 말엽 왕세충(王世充)이 병사를 일으켜, 하남과 산동 일대가 기아와 전염병이 만연하게 되었는데, 신수가 형양(滎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 선지식 한 분을 만나 출가하였다. 당 고조 무덕(武德) 8년(625)에 낙양 천궁사(天宮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삼승경론(三乘經論)과 사분율의(四分律儀)를 깊이 탐구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50세가 되어, 기주 황매현 쌍봉산의 홍인선사가 선문의 종사이고 법문을 크게 깨달았다는 말을 듣고,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가서 예배하고 알현하였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마음으로 추존(推尊)하여 "이분이 정말 내 스승이시다"라고 감탄하고, 홍인문하에 들어가 땔나무를 짊어지고 물을 긷는 등의 노역을 하면서 법을 구했다. 6년 동안 밤낮으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노역을 하여 홍인에게 깊은 신뢰를 얻게 되어 상수제자(上首弟子)로 뽑혔고, 홍인은 그를 현해원조제일(懸解圓照第一), 신수상좌(神秀上座)라고 칭하며 교수사(敎授師)를 맡겼다. 홍인이 입적한 이후, 신수대사는 동산법문을 북방 지역에, 혜능선사는 영남(嶺南)에 전파하여, 한때 '남능북수(南能北秀)'라 불리었다.

신수대사의 선사상은 흔히 <단경>에 실려 있는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진애가 끼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는 게송으로 설명한다. 신수대사가 직접 지은 게송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신수대사의 북종선 사상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신수대사 선사상은 그의 저술로 확인된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과 <관심론(觀心論)>으로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대승오방편문(大乘五方便門)에 신수대사의 선사상이 집약되었다. <대승무생방편문> 시작 부분에 다음과 같이 오방편문을 열거하고 있다.

"제1 불체를 모두 드러내어 밝힘(第一總彰佛體), 제2 지혜문을 엶(第二開智慧門), 제3 부사의법을 현시함(第三顯示不思議法), 제4 제법의 정성을 밝힘(第四明諸法正性), 제5 자연무애해탈도(第五自然無碍解脫道)."

오방편문은 제1문에는 불체(佛體)를 드러내고, 제2문의 지혜, 제3문의 해탈, 제4문의 제법, 제5문의 무애해탈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사조(師祖) 도신(道信)선사의 오문선요(五門禪要)를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신선사는 오문선요를 "첫째, 마음의 주체를 아는 것이다(知心體), 둘째, 마음의 작용을 아는 것이다(知心用) 셋째, 언제나 깨달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常覺不停), 넷째, 항상 몸이 공적함을 관하는 것이다(常觀身空寂), 다섯째,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守一不移)"로 설정하는데, 신수대사의 오방편문과 그 체제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신수대사의 선사상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 장설(張說)이 찬술한 <형주옥천사대통선사비명(荊州玉泉寺大通禪師碑銘)>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 개법(開法)의 대략은 오로지 염(念)하여 생각을 멈추고, 극력(極力)으로 섭심하는 것이다. 그 들어감은 범성(凡聖)을 균등하게 하고, 그 도달함은 행에 앞뒤가 없는 것이다. 정(定)에 나아가기 전에는 모든 연을 다하여 끊고, 혜(慧)가 발한 후에는 일체가 모두 같음(如)이다. 특히 <능가경(楞伽經)>을 받들어 심요(心要)로 삼는다."

이로부터 신수대사의 대체적인 선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데, 대사는 기본적으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심본체(心本體)로 설정하고,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추는 식상(息想)을 통하여 섭심(攝心)을 이루며, 또한 그를 통하여 취정발혜(趣定發慧)를 이루는 선법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승무생방편문>에서 "이른바 말하는 각(覺)의 뜻이란 심체(心體)가 생각을 떠남(離念)이요, 이념은 불(佛)의 뜻이고, 각의 뜻이다."라고 밝히는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옥천사 지도.

그에 따라 <대승무생방편문>에서는 "제불여래에게 입도를 위한 대방편이 있는데, 일념(一念)에 정심(淨心)한다면, 불지(佛地)를 돈초(頓超)한다"고 설하며, 또한 그를 실현시키기 위해 "간심(看心)하여 만약 청정하다면, 정심지(淨心地)라고 하니, 몸과 마음을 웅크리거나 펴지 말 것이며, 넓고 멀리 놓아 평등하게 허공이 다하도록 간하라"고 하여 간심(看心)과 간정(看淨)을 권한다.

이러한 신수대사의 선사상은 도신-홍인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사상적으로 적전(嫡傳)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조혜능에 이르러서는 철저하게 돈오견성(頓悟見性)을 강조하였고, 그에 따라 신수대사의 선사상은 오히려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하택신회는 신수대사의 선사상을 활대(滑臺)의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마음을 모아 정에 들고(凝心入定), 마음에 머물러 깨끗함을 간하며(住心看淨),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며(起心外照), 마음을 포섭하여 안으로 증득한다(攝心內證)"는 법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던 것이다.

북방지역으로 영향력 확대

옥천사는 천태종의 조정(祖庭) 가운데 하나이며, 지자대사가 여기에서 구순묘담(九旬妙談)이라는 미담을 남겼다. 당대에 신수대사가 20여 년 동안 법을 널리 펼쳐 선종 도량이 되었고, 도신과 홍인의 동산법문을 북방지역에 가지고 가서 선양하여 선종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그는 황혼의 나이에 황제의 초청을 받아 경성에 가서 국사로 존숭되었으며, 황제가 항상 불경의 대의(大義)를 문의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계속해서 숭산(崇山)과 낙양 일대를 널리 교화하였으며, 경성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이는 선종계통에서 첫 번째로 집정(執政)자에게 승인과 추숭을 받은 것이며, 선종이 계속 발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당양고사(當陽故事)

가) 지자대사가 옥천사 복선산(覆船山) 나무 밑에서 가부좌하고 있는데 관운장이 나타나 대사에게 묻기를  “억울하여 저승으로 가지 못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면 관우 장군! 관우 장군한테 죽은 안량과 문추는 안 억울하겠소? (予即關某 死有餘烈 故王此山 禪師何枉法足?)”
이에 관우는 고개를 떨구며 청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사원을 건축하기를 원합니다.”
그 후 사원이 건축된 후에 관공(關公)은 대사에게 수계를 받고 귀의하였다. 관공은 이로 말미암아 사찰을 보호하고 삿된 마구니를 쫓아내는 호법신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무재신’(武財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옥천사를 끼고 돌면 관우전이 있다.

나) 소동파와 당시 옥천사 주지(住持)이자 운문종(雲門宗) 고승인 승호(承皓)선사의 유명한 일문일답 역시 이곳에서 생긴다. 승호선사가 누구냐고 물으니 소동파는 비꼬듯 "칭(稱)가요"라고 답한다. 칭(秤)이란 저울질 할 '칭'자로, 풀어보면 자기는 상대방의 식견이나 도력을 저울질하는 사람이라는 거만한 비유이다. 대사가 모른 척 "아니 그런 성씨도 있소이까?"라며 껄껄 웃다, 대뜸 ‘할(喝)’을 하고 나서 “이 일 할(喝)이 몇 근이나 되오?”라고 물었다. 이에 소동파는 망연자실하여 답을 못했다. 알량한 세속의 알음알이로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물으니 유구무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