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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8> 하남성 용흥사 대운사 보응사

육조 혜능대사 제자 하택신회선사 행화도량

신회선사가 머물렀던 남양 용흥사 불당.

이 글에서 소개하는 사원 3곳은 모두 하택신회(荷澤神會)선사와 관련이 있다. 신회선사는 육조 혜능의 제자로, 혜능이 입적한 다음에 남종 돈교의 정통성을 위하여 당시 조정의 공양을 받으며 세력이 커진 신수(神秀)선사의 북종계통과 여러차례 논쟁을 진행하였다.

몇 십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남종선의 정통 지위가 확정되고, 그 후 북종선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리지고 남종은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후 남종선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은 천하를 석권하게 되어 중국 불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하택신회 선사의 법맥을 전승할 뛰어난 제자가 없어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1930년대 이르러 돈황의 문헌들이 발견되고, 신회선사와 상관된 많은 전적이 출토되고서야 선법과 법맥이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하택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택신회선사의 진영.

그렇지만 하택종의 조정(祖庭)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목 가운데 용흥사는 하남의 남양에 위치한다. 신회선사는 혜능이 열반 한 후에 조계를 떠나 이곳에서 20여 년 동안 머물렀고, 그 사이 수차례 북상하여 북종과 논쟁을 하였다. 대운사는 하남성 안양시 활현에 위치한다. 신회선사가 개원 12년(724)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북종의 유명한 숭원법사와 논쟁을 하여, 남종의 종지를 정하고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을 편찬하였다. 보응사는 하남 낙양 여양현에 위치하며, 신회화상 사리탑이 있던 곳이다.

사원의 역사

용흥사는 남양시 완성구 황대 강진 우왕촌에 있다. 시에서 17㎞ 떨어져 있고,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기록에는 개원 8년(720) 당 현종이 혜충선사를 초청하여 남양 용흥사 주지로 임명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실려 있다. 혜충국사는 육조 혜능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말을 못하여, 16세가 될 때까지 문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집에 선사 한 분이 오시자 혜충이 멀리서 예를 올리고, 문득 출가하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육조 혜능 문하에서 11년 동안 참학하여, 하택신회, 남악회양, 청원행사, 영가현각과 함께 육조 문하의 ‘5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며, 신회선사와 함께 북방에 육조의 선법을 전파하였다. ‘안사의 난’에 이르러 혜충국사는 용흥사를 떠났다.

그동안 용흥사에서 30여 년을 홍법하여 남양혜충이라고 불렸다. 신회선사는 혜능이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서 20여 년을 머물렀는데 시인 왕유, 남양태수 왕필, 내향현령 장만경 등이 항상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들 사이의 문답기록이 <남양화상문답잡정의(南陽和尙問答雜征義)>에 실려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용흥사는 대단히 웅장하고, 절 안에 푸른 소나무와 푸른 측백나무가 있고, 정자와 누각이 있고, 비문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전당(殿堂)은 5층 궁전식으로 건축되었고, 산문, 천왕전, 대웅보전, 비로전, 후전이 있었다. 좌우대칭으로 관음전, 지장전 및 회랑, 재당, 월문 등이 있다. 각 건축물은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으며, 푸른 기와가 즐비하고, 아름다운 계단이 끊어질 듯 나 있었다.

높은 건물이 구름을 뚫고 서 있었으며, 거대한 기둥이 숲을 이루듯 섞여 있고,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벽은 휘황찬란하였다. 불상은 거대하고 장엄하여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여, 건축물 전체 규모가 웅장하고 전아하다. 전성기에는 비구와 비구니 200여 명이 항상 머물러 밭 500여 무(이랑, 1무는 약 200평)를 농선병중(農禪幷重)하였으나, 역사가 변천함에 전란의 풍화를 겪었다. 특히 일본 왜구가 중국을 침범했을 때 사원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승려들이 의지할 곳을 잃고 떠나 사원은 쇠락하게 되었다.

신회선사가 무차대회를 열었던 명복사(대운사)의 불탑.

대운사는 하남성 안양시 활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날에는 이곳을 활대, 활주라고 불렀다. 현종 연간에는 ‘명복사’로 개명하였다. 개원 12년(724) 정월 15일을 시작으로, 남양화상 신회는 이곳에서 ‘무차대회’를 수차례 열고, 북종의 유명한 학자 숭원법사와 논쟁을 통해 남종의 종지를 세웠다.

신회선사가 입적한 보응사 학당 건물.

보응사는 여양현 성 북쪽 40리 두강촌과 상거촌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 당 숙종 보응원년(762)에 세워졌기에 보응사라고 했고, 신회선사는 이 사찰에서 입적하였다. 청 가경 7년과 도광 7년에 중수되었다. 그 후 점차 방치되어 허물어졌고, 1943년 원래 절터 위에 학교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여양이고(汝陽二高) 소재지가 되었다.

하택신회 선사와 선사상

하택신회(670~758)는 호북 양양 사람이고, 속성은 고씨다. 어릴 적에 스승을 따라 경사(經史)를 배웠고, 특히 노자와 장자의 학문을 좋아했다. 이후 <후한서>를 읽고 불교를 알고, 마음이 끌려 벼슬길에 나가는 대신 국창사에서 호원에게 출가하였다. 그 후 형주(지금의 호북 당양) 옥천사의 신수선사에게 갔는데, 측천무후가 신수에게 경성으로 들어오라는 조서를 받은 뒤, 신수는 문하제자에게 소주(지금의 광동 소관)에 가서 혜능선사를 참방하라고 하였다. 신회선사는 13세 때, 육조 혜능을 알현하였다. <단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육조대사가 물었다. “선지식은 멀리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사물의 진면목을 인식할 수 있는가? 만약 사물의 진면목을 인식한다면, 마땅히 사물의 주체를 인식하여야 하니 너는 그것에 대하여 말해 보아라.”

신회가 말하였다. “사물의 진면목은 머무는 곳이 없어서 영원히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주체입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 사미는 어찌 그렇게 경솔한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러자 신회가 물었다. “스승은 좌선하면서 불성을 보셨습니까?”

대사는 주장자로 신회를 세 번 때리고는 물었다. “내가 너를 때리니 너는 아픈 것이 느껴지느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대사가 대답하였다. “나도 불성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신회는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합니까?”

대사가 대답하였다. “내가 보인다고 하는 것은, 내가 정상적으로 자기의 잘못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나, 다른 사람의 옳음, 거짓, 좋음, 나쁨을 볼 수 없으니, 또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하니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너는 아프기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어찌 한 말이냐? 만약 네가 아프지 않다면 그것은 나무나 돌멩이와 같은 것이고, 만약 아프다면 그것은 범부와 마찬가지여서 원한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네가 앞서 말한,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 편견이고, 아픈 것과 아프지 않은 것은 생함과 멸함의 법(生滅法)이다. 너는 아직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불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면서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놀리느냐?”

불성과 자성이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절실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의 분별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신회는 자신의 총명함을 자만하고, 혜능에게 좌선하여 보았는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혜능이 주장자로 때려, 그에게 선은 자신이 체험해야하는 것이지, 언어의 시비(是非) 양변(兩邊)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방편으로 일깨웠다.

신회는 부끄럽고 깨달은 바가 있어, 거듭 절을 올리며 잘못을 빌고, 평생 혜능선사를 모시며 곁을 떠나지 않아 혜능선사의 신임을 받았다. 신회는 혜능대사를 모시면서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방아를 찧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혜능대사가 황매에서 장작을 패고 방아를 찧는 것과 똑같이 재현하며, 일상에서 선을 체험하였다. 이것도 남종선이 지니는 중요한 특색이다.

혜능대사가 원적에 든 이후, 신회선사는 북쪽으로 가서 행각하다 개원 8년(720)에 칙령을 받아 남양 용흥사 주지가 되었는데, 명성이 널리 알려져 남양태수 왕필과 시인 왕유 등이 와서 법을 물었다. 용흥사에 머무는 동안 수차례 북방으로 가서 선을 전했다. 또한 활대 대운사에서 ‘무차대회’를 열어, 당시 주류에 속했던 신수­보적 계열의 북종선을 “사승은 방계이고, 선법은 점수(師承是傍 禪法是漸)”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달마가 전한 가사(袈裟)를 증거로 제시하고, ‘육조선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자기의 스승인 혜능과 남종이 법통을 확립하는데 목숨 바쳐 헌신하였다. 개원 18년(730)부터 개원 20년까지 신회는 북종을 대표하는 인물인 숭원법사와 수차례 논쟁을 벌인 과정이 독고패가 찬술한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무차대회’를 개설한 목적은 “공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도를 배우는 자가 옳고 그름을 정하게 하고, 천하에 마음을 쓰는 자가 삿됨과 바름을 분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천보 4년(745) 78세 고령이었던 신회선사는 병부시랑 송정의 요청에 응하여 동도 낙양 하택사에 머물렀다. 선사는 하택사에서 매달 법회를 열고, ‘청정선’을 타파하고 ‘여래선’을 세워, 북종의 “마음을 모아 정(定)에 들어, 마음을 머물러 정(淨)을 살피며,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증득한다.(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라는 선법은 <유마경>에서 말하는 ‘연좌(宴座)’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신수의 제자 보적과 의복은 세상을 떠났고 신회선사의 노력으로 조계의 돈오법문이 점차 낙양에 전파되고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 북종 문하의 보적에게 귀의한 어사 노혁이 천보 12년(753)에 신회가 무리를 모아 조정을 비판한다고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80여 세의 신회선사는 이로 인하여 강서 과양군으로 좌천되었다 오래지 않아 호북 무당군으로 옮겼다. 천보 13년(754) 봄 다시 양주로 옮겼다, 7월에 칙령으로 형주 개원사로 옮겼다. 신회선사는 모함 받아 추방된 삶을 살며 2년 동안 사방으로 옮겨 다녔지만 명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신회선사가 모함 받은 지 3년이 되던 천보 14년(755)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서촉으로 황급히 도망갔다. 곽자의가 병사를 이끌고 정벌하였으나 군수품이 모자라자 우복야(右僕射) 배면(裵冕)을 채용했다. 전국 군부에 각각 계단을 설치하고 ‘도승(출가의 수계의식)’을 실시하여, 세금을 거둬 군비를 확충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신회를 모함했던 노혁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자, 선사에게 ‘설단도승(設壇度僧)’의 임무를 맡겨 89세 노구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낙양의 사찰은 이미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따라서 선사는 임시로 사원을 마련하고, 중간에 방단(方壇)을 건축하여, 모든 ‘도승’의 수입 전부를 군비에 지원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뒤, 숙종은 그를 궁궐로 불러 공양하였으며, 유명한 장인에게 하택사를 중건하도록 하고, 혜능대사의 진당을 세우게 했다. 또한 송정에게 비를 만들고, 태위 방관에게 <육엽도서>를 쓰도록 명하였다. 건원 원년(760) 5월 13일, 신회는 형주 개원사에서 입적하니, 나이 93세였다. 낙양 보응사에 탑을 세우고 탑호는 ‘반야’라고 하였다. ‘진종대사’라는 시호도 내렸다. 선사가 입적한지 30여년 뒤 덕종황제는 “선문의 종지를 정하고”, 신회선사를 ‘칠조’로 세웠다.

신회선사 사상은 육조 혜능을 계승하였다. 신회의 절대 추종자이며 사전 제자인 규봉종밀이 신회선사에 대하여 ‘전부 조계의 법이며, 다른 종지가 없음’이라고 규정하고, ‘앎이라는 한 글자가 모든 오묘함의 문’임을 강조하였는데, ‘앎(知)’은 한편으로 진여불성 곧 마음의 본체이며, 일종의 텅 비어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텅 비어 고요한 앎(空寂的知)’이 우주만물의 본원이며, 여러 가지 차별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한편으로 ‘앎’은 지해(知解), 지견(知見)이란 뜻이다.

신회선사 본인도 지견(知見)을 매우 추숭하여, 나중에 선종의 다른 법계에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반야’를 기초로 하여, 일상생활에서 반야지혜의 무분별한 응용을 중시하였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심(自心)의 불성을 깨달아야만 성불할 수 있으며, 이런 깨달음이 ‘돈오(頓悟)’라고 보아, 혜능대사와 마찬가지로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돈오견성’은 “곧바로 깨달아 본성을 보고, 단계적으로 점점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라고 보았다. 신회선사는 혜능의 사상 가운데 ‘정혜등학(定慧等學)’을 특히 강조하였으며, 이로부터 반야사상을 설명하였다. 체용(體用)의 관계로 ‘정혜’를 해석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귀결시켰으며, 이로써 곧바로 ‘불이법문’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하남성 용흥사 대운사 보응사 지도.

혜능선사가 제창한 무념(無念)을 강조하기 위하여, 신회선사는 심불기(心不起)와 염불기(念不起)를 제시하여 자신의 자성을 관찰하고, 이로써 ‘좌선’을 설정하였다. 무념은 불성을 체득해 깨닫는 것으로 돈오성불의 관건이다. 생각(念)은 망령된 생각(妄念)과 바른 생각(正念)의 구별이 있으며, 무념(無念)은 망령된 생각이 없는 것을 가리키며 바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무념’을 통해서 진심이 나타나 공적(空寂)한 자성을 깨닫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법에 머무르지 않고, 의지하는 바가 없고 닦지 않으면서도 닦으며 자유롭게 소요하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회선사 법계를 하택종이라고 칭하는데, 150년 동안 지속해서 전승되다 당말에 이르러 쇠약해졌다. 오대 이후 혜능 문하의 청원행사와 남악회양 두 계통만 선종 세력을 나누어 날로 번성하였던 까닭에 신회선사의 하택종은 점차 쇠락해졌고, 심지어 비방하는 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돈황의 유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불교사서에 실린 신회 자료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자료로는 선종사에 있어 신회선사 위상과 작용에 대하여 전반적인 평가를 도출해 낼 수 없었다. 1920년대와 30년대 돈황 유서에서 상당한 양의 <신회화상선화록>이 발견되었고, 그 후 보응사에서 신회탑명이 출토되고 신회선사 사상에 대하여 비교적 전반적인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 남종선에 대한 신회선사의 공헌은 폭넓게 공인되고 있다.

한 생각 일어 나지 않은 곳(心念不起)

사실 신회가 없는 중국 남종선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지해(知解, 알음알이)종사로 매도됨은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법호가 ‘반야’이니 그냥 두어도 좋을법하다고 본다. ‘심불기 염불기’로 자성의 공적함을 제시함은 시간과 공간이 무너지면서 ‘당하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