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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7> 광동성 조계산 남화선사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7> 광동성 조계산 남화선사

기자명법지스님 / 부산 대원사 주지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 기사스크랩하기 다른 공유 찾기본문 글씨 줄이기본문 글씨 키우기

육조 혜능선사 행화사찰로 선종(禪宗)의 중심도량

육조 혜능선사가 행화했던 조계산 남화선사 산문.

남화선사(南華禪寺)는 선종 육조(六祖) 혜능(慧能)선사의 행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중국 불교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찰로 현재도 선종의 중심도량이다. 예로부터 “영남의 선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한다. 사찰은 광동성(廣東省) 소관시 곡강현 동남쪽 약 6km 떨어진 조계산(曹溪山) 북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남조 양무제 천감 원년(502)에 창건되었다. 1500년의 긴 역사와 전통을 지닌 경치가 아름다운 고찰이다. ‘조계’라는 지명의 연원은 아주 먼 옛날에 조조의 현손(玄孫)인 조숙량이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였기에 마을 이름을 ‘조후촌’이라 칭하여 ‘조계(曺溪)’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계’는 본래 시냇물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혜능선사의 등장으로 선종의 대명사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원의 연원과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옛날 인도 고승 지략(智藥)삼장이 중국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길에 광주를 지나 강을 따라 북상하다 개울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하도 감미롭고 달콤하여 발원지인 조계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주위를 돌아보니 산천이 아름답고 수질까지 뛰어났다.

“명산은 산은 푸르고, 물까지 빼어나다”라는 옛날 말 그대로였다. 이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은 마치 인도의 보림산과 같다. 이곳에 절을 세우면 약 170년 뒤에 큰 스님 한분이 이곳에서 크게 불법을 펼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육조 혜능선사 진영.

후에 지방관이 이 일을 알고 조정에 상주(上奏)하니, 천감 3년(504)에 절이 세워지고, 양무제가 ‘보림사(寶林寺)’ 편액을 하사한다. 그 후 당 의봉 2년(677)부터 혜능선사는 예언과 같이 보림사에서 37년간 남종선을 천하에 전한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에 측천무후가 혜능선사에게 수정으로 된 발우와 마납가사(磨衲袈裟) 등을 하사하였다. 신룡 원년(705)에 당 중종이 발우와 마납가사 등을 다시 하사하고, 사찰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라고 개명하였으며, 신룡 3년(707)에 ‘법천사(法泉寺)”라고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

송나라 초기 사찰은 전쟁으로 훼손되지만, 개보 초년(968) 태조는 황명을 내려 사찰을 전체적으로 복원하고 ‘남화선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원나라 말기 남화선사는 세 차례 전란으로 심하게 훼손되었고, 승려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아픔을 갖게 되었다. 명나라 만력 28년(1600)에 감산선사의 원력으로 중흥시키면서 또 다시 선풍을 휘날린다. 청나라 강희 7년(1688)에 평남왕 상가희는 명나라 말에 훼손된 사찰을 새롭게 단장하지만 역사의 질곡 속에서 청말 다시 전란을 겪었다.

1934년 허운 노화상이 남화선사를 다시 중창하였다. 현재 혜능선사 진신은 1981년 음력 10월에 새로 중창한 육조전에 모셨고, 이로부터 수많은 대중들의 참배가 줄을 잇고 있다. 2002년 남화선사는 창건 1500주년 개산법회를 성대하게 봉행하였다.

현재 남화선사의 가람배치는 남에서 북으로 조계문, 방생지, 보림문,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각, 영조탑, 방장실이 차례로 있다. 천왕전으로부터 동측은 순서에 따라 종루, 객실, 가람전, 재당(齋堂, 공양간) 등이 있다. 서측은 고루(鼓樓), 조사전, 공덕당, 선원, 조계불학원 등이 줄지어 있다. 정원 밖 북쪽으로는 탁석천이 있는데, 청량하고 감미로운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이곳은 혜능대사가 가사를 씻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복호정, 비석교가 있다. 서쪽으로는 무진암, 해회탑, 허운화상 사리탑, 동쪽에는 중산정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원내의 두 그루 보리수는 인도 고승 지략삼장이 서역에서 직접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기세가 하늘을 덮을 것 같은 기운은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한다.

대웅보전 높이는 16.7m이고, 정면은 일곱 칸, 측면도 일곱 칸으로 광동성에서 제일 큰 대웅전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탑은 남화선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높은 탑이다. 당나라 선천 년간(712~713)에 조성되었고, 높이는 29.6m, 바닥 지름이 11m이다. 원화 7년(812) 당 헌종이 ‘원화영조지탑(元和靈照之塔)’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목탑으로 조성하였지만 몇 차례 재조성하면서 명나라 성화년간(1465~1487)에 전탑(塼塔)으로 바뀌었다.

조사전에는 세분의 진신보살을 모시고 있다. 좌우측에 명나라 단전화상과 감산덕청화상 진신이 모셔져 있고, 중앙에는 혜능선사 진신이 봉안돼 있다. 전하는 바 에의하면 남화선사에는 원래 지략삼장 진신과 <단경(壇經)>에 나오는 무진장 비구니 진신도 보존하고 있었는데, 문화혁명 시기에 아쉽게도 훼손당하였다.

남화선사 대웅보전.

도량에는 다수의 귀중한 문물이 보존되고 있다.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남북조시기 북제 효소제 황건 원년(560)에 조성된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불상이다. 그 후의 수대에 무쇠로 조성한 불상도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당대의 혜능대사 ‘진신소상(眞身塑像)’과 천불가사이다.

그 밖에 역대 성지(聖旨, 임금의 교시)도 많다. 북송 시기에 조성한 360존의 목조 나한상은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고, 소동파가 찬술한 비명도 있다. 그리고 동으로 만든 송대의 대동종이 있으며, 원대의 무쇠로 만든 큰 철가마, 명대의 목조 사대천왕상, 청대의 천불철탑, <금강경> 동판 등 수많은 국보가 있다. 이러한 국보급 보물은 중국 고대건축, 조소, 회화, 음악, 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하고 구체적인 자료이다.

또한 도량 내외에는 육조대사가 몸소 심었다는 수송(水松, 청각채)과 여지나무가 무성하고, 그 외에 보리수, 용수나무, 장목 등 수십 그루가 세월을 이기며 도량을 묵묵히 장엄하고 있다.

지금 남화선사에는 불교 인재양성기관으로 ‘조계불학원’이 있는데, 결제 때에는 학승들이 조석으로 선원에 가서 선승들과 함께 정진한다. 불학원은 허운화상이 1948년 창설한 ‘남화계율학원’을 계승한 것으로 후에 여러 사정으로 휴원하였다가 1983년 유인법사가 다시 ‘승가양성반’으로 개명하여 복원하고, 2000년에 전정 방장이 ‘조계불학원’으로 개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혜능선사의 선사상

육조 혜능(638~713)대사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원적은 범양(范陽, 현재 하북성)이다. 부친은 당나라 무덕 년간(618~626)에 벼슬이 강등되어 영남의 신주(新州, 현재 광동 신흥현)로 이주하였다. 혜능은 어린 시절 부친이 세상을 뜨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장작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객잔(客棧, 여관)에 장작을 팔게 되었는데,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자마자 깨닫고서, 황매(黃梅)로 달려가 홍인선사를 참알하였다.

홍인선사가 “너는 갈료(, 남방의 천한 신분)인데 어찌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갈료와 화상의 신분은 서로 다르지만, 불성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사는 이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이후에 방앗간에서 8개월 넘게 방아를 찧게 하였다. 후에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 거울도 그 받침이 없는 것,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진애가 끼겠는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종보본)”라고 하는 유명한 게송으로 홍인선사의 인가를 받고, 선종의 육조(六祖)가 된다.

홍인선사 인가를 받은 후, 남쪽으로 내려와 사냥꾼들과 16년간 생활하면서 시절 인연을 기다렸다 광주 법성사에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바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는 유명한 풍번(風幡)의 고사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이를 인연으로 법성사 주지 인종법사에게 수계를 받고, 다시 인종은 혜능선사의 제자가 되는 기연을 낳는다.

일반적으로 혜능선사를 중국선종의 완성자로서 평가하고 있다. 선사의 어록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중국 선종의 종전(宗典)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승려들의 저술 가운데 유일하게 ‘경(經)’으로 칭해지고 있다. <단경>은 전래 과정에서 20여 종이 넘는 다양한 판본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갖는 것은 돈황본(敦煌本), 혜흔본(惠昕本), 설숭본(契嵩本), 덕이본(德異本), 종보본(宗寶本)이다. 그 가운데 종보본은 원나라 세조 28년(1291)에 광주 광효사 승려인 종보가 개편한 것으로, 명대 이후에 가장 유행하는 판본이다. 다양한 판본들이 문장에 있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기본 사상은 일치한다. 즉심즉불(心佛)의 불성관과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수증관 및 자성자도(自性自度)의 해탈관은 모든 판본에서 동일하다고 하겠다.

‘불성’은 성불의 근거이고, 근본불교에서는 성불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단경>에서 설해지는 ‘불성’은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인성(人性)과 심성(心性)으로 끌어내린다. 이로부터 ‘불성’을 중생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자성(自性)’으로 설정하여 “자성을 모르면 중생이요,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자신의 ‘자성’에 대한 미혹과 깨달음이 바로 중생과 부처의 유일한 구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가 바로 자성이니, 자신의 밖에서 구하지 말라(佛是自性, 莫向身外求)”, “본심만 알아차리면 바로 해탈이다(若識本心, 是解)”라고 설하며, 수행 역시 다만 “모든 때에 염념에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於一切中, 念念自其心)”라고 제창한다. 따라서 <단경>의 사상을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음에 ‘즉(卽)’하면 부처에 ‘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단경>에서는 또한 불성이 항상 청정하다는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을 기본으로 ‘돈오견성(頓悟見性)’을 강조한다. <단경>에서는 “본래 정교(正敎)에는 돈(頓)·점(漸)의 구분이 없으며, 다만 인성에 이(利)·둔(鈍)이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漸修)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頓修)한다. 만약 스스로 본심을 깨달아 스스로의 본성을 본다면, 바로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돈·점은 모두 이름을 빌려 세운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돈·점을 모두 인정하는 것 같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한다”는 말로 본다면, ‘점수’보다는 ‘돈오’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내가 홍인(弘忍)화상 처소에서, 한 번 듣고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돈견(頓見)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 교법을 후대에 유행하게 하여,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돈오하게 하고, 자신의 본성으로 하여금 돈오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철저하게 ‘돈오’를 중시함을 암시한다. 나아가 직접적으로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自悟)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것이지, 점차(漸次)는 없는 것이다”라고 설한다.

<단경>에서는 수행방법으로 ‘정혜등학(定慧等學)’과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제창하고 있다. 특히 “정(定)과 혜(慧)는 하나의 체(體)로서 둘이 아닌 것이다. ‘정’은 ‘혜’의 체이고, ‘혜’는 ‘정’의 용(用)이다”라고 하여 ‘정혜일체’를 밝히고, 나아가 “‘정’이 먼저 있어 그 후에 ‘혜’가 발휘된다거나 혹은 먼저 ‘혜’가 발휘된 후에 ‘정’이 나타나니 각각 다르다”라는 견해를 비판하며 결코 그러한 견해를 내지 말 것을 경책하고, “‘정’과 ‘혜’를 평등하게 배우는 것”이라는 ‘정혜등학’을 제창한다.

이는 북종선에서 ‘선정발혜(先定發慧)’를 주장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그러나 ‘돈오’의 입장에서는 ‘정’과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사상이므로 이러한 ‘정혜등학’은 돈오의 입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일행삼매라고 하는 것은 일체처(一切處)에서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역시 전통적인 해석과는 다르게 설하고 있다.

<단경>에서 설하는 혜능선사의 핵심적인 선법은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전하여 온 것으로 돈점 모두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라고 설하는 무념·무상·무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무념이란 생각함(念)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不念)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무념’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함에 있어서”라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작용을 긍정하고 있음을 말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없다(無)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한다(念)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이상(二相)의 모든 번뇌에 괴롭힘을 떠난 것이고, 생각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진여본성을 생각하지만, 이상(眞俗의 二相)과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을 ‘없다’고 하며, 그를 모두 떠나 진여본성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상이란 상(相)에 있어서 상을 떠난 것이다.” ‘무상’은 무념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번뇌와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상(相)’과 또 다른 하나는 ‘실상무상(實相無相)’으로서의 ‘상(相, 眞如本性)’을 가리킨다. 또한 “무주는 사람의 본성이다. 생각마다 머물지 않고, 전념(前念)금념(今念)후념(後念)이 생각마다 상속(相續)하여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일념(一念)에 단절이 있다면, 법신은 바로 색신을 떠나게 된다. 생각 생각에 일체법에 머묾이 없으며, 만약 일념이 머문다면, 염념(念念)이 바로 머묾으로, 계박(繫縛)이라고 부른다. 일체의 상에서 염념이 머묾이 없다면, 바로 무박(無縛)인 것이다. 이것이 무주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무주’를 설한다. ‘무주’는 ‘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바로 끊임없는 염념에 결코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반야공관에 기초한 것으로 ‘무상’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상(相)’은 생각(念)이 그 대상에 집착하여 머묾(住)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따라서 일념(一念)에 머묾이 있다면, 그대로 염념에 머물게 되어 ‘상’을 이루게 되니, <단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두 상의 모든 번뇌에 괴롭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념의 머묾이 바로 “계박”이라고 말하고, 반대로 일념에 머묾이 없다(無住)면 또한 ‘무상’을 이루게 되고, 그렇다면 ‘무박(無縛)’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무념·무상·무주는 바로 혜능선사의 선사상을 집약한 것이고, 이후 전개되는 조사선의 핵심이다. 더욱이 이러한 입장에서는 종래의 수증(修證) 개념이 바뀔 수밖에 없다. 이른바 ‘무수무증(無修無證)’의 선사상으로 전개된다고 하겠다. 사실상 혜능선사 이후에 나타나는 조사선은 이러한 선사상을 당시의 시대상황과 각 선사들의 성향에 맞게 재구성하여 나타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단경>에는 정식으로 등단설법(登壇說法)할 때 새로운 의궤(儀軌)를 제창하고 있다. 이른바 ‘자성자도(自性自度)’와 ‘무수지수(無修之修)’를 바탕으로 자신의 자성에 귀의하는 ‘무상삼귀계(無相三歸戒)’, ‘사홍서원(四弘誓願)’,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설하는 것이다. 나아가 혜능선사는 열반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 부처님 교법에 입각한 삼과법문(三科法門)과 제자들의 제접법인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 등을 설하는데, 이 역시 조사선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황제들 혜능선사 추앙

남화선사 지도.

혜능선사는 노자, 공자와 함께 ‘동방삼대성인’이라고 칭해진다. 당대의 삼대문호로 불리는 왕유(王維),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은 육조 혜능선사를 위하여 각각 비명을 찬술했다. 이후의 수많은 황제들은 모두 혜능선사를 추앙하여 여러 차례 시호를 하사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혜능선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혜능선사의 불성관, 수증관, 해탈관 및 선사상은 불교의 기본적 의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중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인도와 서역을 통하여 전래된 불교가 최종적으로 중국화 과정을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혜능선사가 중국선종의 참다운 창립자라고 할 수 있다. 남화선사는 혜능선사가 37년 동안 홍법한 도량으로 선종 역사 뿐 아니라 중국불교 역사에서 절대적 지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