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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5> 호북성 황매동산 오조사

5조 홍인선사 창건한 중국선종 실제적 발원지

오조사 진신전. 오조 홍인선사 열반 후 진신(眞身)을 안치했다고 한다.

오조사는 또한 사조사가 있는 황매(黃梅)의 동쪽에 있어 '동산(東山)'이라고 한다. 풍무산(馮茂山)이라고도 칭하는데 높지 않지만 기후가 좋고 산세가 수려하다. 지역적으로 정치적 간섭에서 떨어져 있어 속진을 멀리 하고 수행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오조사는 오조 홍인(弘忍)선사가 창건하고 설법한 도량일 뿐만 아니라 육조 혜능선사에게 의발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선종의 실제적인 발원지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사원의 역사
오조사는 홍인선사가 당(唐) 영휘(永徽) 5년(654)에 직접 창건하였다. 사조사가 있는 쌍봉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에는 '동산사(東山寺)'라고 칭하였다. 홍인선사가 동산사를 창건한 후 "천하의 승려와 신도들이 열에 아홉은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로 수많은 승속이 운집하였다. 또한 그 명성에 따라 유명한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고, 옛 산사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와 풍경을 묘사한 그림들이 셀 수 없이 전한다.

당.송나라 때 오조사에는 전당과 누각이 1000여 좌가 있었고 승려가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오조사에서 불법을 선양한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는데, 역사적 자료에 나타나는 유명한 승려만 해도 100여 명 상회한다. 중국의 역대 왕조도 오조사의 특별한 지위와 역사적 영향을 고려하여 오조사를 존숭하였다. 그에 따라 '천하조정(天下祖庭)', '천하선림(天下林)'이라고 칭해졌다.

오조 홍인대사 진영.

원나라 문종(文宗)에게 '동산오조사(東山五祖寺)'라는 사명(寺名)을 하사받았고, 그 후 '오조사'라고 약칭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상 오조사는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됐지만 다시 중창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전각이 600여 칸, 거주하는 승려가 2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중화민국 시기에 사찰이 심하게 훼손되어 민국 말년(1949)에는 12동과 68여방 남게 되었다. 그러나 1979년 개혁개방 이후 전 방장 창명(昌明)법사와 현 방장 견인(見忍)법사를 중심으로 신도들의 원력과 지방정부의 협조로 대규모 중창을 이루어 새롭게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사원 현황
오조사의 전체 구조는 산세와 지형에 잘 어울린다. 전각은 상대적으로 빈틈없이 잘 배치되어 있다. 산을 올라 절에 이르기까지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갈래는 오조 홍인선사가 절을 세우면서 신도들의 발길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길은 1000여 년 이래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은 모두 청석으로 된 계단을 설치하여 산중턱에 있는 사원 문 앞까지 이어진다. 계단 주위에 복원된 옛 고탑과 부도탑을 보면서 오를 수 있다. 다른 한 갈래는 1980년대 말에 새롭게 닦은 것으로, 차를 타고 산을 돌아 산문까지 갈수 있다.

산문 위에는 '오조사'라고 쓰여 있고 "위로는 달마의 법맥을 잇고, 아래로는 혜능과 신수에게 전한다(上接達摩一脈, 下傳能秀家)"라고 쓰인 한 쌍의 대련이 있다. 다시 양쪽에는 작은 글자로 북종(北宗) 신수(神秀)대사의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진애가 끼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勤拂拭, 勿使惹塵埃)"와 육조 혜능(慧能)선사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 거울도 그 받침이 없는 것,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진애가 끼겠는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선종사에 유명한 두 게송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오조사가 정통을 이어받아 널리 선문을 개창하였다는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절에 들어서면 좌우 양측에 각각 종루와 고루가 있고, 사원 문을 주축으로 천왕전, 대웅전, 마성전(麻城殿, 본래 이름은 비로전이다.), 진신전(眞身殿)이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성모전(聖母殿)은 오조사의 커다란 특색 가운데 하나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오조 홍인선사의 모친인 주부인(周夫人)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진신전은 오조가 열반 후 진신(眞身)을 안치해 진신전이라 칭하였다. 지금은 오조의 진신이 없지만, 안에는 홍인의 소상(塑像)을 모시고 있어 여전히 오조사의 중심이다.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진신전 서쪽 방장실에 있는 귀중한 두 점의 유물이다. 하나는 '송대오조사옥인(宋代五祖寺玉印)'이다. 정방체인 이 도장은 백옥(白玉)으로 조각하여 만들었는데,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른 하나는 '육조혜능추요석(六祖惠能墜腰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돌은 신체가 작고 여윈 혜능선사가 쌀을 효과적으로 빨리 찧고, 그 아낀 시간에 오조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허리에 묶었던 돌이라고 한다.

진신전 뒤로는 통천문(通天門)이 있고, 문밖은 동산의 주봉인 백련봉(白蓮峰)으로 통한다. 산봉우리에는 오조의 탑이 조성되어 있다. 주위에는 지름이 20센티미터가 넘는 대나무들이 쭉쭉 뻗어 죽림을 이루니,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백련봉은 오조사의 최고봉으로 형태가 연꽃을 방불케 한다하여 백련봉이라 이름 지었다. 산 밑부터 위로 치켜 올려보면 또렷하게 연꽃의 모양을 볼 수 있고, 봉우리 위에는 항상 운무가 피어오른다. 따라서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마치 선경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또한 오조사 산문과 멀지 않은 곳에 아치형 돌다리가 하나 있다. 계곡 위에 걸쳐있고 모양이 무지개 같아 '비홍(飛虹)'이라 한다. 다리 위에 전각이 세워져 있고, 벽에는 다양한 불교 고사를 주제로 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비홍교를 넘어서면 오래된 고목들이 맞이한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고목의 수령은 모두 1000년 이상이 된 것이라 한다. 이 나무들은 오조사가 창건될 때 혹은 그 보다 더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인선사와 그의 선사상
홍인선사(601~675)의 속성은 주(周)씨이고 황매사람이다. 도신선사를 따라 출가한 후 30여 년간 선사 옆을 떠나지 않았다. 낮에는 농사 짖고 밤에는 좌선하는 농선병중(農禪幷重)의 규정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성품이 성실하고 초탈하고 활달하기까지 하여 불법에 깊이 계합하니 도신선사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영휘(永徽) 3년(651)에 법과 의발을 도신에게 전수받으니, 이로부터 홍인은 선종 오조가 되었다.

도신선사 열반 후, 홍인은 쌍봉산 사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선을 배우는 대중이 나날이 증가하여 사조사에서는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쌍봉산 동쪽에 오조사를 건립하여 더욱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홍인선사의 선사상은 제자들에 의하여 집록된 것으로 보이는 <최상승론(最上乘論, 修心要論)이라고도 칭함)을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최상승론> 서두에는 "대저 수도(修道)의 본체(本體)는 모름지기 몸과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생하거나 멸하지 않으며, 분별이 없는 자성원만청정(自成圓滿淸淨)의 마음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본사(本師)이고, 바로 시방제불을 뛰어나게 염(念)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선사의 선법 근거가 '자성원만청정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그를 <십지경(十地經)>에서 설하는 금강불성(金剛佛性)을 원용하여 수심(守心)을 강조하고, 그것이 열반법이 드러나는 행법이요, 또한 수심은 자성청정심을 찾아내는 실천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홍인선사의 수심은 수진심(守眞心), 수아진심(守我眞心), 혹은 수본정심(守本淨心), 수본진심(守本眞心)으로도 표현되지만, 수본진심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어 <최상승론>에 보이는 선법의 특질을 수본진심으로 규정할 수 있다.

홍인선사의 수본진심은 그대로 도신선사의 핵심 선법인 수일불이(守一不移)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여, 수본진심은 도신선사가 제창한 '오문선요'에 나타나는 반야사상의 논리과정을 생략하고, 수일불이에 드러나는 불성론적 특징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최상승론>에서 수본진심을 도신의 수일불이에 사용된 동일한 경문과 유사한 설법이기에 그러한 추론을 가능케 한다.

오조사 지도.

홍인선사는 철저하게 마음을 강조하여 그를 지키는 수본진심으로 귀결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상승론>에는 "마음을 식별하는 자는 그것을 지키므로 곧 피안에 이르고, 마음에 미혹한 자는 그것을 버리므로 곧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선사는 구원과 해탈 등은 모두 각자의 자심이 깨달음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중생이 마음을 식별하여 스스로 제도(識心自度)할 것을 중시하고, 부처조차도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고 여겼다.

만약 부처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과거 제불(諸佛)이 항하사(恒河沙)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우리들은 부처가 되지 못했는가?"라고 하였으며, 중생이 만약 "스스로 이 마음이 부처임을 식별할 수 있으면 행주좌와(行住坐臥) 가운데 언제나 분명하게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켜라"라고 하였다.

도신선사와 홍인선사의 법석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도 칭하는데, 홍인선사 제자인 정각(淨覺)이 찬술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신수(神秀) 전기에 나오는 다음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신수는 형주 옥천사(玉泉寺)에 주석하였는데, 대족(大足) 원년(701), 황실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들어갔으며, 가마를 타고 장안과 낙양을 오가며 교화하였고,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신수에게 "전하시는 법은 어느 가(家)의 종지(宗旨)입니까?"라고 묻자 "신주(薪州)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전해 받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시 "어떤 경전에 의지하여 가르칩니까?"라고 묻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측천무후는 "수도(修道)를 논한다면, 다시 동산법문을 넘을 수가 없겠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는 홍인선사의 상수제자인 신수와 측천무후의 대화이지만, 여기에서 홍인선사가 도신선사와 마찬가지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를 법요로 삼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동산법문은 당시 선학에 있어 중국 최고의 평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인선사의 제자는 1000명을 넘었으며, 그 가운데 신수(神秀), 혜능(慧能), 지선(智詵), 혜안(慧安), 법여(法如), 지덕(智德), 의방(義方) 등 유명한 10대 제자가 있다. 그들은 각 지방의 방주가 되어 동산법문을 천하에 널리 펼쳤으며, 더 나아가 국외까지 전파하여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데 신수대사는 장안(長安), 낙양(洛陽)에서 전법하여 3대의 황제가 귀의 하였으므로 '양경법주(兩京法主), 삼제국사(三帝國師)'라고 한다. 이러한 신수대사의 선법을 북종선(北宗禪)이라 칭하며 신수대사의 제자 보적(普寂) 등은 양경에서 북종선을 널리 펼쳤다.

한편 또 다른 유명한 제자 혜능은 홍인으로부터 득법 후, 10여 년 간 은거하여 살다가 후에 남방의 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역시 동산법문에 바탕을 둔 선법을 펼치니, 이를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한다. 남종선은 '직지인심(直指人心), 돈오성불(頓悟成佛)'의 기치를 세워 이후 본격적인 조사선을 전개하여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온다.

황매동산 주봉인 백련봉에 조성돼 있는 오조탑.

그리고 홍인선사 문하에서 눈 여겨 볼 제자는 지선(智詵)이다. 지선은 다시 처적(處寂)에게 전하고, 처적은 무상(無相)에게 전하였는데, 무상은 신라 출신으로, 검남(劍南)의 정중종(淨衆宗)을 창립하여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선 계열을 후대에 이른바 여래선(如來禪)이라고 칭한다. 또한 홍인선사 제자 가운데 선습(宣什)은 염불종(念佛宗), 혹은 남산염불문(南山念佛門)을 창립했는데 문하에 잘 알려진 제자들은 전하지 않는다.

중국 선종의 본향
1000여년이 넘는 사원 오조사에서 역사 고적을 통하여 개산주인 오조 홍인선사가 홍법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혜능, 신수 두 선사 및 여러 고승들이 오조사에서 생활, 수행하는 모습이 시공을 초월해 눈앞에 현전한다. 홍인선사는 위로는 달마의 법맥을 잇고 도신선사의 농선병작(農禪幷作)인 산림불교 전통을 계승하며 널리 '동산법문'을 열었다.

아래로는 혜능, 신수, 지선, 선습 등에게 전법하여 선법을 중국 넘어 세계로 확대 계승시킨다. 선종의 역사는 신수의 북종선, 혜능의 남종선, 지선의 여래선, 선습의 염불종 등을 통해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선종의 종파가 도신-홍인 문하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따라서 도신-홍인선사의 '동산법문'은 중국선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사조사와 오조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조고사(五祖故事)

가) 비로전(毗盧殿)은 당 대중(大中) 연간(847~859)에 건축된다. 이 전당은 후에 마성현(麻城縣)의 선남신녀들이 돈과 힘을 모아 지은 것 이여서 마성전(麻城殿)이라고도 한다. 마성현은 옛날에는 교통이 불편한 첩첩 산중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신남신녀들은 자기 고을에서 직접 만든 벽돌과 기와를 한장 한장을 200여리 밖 동산(東山) 오조사 까지 가지고 온다. 이 광경을 본 황매현(黃梅縣)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여 이 전당을 마성전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중수하여 비로전으로 개명하였다.

나) 오조의 전생은 파액산(破額山) 중덕재송도인(中德栽松道人)이다. 어느 날 재송도인은 사조의 명성을 듣고 선법을 들으려 왔다. 사조는 그에게 " 당신은 너무 늙었으니 득법을 하더라도 내 제자가 되어 홍법할 시간이 없구나그러니 내생에 다시 오시오!" 하고 훗날을 기약 한다. 그리하여 재송도인은 주씨 성의 처녀 몸을 빌려 환생한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 거지가 되어 걸식하다 혼자 아기를 낳는다.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하루는 우연히 법석에서 도신선사를 만났다. 아이 모친은 도신의 법문에 감동하여 아이를 도신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도신은 아이가 너무 어린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 때 꼬마가 도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 언제는 늙어서 안 된다 하고 지금은 어려서 안 된다고 하니 언제 그 법을 나에게 전할 것이요!" 이 말에 도신선사는 아이가 법기임을 알고 제자로 받아 들인다. 사조는 그에게 홍인(弘忍)이라는 법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