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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3>안휘성 천주산 삼조사

'신심명' 저술한 승찬선사의 조사선 선취 가득
 


삼조사 산문. 안으로 사찰이 보인다.


"어느 선원이 제일인가? 이곳이 남방에서 으뜸이로구나!(林誰第一, 此地冠南州)"

여기에서 말하는 '제일선원'은 대별산(大別山) 동남쪽, 안휘성(安徽省) 잠산(山) 현성 서북 9km 떨어진 봉형산(鳳形山) 위에 있는 삼조선사(三祖禪寺)를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대부분 환백(晥伯)이 차지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산은 환산이라 하고, 강물은 환수라고 한다. 지금의 안휘성을 약칭하여 '환'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 근원한 것이다.

서한(西漢) 원봉(元封) 5년(B.C.106) 무제(武帝)가 남방을 순행한다. 그 때 산세의 수려함을 보고 봉형산 동쪽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의 천주산(天柱山)을 남악(南嶽)이라 봉하였다. 이후 한(漢) 선제(宣帝), 남송(南宋) 효무제(孝武帝), 명(明) 성조(成祖) 등이 남악 천주산에서 천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상세하게 전한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은 예로부터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사원의 역사

삼조사는 원래 남북조 시기 보지(寶志)화상이 창립하였으며, 그때 양무제가 산곡사(山谷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 당시 보지스님이 전국 각지로 행각할 때, 이곳 천주산으로 오게 되었다.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펼까 생각한다. 마침 백학도인(白道人)도 강남을 주유하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도관(道觀)을 짓고 전도할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교세를 펴기 위하여 다투게 되었는데, 양무제가 보지화상의 손을 들어준다. 이때부터 동굴에서 수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때 은거하던 하구(何求), 하점(何点), 하윤(何胤) 삼형제가 이를 알고 보지화상에게 자기의 집과 땅을 보시하여 절을 세우게 되고, '보리암(菩提庵)'이라 칭하였다. 보리암은 무성한 삼림과 대나무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였지만, 보지화상의 깊은 수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아왔다. 나날이 참배객이 늘어나고 근방을 넘어서 먼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명성이 사해에 널리 퍼졌다. 보리달마도 남경에서 양무제와 의기투합이 되지 않아 북상할 때 보리암을 참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곳의 가파른 절벽에 관음각(觀音閣)을 조성했는데, 지금은 달마애(達摩崖)라고 한다.

주(周) 무제(武帝)의 폐불(廢佛)시기에 혜가는 달마선법을 보존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수행처를 옮기면서 삼조 승찬을 만나 함께 사공산(司空山)에 머물렀다. 승찬은 수(隋) 개황(開皇) 2년(583)에 혜가의 의발을 전수받고 사공산과 천주산을 오가며, 이름을 숨기고 수십 년 동안 산과 들에서 수행과 교화를 하였다. 무제가 죽은 이후 선제(宣帝), 정제(靜帝)가 즉위하면서 폐불이 중지되었고, 다시 불교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승찬선사는 개황 10년(590)에 정식으로 산곡사에 주석하여 <신심명(信心銘)>을 저술하고, 본격적으로 선법을 펼쳤다.

승찬선사는 인수(仁壽) 원년(601)에 의발을 도신(道信)에게 전하고, 곧바로 광동 라부산(羅浮山)에 갔다가 2년 후 산곡사로 돌아왔다. 수(隋)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606) 10월15일 대중에게 설법을 마친 뒤, 합장하고 선 채로 입적하는 기연을 보인다.

삼조의 법신은 절 뒤에 매장하였는데, 당(唐) 현종(玄宗) 천보(天寶) 4년(745)에 사리(舍利) 300과를 수습하고, 그 가운데 100과를 승찬상(僧璨像)을 세워 모셨으나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동시에 탑도 세워 대중들로 하여금 참배케 하였다.

후에 당(唐) 숙종(肅宗)은 '삼조산곡건원선사(三祖山谷乾元禪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당 대종(代宗) 또한 삼조 승찬의 시호(諡號)를 '감지선사(鑒智禪師)'라고 하고, 사리탑을 '각적탑(覺寂塔)'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삼조사의 뛰어난 풍광과 명성은 유명한 문인과 시인들의 발걸음을 끊이지 않게 하였다.

북송(北宋)시기에는 임포(林逋),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이공린(李公麟), 육재(宰) 등이 절을 찾아 빼어난 시를 남긴다. 어떤 이는 또 삼조사에서 불법을 배우며 수행하였고, 늙어서는 이곳에서 살다가 죽기를 서원하였다. 송말까지 대웅전의 향불이 끊어진 날이 없었고, 종풍을 사해에 떨쳤다.

그러나 남송 말기에 잦은 전란으로 천고의 사찰이 훼손되고 삼조 승찬의 탑만 겨우 보존되었다. 명대(明代)에 다시 중흥하였지만, 말기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가 반복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문화대혁명 시기에 철저히 훼손되었다. 홍위병(紅衛兵)들이 사찰에 침입하여 탑을 훼손하는 것이 실패하자 탑감(塔龕)에 보존되어 있던 삼조 승찬의 사리와 불상, 경서, 법기(法器) 등을 모조리 불태웠다.

사원 현황

봉형산(鳳形山)은 봉우리가 빼어나고 주위는 울창하며 동서쪽으로 산등선이 이어지고 산맥은 남쪽으로 뻗었다. 산세는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 삼조사를 둘러싸고 외호(外護)한다. 삼조사 산 서쪽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샘물은 맑고 투명하며 감미롭고 청량하다. 샘물의 맑은 소리는 마치 옥이 부딪치는 것 같은 화음을 만들며 남쪽 입구의 강물과 합류한다. 산 입구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맑고 잔잔하며 반짝거린다. 청산과 탑의 그림자가 비칠 때면 청산, 절과 강물은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출한다.

삼조사의 건축들은 봉형산 산세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세워져 있다. 산기슭 평지에는 새로 만든 방생지(放生池)가 있는데, 한백옥(漢白玉)으로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산문전(山門殿)에서 천왕전(天王殿)으로 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를 하늘과 통하는 계단이라는 뜻으로 '통천계(通天階)'라고 칭한다. 돌계단은 이 산에서 출토되는 화강암을 가늘고 길게 깎아서 서로 겹쳐 만들었다. 통천계 양측에는 주위에 어울리게 층계식 화단이 자리한다. 이 화단에는 사계절 내내 꽃을 심어 항상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오를 수 있다.

통천계에 올라서면 천왕전이 정면에 보인다. '육각무량전(六角無梁殿)'이라고도 하고, 뒤편이 대웅전이다.

대웅보전 뒤에 삼조동(三祖洞)이 있고, 동굴에는 삼조의 석상이 있다. 측면에 있는 해박석(解縛石)은 삼조 승찬이 사조(四祖) 도신(道信)에게 전법한 곳이라고 한다.

당시 도신이 처음 삼조를 참배하며 청하기를 "원컨대 스님께서 자비심으로 저를 이 무거운 속박에서 풀어주소서"라고 하자 삼조가 "누가 그대를 속박하는가?"라고 물었다. 도신이 "누구도 나를 속박하진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삼조는 "누구도 그대를 속박하지 않는데, 나는 당신을 위하여 어떤 속박을 풀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자 도신이 듣고 즉시 깨달으니, 삼조는 도신이 큰 그릇인 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아 수년 간 동행하다 의발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전각 측면의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돌로 이루어진 입화탑(立化塔)이 있는데, 승찬이 대중들에게 설법한 후 열반한 곳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탑은 건립연대가 분명하지 않지만 탑의 모양으로 볼 때 원나라 시기로 추정한다.

삼고정(三高亭)은 보지화상에게 자기 집과 땅을 내어 절을 짓게 해준 하씨 삼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외에 아름다운 전설이 담긴 탁석정(卓錫井), 승곡문전(升谷文錢), 마위천(磨圍泉) 등의 유적이 있다.


삼조 승찬선사 사리탑인 각적탑(覺寂塔).


천불전 북쪽에 위치한 삼조 사리탑은 '각적(覺寂)'이라고 칭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삼조탑'이라 불린다. 이 탑은 당 현종(玄宗) 천보 4년(745) 서주(舒州)의 별가(別駕) 이상(李常)이 보시하여 세운 것이고, 대종(代宗)이 대력(大曆) 7년(772)에 '각적탑'이라는 탑호를 하사하였다. 탑의 높이는 30여m이고 돌로 만들어진 1000개의 불상이 벽면을 장엄하고 있다.

탑 1층에는 원래 이상이 조성한 승찬 사리소상이 있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어 지금은 새로 조성한 삼조 승찬상이 모셔져 있다. 사지(寺誌)에는 탑에 이끼가 끼지 않고 새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매년 용이 내려와 탑을 씻어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탑 뒤편에는 조사전이 있는데 위층은 장경각(藏經閣)이다. 조사전에는 달마, 혜가, 승찬 삼조사가 모셔져 있다. 동편 뒤쪽에는 보지화상이 어깨에 석장(錫杖)을 메고 서 있다. 지금의 삼조사는 아미타불을 염하는 불칠(佛七)법회가 매년 봉행되는 염불도량이다.

승찬선사와 그의 선사상

승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아주 적다. <전법보기(傳法寶紀)>에 "북주 무제의 폐불 시기에 선사는 10여 년간 심산유곡으로 행각하였고, 수나라 개황 초기에는 환공산(公山)에서 은거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도신에게 전법 후, 광동 나부산(羅浮山)으로 내려갔다가 2년 후 천주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승찬선사의 진영.


당나라 독고급(獨孤及)이 쓴 탑명(塔銘)에서도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고, 주(周)나라와 수(隋)나라 사이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만 쓰여 있다. 이는 당시 이들이 그 시대를 이끄는 불교의 주류 종파가 아니어서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관계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승찬이 남긴 것은 단지 <신심명(信心銘)> 한권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신심명>은 146구절, 매 구의 4글자, 총 548글자 밖에 안 된다. 그러나 각 글자마다 무게가 있고 구절마다 여운이 있으며 힘차다. 후대의 백장회해(百丈懷海)는 <신심명>의 "일여(一如)는 그 바탕이 현묘(玄妙)하여, 연(緣)을 잊고 홀로 우뚝하니, 만법(萬法)을 가지런하게 관(觀)하면, 자연(自然)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조주종심(趙州從)도 "지극한 도(道)는 어려움이 없는 것인데, 오직 고르고 분별함을 꺼린다", "터럭만한 차이라도 있다면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등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다. 이들만이 아니라 역대의 수많은 선사들이 <신심명>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후대 조사선(祖師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신심명>의 사상적 핵심은 달마가 혜가에게 전수한 <능가경> 가운데 보이는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과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다시 진일보하여 "놓아버림은 스스로 그러함으로 체(體)가 갈 곳이 없다. 성(性)에 따름이 도에 맞으니, 소요(逍遙)하여 번뇌를 끊음이다"라고 한다. 이는 불교의 만법일여(萬法一如)와 분등선(分燈禪)에서 나타나는 노장(老莊)의 자연무위(自然無爲), 임성소요(任性逍遙)의 사상적 경향을 상당히 함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신심명>에서는 학인이 도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분별심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평등무이(平等無二)의 마음으로 일체의 차별이 없어야 하며, 만법을 하나로 보아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야만 확연히 드러난다고 갈파한다.

따라서 <신심명>은 먼저 깨닫고 난 뒤에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를 제창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달마의 이입사행(理入四行)에 입각한 것으로, 만일 이입이 없다면 정수(修)는 무익한 것이라고 하여 "현지(玄旨)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염정(念靜)에 힘쓴다"라고 지적한다.

<신심명>에서는 "급히 상응(相應)해야 한다면, 오직 불이(不二)를 말할 뿐이다"라고 하여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승찬이 강조하는 것은 진여(眞如)와 법계(法界)가 둘이 아니고, 일념(一念)과 만념(萬念)이 둘이 아니며, 시방세계(十方世界)와 눈앞의 경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와 일체가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신심명>에서는 "하나의 공(空)은 둘과 같은 것으로, 만상(萬象)을 모두 포함한다. 마음이 다름이 없다면 만법은 일여(一如)하다. 진여(眞如)의 법계(法界)는 나와 남이 없다. 일(一)은 바로 일체(一切)이고, 일체(一切)는 바로 일(一)이다" 등의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다.

달마-혜가로 이어지는 심성본정(心性本淨)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여(一如)로 수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라서 <신심명>에서는 "믿음(信)과 마음(心)은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님이 신심(信心)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 오고 감이 아니다"라고 하여 마치고 있다.


삼조사의 위치.


승찬은 <신심명>이라는 조사선의 선취(禪趣)가 가득 담긴 선사상을 남긴 것만이 아니라, 중국 선종 역사상 의미가 깊다. 위로부터는 보리달마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계승했고, 그 선법을 황권이 비호하는 북방 정학(定學)세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어려운 고행길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후에 도신에게 불법을 전수하여 선종의 종맥을 계승하게 하였다.

선종사상 체계 기초 세워

삼조 승찬은 역사 서적의 기록은 빈약하지만, 선종 형성의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고승이다. 그는 중국에 선종이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다른 종파와 분쟁을 이겨내고 계승 발전시켰다. 또한 선사는 <신심명>을 통하여 선종사상 체계의 형성에 단단한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삼조사가 지니고 있는 역사, 문화의 가치는 매우 풍부하고 그 풍광이 아름답다. 지금의 삼조사는 특히 총림(叢林)제도 아래 사부대중의 수행을 강조한다. 염불당(念佛堂)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고, 해마다 미타불칠안거(彌陀佛七安居)와 공수(共修)법회, 우란분(盂蘭盆)법회 등을 여법하게 봉행한다. 또한 삼조사는 대승보살도의 정신으로 자선기금(慈善基金), 교육기금(育基金) 등을 모연하여 중생포교와 구제에 앞장서고 있다.

삼조고사(三祖故事)

가) 양나라 천감(天鑒)연간, 보지(寶志)스님은 강남의 도교도사 백학(白鶴)도인과 동시에 천주산 산자락에 위치한 봉형산(鳳形山) 삼조사의 절터를 똑같이 마음에 들어 한다. 양무제(梁武帝)는 이 소문을 듣고 두 사람에게 서로 신통을 부려 이긴 자가 이 땅을 갖도록 하게 한다. 먼저 백학도인은 흰 부채를 백학으로 변하게 하여 봉형산에 날아가 땅을 짚고 서 있었다.

보지스님은 석장을 봉형산을 향해 들었다. 원래 백학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석장이 날아오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백학은 그 소리에 놀라 오른쪽 귀퉁이로 몸을 피했다. 그 때 석장이 먼저 백학이 앉은 자리에 깊게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결국 보지스님이 그 땅을 얻게 되어 삼조사의 도량이 된다.

나) 당 무종은 불교를 가혹할 정도로 억압하고 정책적으로 멸하고자 했다. 그 해 겨울에 폭설까지 내리니 폐허가 된 삼조사에 쌀 한 톨 먹을 것도 없었다. 어린 사미가 탁발을 나갔다가 너무 배고파서 길바닥에 쓰러졌다. 사미가 겨우 깨어났을 때 몸을 덮은 눈은 이미 다 녹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큰 바위에 구멍이 두 개 있는데 한 구멍에는 쌀이 들어 있고 다른 한 구멍에는 동전이 한 푼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 푼으로 삼조탑전에 촛불을 밝힐 수 있었고, 쌀은 딱 하루 식량이었다. 이 날부터 사미는 이 바위구멍을 의지하여 나날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미는 점점 바위구멍이 작아지는 것 같아서 하루는 그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바위구멍이 크면 쌀과 돈이 더 많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이튿날 그 바위구멍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 버리고 다시는 쌀과 돈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