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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1> 하남성 숭산 소림사

초조 보리달마가 9년간 면벽 참선한 전설로 유명


중국선종 초조인 보리달마가 갈대를 타고 장강(楊子江)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에 도착하여 9년간 면벽 좌선했다고 전하는 소림사의 입구 전경.


코로나19의 장기화로 해외 불교성지 순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시기에 부산 대원사 주지 법지스님이 풀어 내는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를 이번주부터 격주로 연재한다. 15여 년의 중국 유학을 통해 중국 선종사찰을 구석구석 답사한 법지스님은 남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학승이다. 중국 선종사찰 순례를 통해 불교신문 독자들이 중국선종의 진수를 음미하길 기대한다.

중국 사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소림사를 든다. 전설적이고 신비로운 ‘소림무술’로 유명세를 세계에 떨치고 있다.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에 위치 해 있다. 불교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500여 년 전,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서역의 고승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위하여 창건하였다. 소실산(少室山) 산림 속에 있어 소림사(少林寺)라 이름 하게 되었다.


초조 보리달마상.


선종(禪宗)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중국 건강(建康, 현재의 南京)에서 갈대를 타고 장강(長江, 楊子江)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에 도착하여 9년간 면벽 좌선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달마대사는 소림사에서 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면서 중국 선종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사원의 역사

북위 태화(太和) 19년(495), 효문제는 불타선사(佛陀禪師)를 모시기 위하여 숭산 소실산 북쪽기슭에 소림사를 창건하였다. 불타선사는 인도 고승으로 먼저 북위 도읍인 평성(平城, 현 山西省 大同)에 도착하니, 효문제가 높이 받들어 모셨다. 이후 북위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자 특별히 선사를 위하여 도성과 마주보는 숭산에 소림사를 세우기로 하였다. 불타선사는 절이 완공된 이후, “이 소림정사(少林精舍)는 각별하게 신령(神靈)의 지킴이 있으므로, 끝까지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각지의 사문들이, 명성을 듣고 모여든 자가 항상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북위 효명제(孝明帝) 효창(孝昌) 3년(527), 보리달마가 소림사에 도착하여 오유봉(五乳峰) 아래 ‘초조암(初祖庵)’에서 9년간 면벽(面壁)하였다. 북주(北周) 건덕(建德) 3년(574) 무제(武帝)가 폐불정책으로 소림사도 훼손되었다. 대상(大象) 2년(580) 정제(靜帝)가 조서를 내려 불교와 도교를 다시 흥성시켰다. 소림사는 중창하여 척호사(陟岵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隋) 개황(開皇) 연간(581∼600) 문제(文帝)가 소림사에 조서로 많은 땅을 하사하니, 소림사는 이로부터 많은 농지와 거대한 재산을 보유하게 된다. 당(唐) 무덕(武德) 2년(619), 수 장군 왕세충(王世充)이 낙양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하고, 국호를 ‘정(鄭)’이라 하였다. 그의 조카 왕인칙(王仁則)이 소림사가 속한 원주성(轅州城)을 점거하였다. 무덕 4년, 소림사 현종 등 13명의 스님이 왕인칙을 체포하고 원주성을 빼앗아 진왕 이세민(李世民)에게 귀순하였다.

‘3년 후, 당 태종에 즉위한 이세민은 사신을 특파하여 소림사에 고마움을 전하였다. 전쟁에 참가한 스님들은 모두 상을 받고, 현종은 대장군을 품수하였으며, 백곡오(柏谷塢) 지역의 농지를 소림사에 하사하였다. 물론 당시 소림사는 선학(禪學)의 중심도량이었다. 홍도(弘道) 원년(683), 달마선 계통의 법여(法如)선사가 소림사에서 교화하고, 6년 후 소림사에서 원적하였다. 그 때 유명한 선사 혜안, 영운, 동광 등이 소림사에서 정진하였다. 현장(玄)법사도 황제에게 소림사에서 역경(譯經)을 두 차례나 청하였지만,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신라 스님 혜소(慧昭)는 원화5년(810)에 소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수년간 습선(習禪)한 이후에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곡에 옥천사(玉泉寺, 현 雙溪寺)를 세우고 ‘진감(眞鑑)국사’ 칭호을 받았다.


소림사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탑림으로 당나라 이후 역대 고승 부도탑 230여 좌가 모셔져 있다.


원나라 때에도 걸출한 많은 스님이 배출되었다.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하나인 조동종(曹洞宗) 복유(福裕)선사가 소림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이때부터 소림사가 100여 년간 선종 중심으로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 농민봉기 때 홍건군(紅巾軍)이 소림사에 난입해 또 한 번 스님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명나라 때 소림사 대중은 다시 800명이 넘었다. 황제의 아들 여덟 명이 전후로 소림사에 출가하였다. 수차례 황명으로 중창하니 규모 또한 대단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도 소림사를 중시하였다. 옹정(擁正) 13년(1735), 황제가 친히 사원의 조감도를 보고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일주문을 중창하고 천불전을 모셨다. 건륭(乾隆) 15년(1750), 건륭은 친히 소림사에 가서 방장실에 머물고 시를 쓰고 비석을 세웠다.

중화민국 때, 재앙이 소림사에 또 미치게 되었다. 1928년, 국민당 정부의 석우삼(石友三)이 군대를 이끌고 불을 질러 천왕전, 대웅전, 법당, 종루 등을 모두 훼손하였다. 수 많은 진귀한 서재, 사지(寺誌), 권보(拳譜) 등은 잿더미로 변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이르러 복원되기 시작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원의 현황

소림사 건축은 산세와 어우러져 기운차고 도량이 장엄하다. 현 사원은 상주원, 초조암, 이조암, 탑림 등 몇 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상주원 건물은 북쪽에 자리 잡고 남쪽을 향하는 대칭이다. 산문,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 방장실, 달마정(達摩亭), 천불전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양쪽으로 종루, 선당, 승원, 백의전(白衣殿), 지장전 등이 있다.

산문은 소림사 정문이다. 청나라 옹정 13년(1735)에 중건하고, 1974년에 개축하였다. 정문 앞 양측에 한 쌍의 청석(靑石)사자가 우뚝 솟아 있다. 정문 위에는 장방형의 검은 바탕 편액에 가로로 ‘소림사’가 새겨져 있고, 한가운데는 ‘강희어필지보(康熙御之寶)’ 여섯 글자와 옥새가 새겨져 있어 강희황제 친필임을 알 수 있다. 정문 앞에는 오랜 측백나무 숲이 있어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고 맑게 해준다.

천왕전은 원래 소림사 정문으로 ‘천하제일 조정(天下第一祖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은 가로 다섯 칸, 세로 네 칸이고, 지붕은 녹색유리로 된 기와가 올려져 있다. 종루는 대웅보전 정면 동측에 4층으로 되어 있고, 웅장하며 위세가 넘친다. 종루 밖에 “소산선사행실비(小山禪師行實碑)”와 당 현종이 세운 ‘태종문황제어서비(太宗文皇帝御書碑)’라는 비석이 있는데, 모두 소림사를 지키는 보물이다. 종루 북쪽 앞에는 건륭황제가 지었다는 ‘어서비(御書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루(鼓樓)는 종루와 서로 대칭되게 4층으로 되어 있다. 천불전 내의 벽돌바닥에는 2줄로 깊이가 20cm 되는 발자국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소림사 스님들이 기마자세(騎馬姿勢)로 무예를 닦을 때 밟아서 생긴 흔적이라고 한다.

소림사 선원은 1500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상주원 동북쪽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선원은 방장 영신스님이 중창하여 30여 대중이 동시에 정진할 수 있다. 초조암(初祖庵)은 선종의 초조 달마를 기념하기 위하여 송대(宋代)에 세운 암자다. 소림사 서북 쪽 2km에 위치하고 오유봉(五乳峰)을 등지고 있다.

소림사 탑림(塔林)도 유명하다. 절 서편에 위치하고 당나라이후 역대 고승 부도탑 230여 좌가 있다. 중국 최대 탑림으로 당나라 탑 2좌, 송나라 탑 2좌, 금나라 탑 10좌, 원나라 탑 46좌, 명나라 탑 148좌, 나머지는 청나라 탑 혹은 시대가 분명하지 않은 탑들이다. 중국 고대 벽돌건축물과 조각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보물창고다.

달마대사와 그의 선사상

보리달마(菩提達磨; ?~ 536) 대사는 남천축인도 바라문족으로 향지왕(香至王) 셋째 아들이다. 대승불법을 통달하고, 출가 후 반야다라(般若多羅) 대사를 스승으로 섬겼다. 남조(南朝) 양나라 때 인도에서 배를 타고 광주(廣州)로 왔다고 전해진다. 보리달마 관련 전설은 다양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양무제(梁武帝)와의 문답이다. 양무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남경까지 모셔 온 달마 대사에게 “짐(朕)은 황제가 되고 나서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역경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켰습니다. 이러한 나의 공덕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달마대사는 “아무런 공덕이 없소이다”라고 답하였다. 무제가 “어째서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대사는 “이것들은 단지 인간계와 천상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유루법(有漏法)의 인과(因果)에 불가합니다. 몸을 따르는 그림자 같이 설사 공덕이 있더라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다시 “어떤 것이 참된 공덕입니까?”라고 묻자, 대사는 “깨끗하고 맑으며 지혜롭고 원묘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또한 묻기를, “지금 짐의 말에 대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대사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이러한 문답에서 참다운 종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달마는 무제와 마음이 계합하지 않음을 알고, 장강을 건너 북상하여 북위에 도착하였다는 유명한 전설이다.

달마의 대승선관(大乘禪觀)은 후기불교의 하나이다. 소승불교가 개인 수행과 해탈에 주력하는데 비해, 이타구제의 입장에서 인간 전체의 평등과 성불을 이상으로 삼는다. 달마 이전의 중국불교는 수행 방면에서 이른바 ‘선수학(禪數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선수학’이란 바로 ‘수식관(數息觀)’과 ‘사념처(四念處)’를 중심으로 선정(禪定)을 통해 마음의 해탈을 강조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불로장생’과 ‘신통’ 등을 추구하는 도교의 양생술(養生術)이 유행하였는데, 선수학은 그와 상당히 유사했기에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북조(南北朝)시기에 들어 북위에서는 이러한 선수학이 ‘정학(定學)’으로 발전하는데, 불타선사가 ‘정학’의 대가였으며 효문제가 그를 위하여 소림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후 달마가 들어와 대승선법을 펼치자 정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심지어는 성도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두타행(頭陀行)’만 하였다. 하지만 결국 달마계통 선법이 불교계를 장악하고, 이후 소림사는 달마대사 본향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달마 선법을 ‘남천축일승종(南天竺一乘宗)’, ‘달마선(達磨禪)’이라고도 하고, ‘대승벽관(大乘壁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달마의 선사상은 <보리달마대사약변대승입도사행관(菩提達磨大師略辨大乘入道四行觀)>에서 다음과 설하고 있다.

“입도(入道)에는 여러 경로가 있지만, 핵심을 말하자면, 두 가지를 넘지 않는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둘은 행입(行入)이다. ‘이입’이란 자교오종(藉敎悟宗)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에 동일한 진성(眞性)이 있지만, 객진(客塵)이 허망하게 가리고 있어 나타나지 못함을 깊게 믿음이다. 만약 허망함을 버리고 참다움에 돌아와, 벽관에 머문다면, 자타가 없고, 범성이 하나로 같으며, 견고하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언교(言敎)에 따르지 않게 되고, 이것이 바로 도(道)와 명부(冥符)하여, 분별이 없고, 적연(寂然)하여 무위하게 되니, 이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행입이란 사행(四行)을 이르는 것으로, 그 나머지의 제행이 모두 이 속으로 포섭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보원행(報怨行)이고,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며,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고, 넷째는 칭법행(稱法行)이다.”

이로부터 달마선의 핵심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바로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입’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의 두 가지를 말한다. 먼저 ‘이입’은 경전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음을 천명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경전은 <능가경(楞伽經)>으로 달마선을 ‘능가종(楞伽宗)’이라고도 칭한다. <능가경>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음을 강조하는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바로 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입’을 ‘안심(安心)’으로 설명하는데, “안심이란 벽관(壁觀)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벽을 관하라는 말은 일종의 비유이다. 선을 닦을 때, 마음이 장벽처럼 움직임이 없어야 하고 집착을 버려한다는 뜻이다.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체득하여 참된 도리를 깨달으면, 내 마음과 진리는 그윽이 상응한다는 것이다. ‘벽관’은 달마선의 요지라고도 할 수 있다.

다음은 행입(行入)으로 인용문에서 말하는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 4가지이다. 그 가운데 ‘보원행’은 도를 닦는 자가 고달픔을 견디고,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원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받은 고난은 전생에 악행을 행하였으므로 응당한 과보를 받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인과응보의 윤회(輪回)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반드시 묵묵히 고통을 참고 수행하여 마음과 도가 부합되도록 해야 한다. ‘수연행’은 고락을 인연에 맡기고 그 어떤 영욕(榮辱)과 득실(得失)에 개의치 아니해야 한다. 마음은 항상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 왜냐면 금생의 길흉화복은 모두 전생에서 심은 선행(先行)의 결과이다.

인연이 다하면 모두 무로 돌아가는데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하겠는가? 고락을 인연에 맡기고 마음이 고요해야만 깊이 도에 계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소구행’은 탐욕을 끊고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동쪽을 보면서 다시 동쪽을 찾는 것이니, 생각이 일어난 순간 도(道)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행은 모든 중생이 실존에 있어 고(苦), 락(樂), 사(捨)에 초연해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불교 논리 가운데 하나의 원칙이며, 불교에서 제시하는 기본 방향이다. ‘칭법행’은 성정(性淨)의 도리에 계합함을 말한다. ‘성정’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가리킨다. 도를 행할 때 매사 진실과 상응하고, 수행을 방편에 맡기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방편은 집착하지 않음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진실과 상응하는 것은 법과 상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칭법행’이라 말한다. 칭법행 또한 ‘이입’과 종지는 같지만 굳이 구분한다면, ‘이입’은 선을 닦을 참다운 ‘도리’를 아는 것이고, ‘칭법행’은 부딪치는 모든 일을 ‘도리’에 부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달마선사의 ‘이입사행’ 가운데 ‘이입’은 여래장(如來藏)의 ‘자성청정심’에 근거하고, ‘행입’은 반야공관(般若空觀)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소림사 위치.


달마의 여래장과 반야공관을 융합한 이론과 실천의 선법은 후대 조사들이 제창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의 선범(先範)이며, 중국선 발전에 다방면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달마가 제시한 ‘자교오종’은 교를 방편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는 수행실천법이다. 이것은 후세에 ‘종문(宗門)’과 ‘교문(敎門)’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후대 선종의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종풍과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입’과 ‘행입’은 불성(佛性) ‘유(有)’와 반야(般若)의 ‘공(空)’을 결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공’과 ‘유’의 이론적 융합은 전체 선종(禪宗)의 기본적인 사상적 특징을 확립하였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달마선이 갖고 있는 사상사적 중요성이다.

석가모니 묘리 중국에 전해

달마는 인도로부터 불조 석가모니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도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묘리(妙理)를 중국에 전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선종의 찬란한 황금기를 열어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금 숭산 소림사는 중국 선종의 본사로 천고 이래로 불자들 마음 속의 성지(聖地)이다. 우수한 전통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여 세계 속의 소림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중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도량으로 더욱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소림고사

가) 북위(北魏) 송운(宋云)은 유명한 사신이다. 특별한 임무로 서역에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총령(蔥嶺)에서 달마를 만난다. 그 때 달마는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걸고 서역으로 돌아가는 길 이었다. 그 때 그는 초조달마선사가 원적한지 모르고 질문하였다.

송운: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달마: 서천으로 돌아가는 길이요!

송운은 경성으로 돌아와 이 일을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이상하게 여겨 달마의 관을 열어보았더니 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지금 달마의 탑은 하남성 웅이산(熊耳山) 공상사(空相寺)에 있다.

나)초조달마가 처음 숭산(嵩山)에 왔을 때는 소림굴에서 오직 정좌하여 면벽정진만 하였다. 달마는 처음 3년은 원력대로 정진을 성취했다. 그 후 점점 자기도 모르게 혼침에 빠지곤 했다. 어느날 혼침에서 깨어난 후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눈꺼풀을 뽑아 땅에 버리면서 까지 용맹정진을 하였다.

후에 버려진 눈꺼풀은 놀랍게도 한 그루 나무로 자라난 것이 아닌가! 그 후 5년 동안 맑은 정신으로 수행에 전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혼침(昏沉)로 면벽이 어려웠다. 우연히 옆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었더니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문득 9년 선정(禪定)의 원력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달마가 먹었던 그 나뭇잎이 후세들이 마시는 녹차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