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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영주 흑석사

무상보리 서원 … 연말되면 더 그리워지는 의지처


영주 흑석사 아미타여래좌상. 세조 때 조선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국보로 극락전에 봉안돼 있다.


세모(歲暮)가 가까워지면 부모님이 그립고, 고향 땅과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렸던 그 절, 어릴 때 뛰어 놀았던 영주 흑석사(黑石寺)가 그리워진다. 중국 옛 시에 “북쪽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몸을 의지하고, 남쪽 월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고 했다. 동물도 이러할진데 사람이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영주 흑석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이후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절골’이란 지명만 남아 있었다. 필자는 절이 폐사된 내력을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도저히 살수 없어 스님들이 떠나 폐사가 되고 말았다. 절을 떠났던 스님이 다시 절을 찾아 산 고개에서 바라보니 법당에 끄덕끄덕 졸며 참선하는 스님이 있기에 이젠 빈대가 사라졌나보다 하고 반갑게 법당에 들어서자 뭉쳐져 있던 수많은 빈대들이 스님을 덮쳐 스님은 빈대의 밥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피를 빨아먹는 빈대는 남을 괴롭히거나 갈취하는 악인을 빗대는데 조선의 조정과 유생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해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주 흑석사 전경. 건물로는 극락전과 약사전, 설선당, 종각, 환희전 등이 있다.


일곱송이 꽃으로 맺어진 7남매 인연

이 절골에 흑석사가 다시 지어진 것은 해방이 되면서다. 소백산 초암(草庵)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당시 초암에 스님과 공양주 보살로 머물렀던 부모님은 초암당 상호스님에게 ‘고향 절골에 돌부처님이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고, 초암당 스님은 급히 절골에 ‘순흥초암 흑석교당’을 지으셨다. 이때 산등성이 하나 넘어있는 샘골의 외할아버지는 법당을 짓는 불사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버지는 1945년 당시 21살로 초암당 스님의 맏 상좌(上佐)로 초암에서 아미타부처님을 업고 50리 길을 걸어 ‘흑석교당’에 모셨다. 이듬해 아버지는 환속하여 이곳에서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렸다.

필자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부모님의 혼인(婚姻) 고유문(告由文)에서 초암당 스님은 “위없는 도를 구하길 원하오며, 일곱송이 꽃을 헌공(獻供)하며 엎드려 청하오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증명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아뢰었다. 또 선서문(宣誓文)에서 부모님은 “부부는 이 몸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고 항상 마음을 닦아 무상보리를 구하려 합니다. 삼보자존(三寶慈尊)에 삼가 맹서합니다”라고 아미타부처님께 맹세하였다. 부모님이 바친 일곱송이 꽃이 인연이 되어 필자를 포함한 7명의 자식들은 흑석사 아미타부처님을 태어날 때부터 우러러 받들고 찬탄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효령대군 발원…국보 목조아미타불

이렇듯 필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흑석사는 이름 없는 작은 절이지만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사찰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 아미타부처님은 세조 4년(1458) 조선 왕실에서 발원하여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에 모셔졌던 부처님이다. 세종의 형인 불심 깊은 효령대군과 명빈 김씨, 의빈 권씨, 법명이 묘화(妙和)인 정의공주와 요공(了空)인 연창위 안맹담 부부 등이 발원하였다. 또 궁중 도화서(圖畵署) 소속 이중손 등이 아미타불 조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형상불이 탄생하였다.

두상은 아주 뾰족한 나발(螺髮)에 육계 가운데 신비로운 계주와 높은 정상계주(頂上珠)가 특이하다. 특히 불쑥 솟은 정상계주 무견정상(無見頂相)에서 나오는 광명은 뻗어나가 중생들을 모아서 다시 정수리로 들어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기 때문에 광취불정(光聚佛頂)이라 한다. 갸름한 얼굴에 얇고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간 눈매, 오뚝한 콧날, 작은 입술, 어깨까지 내려온 귀 등 갸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길고 날씬한 손가락에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은 배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높이 72㎝, 어깨 너비 29cm, 무릎너비 50㎝로 결가부좌한 신체는 안정감을 준다. 법의(法衣)는 통견식(通肩式)이며, 아담한 체구는 균형이 잡혀 있다.

국태민안·법륜상전 발원문 감동


복장에서 발견된 아미타삼존 조성 발원문.


아마타부처님의 복장(腹藏)에서는 <아미타삼존복장기>와 <법천사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장수멸죄호제동자타라니경>, <백지묵서 불조삼경합부>, <감지은니묘법연화경>, <백지금니묘법연화경변상도>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 두루마리 복장기 조성 발원문에는 “무릇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 스승이시고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보살의 근본이며, 지장보살님은 고해 중생의 근본 스승입니다. 이런 연유로 삼존은 다른 부처님과 견줄 수 없는 분으로 본래 형상을 공경히 조성하여 원하옵건대 세세생생 삼악도를 영원히 떠나길 받들어 기원합니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부처님의 광명은 더욱 빛나고 법의수레바퀴 더욱 구르길 발원합니다”라는 간절함으로 감동을 준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흑석사에 삼존불을 훔치러 왔다. “어느 것이 돈이 될까?” 삼존불을 들어보니 중앙의 아미타부처님은 목불이라 가벼워서 그냥 두고 청동으로 주조된 관음, 세지보살만 자루에 담아 훔쳐 간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초암당 스님은 법당 문을 걸어 잠가, 신도들은 절에 오지 말라는 것이냐며 항의하였으나 스님은 “신도가 다 떠나도 좋으니 나는 부처님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해 많은 신도들이 의아해 했다. 스님은 아미타불복장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보 아미타부처님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자안지장(子安地)보살 석굴과 호랑이.


아기 안고 있는 굴속 ‘자안지장’

흑석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모신 보물 약사여래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 필자가 외가에서 절에 오면서 산등성이에서 제일 먼저 합장 예경한 부처님으로 당시에는 호분을 발라 흰색의 부처님이었다. 이 석불은 종각 옆에 반쯤 묻힌 상태로 계셨는데 법당을 짓고 나서 이산면 모든 장정들이 목도로 들어 올려 마애불 앞에 모셨다.


초암 상호대종사 부도비.


흑석사에는 굴을 파고 모신 ‘자안지장(子安地)’이라 불리는 아이를 안고 있는 지장보살님도 계신다. 갓난아기나 태아 영가의 천도를 위해 지장보살님이 오른손에는 석장을 짚고 왼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인데 일본에서 조성하여 배로 부산을 거쳐 모셨다. 또 굴 위에는 대구의 불모 원경스님께서 조각한 시멘트 호랑이는 덩굴 속에 살아 있는 듯 정교하여 어릴 땐 진짜 호랑이로 생각하여 놀라기도 했다.

초암당 스님이 환속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태(胎)에 넣어 주질 않았다면, 필자는 어느 생을 기약하여 인간의 모습을 받고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 부처님과 초암당 스님,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어 꽃을 올려 오직 은혜를 깊이 생각할 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