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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2> 안휘성 사공산 이조사

"마음, 부처, 법은 차별 없으니, 그대는 알겠는가?"


안휘성(安徽省) 악서현(岳西縣)에 위치한 사공산(司空山)의 전경.


삼상(三湘)의 일곱 호수를 뛰어 넘어(躍過三湘七澤中)// 두 어깨에 달을 지고 사공산(司空山)에 오르니(兩肩擔月上司空)// 납의가 해지면 구름으로 꿰매고(禪衣破處裁雲補)// 얼음 만두와 눈으로 주린 배를 달래리(冷饅飢時嚼雪充).

이 시는 선종 이조(二祖) 혜가(惠可)대사가 지은 것으로, 당시 스님이 종파논쟁을 피하여 숭산(嵩山)에서 남하하여 사공산(司空山)에 은거하여 수행하는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초조 달마는 인도로부터 먼저 광주(廣州)를 거쳐 남경(南京)에 도착하였다. 남경은 양(梁)의 수도였으며, 무제(武帝)가 황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무제와 서로 인연이 맞지 않아 바로 북상하여 숭산(嵩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혜가를 만나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이로부터 혜가는 선종 '이조'로 칭해진다. 혜가는 제자 승찬(僧璨) 등과 같이 사공산에 은거하면서 정진하였는데, 불교 내부의 종파논쟁과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폐불(廢佛)을 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사공산은 선종 이조의 도량이 되었다.

사원의 역사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폐불(廢佛)을 단행(577)하자 선종도 갑자기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종 2조 혜가는 달마가 전수한 <능가경(楞伽經)>과 가사를 가지고 사공산 아래 앙천와(仰天窩)에서 종적을 감추고 수행만 하였고, 이때 혜가는 삼조인 승찬(僧璨)을 만나게 된다.


이조 혜가의 진영.


<조당집(祖堂集)>의 기록에 의하면, 북제(北齊) 천보(天保) 초년(550)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마흔이 넘은 한 거사가 혜가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는 풍질(風疾)의 병이 있으니, 화상이 저를 위하여 참회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자, 혜가는 "그대가 죄를 나에게 가져온다면, 나는 너를 위하여 죄를 참회하게 해주리라"고 하였다. 거사는 심사숙고하여 말하기를 "지금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혜가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하여 참회하게 하였다. 그대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거사가 "오늘 화상을 만나니, 승보(僧寶)임을 알겠으나 세간에서 어떤 것이 부처이며, 무엇을 법이라 합니까?"라고 하자,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법(法)이니, 마음, 부처와 법은 어떤 차별도 없으니, 그대는 알겠는가?"라고 하자, 거사가 즉시 깨닫고 말하기를, "비로소 오늘에야 사람의 죄는 안에도 바깥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렇듯이 불법(佛法)도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혜가는 이 말을 듣고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아 삭발시키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승보이니, 승찬(僧璨)이라는 이름이 적합하겠구나."

이후로부터 두 선사는 사공산에서 수행에 몰입하는 한편, 이조사를 중심으로 중생을 교화하였다. 이와 같은 수행과 교화는 불교의 혜명(慧命)을 지켰고, 법맥이 면밀하게 이어지게 하였다.

이조사가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당(唐) 현종(玄宗) 천보(天寶)년간(742-755)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 혜능의 제자 본정(本淨)선사가 주지를 맡았던 때이다. 천보 3년(744), 당 현종은 중사(中史) 양정광(楊庭光)을 파견하여 사공산에서 장생불로(長生不老)의 약을 구하게 하였다. 불로초를 채취하는데 본정선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본정선사를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 백련사(白蓮寺)에 주석하게 하였고, 많은 고승들과 왕래하며 선종을 널리 선양하게 하였다. 본정선사는 현종 및 수많은 문무백관들의 귀의를 받았다.

선사에게는 '대효(大曉)'라는 법호가 하사되어 국사(國師)로 받들어지고, 다시 사공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현종은 은화를 하사하여 무상선사(無相禪寺; 二祖寺)를 거듭 중창하고 승방(僧房) 5048간(間)을 짓고 아홉 개의 암자와 네 개의 사찰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산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였으며, 참배자 또한 문전성시를 이루며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전쟁과 천재(天災)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조사는 점차 쇠락하였다. 명나라 천계(天啓) 원년(1662)에 이르러 사공산은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태공(太空) 여호(如浩)선사는 이조사를 중창하기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분주히 다닌 결과 태수(太守) 완자화(阮自華)와 주사(柱史) 사안원(史顔遠)의 도움을 받아 대웅전과 조사전 등을 건립하였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맞아 사찰은 다시 파괴되었으며,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에 사공산의 60좌 가운데 몇 개 안 남은 불상과 대웅보전이 모두 훼손되었다.

사원의 현황

안휘성(安徽省) 악서현(岳西縣)에 위치한 사공산(司空山)은 사공산(思空山), 사공산(四空山), 시공산(施空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명칭은 선종의 '사유공(思惟空)' 불교의 '사대개공(四大皆空)'을 뜻한다.

이 산은 해발 1227m이며, 주변 둘레가 35km2가 되고 산세가 독특하다. 전설에 따르면, 전국(戰國)시기 순우씨(淳于氏)가 있었는데, 사공(司空; 삼공(三公)의 하나로, 토지와 민사를 담당하는 관직)을 맡아 평생 청렴하게 살았으며, 퇴직 후에 이 산에 은거하였기에 '사공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사공산은 사면이 모두 다 부처님의 모습으로, 발걸음 옮길 때 마다 산의 자태가 변화무쌍하다. 서편에서 보면, 달마가 불탑을 받드는 모습이고, 북쪽에서 볼 땐, 미륵보살이 귀를 기울여 경전을 듣는 형국이며, 남쪽에서 보면, 이조 혜가가 좌선하는 모습이고, 동쪽에서 볼 땐,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형상이라고 한다.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굽이굽이 산길이지만 절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자주 볼 수가 있어 쉽게 이조사를 찾을 수 있다. 이조사는 상원(上院)과 하원(下院)으로 가람을 형성하고 있다.


이조사의 하원 대웅전.


하원은 사공산 산기슭에 위치하고 현재 대규모로 증축하고 있다. 스님들의 요사채는 이미 완공되었고, 대중은 사찰 대부분인 하원에 거주한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일주문으로 들어가면 오관당(五觀堂)과 육합당(六合堂)이 양측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현존한 건축물은 1995년에 신축한 것이다.

상원은 산위에 있다. 깎아 만든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어떤 길은 산세가 가파르며, 심지어 철근으로만 받치는 계단이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 암벽에는 중국불교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조박초(趙樸初)의 글씨 '선종제일산(禪宗第一山)'이 새겨져 있고, 그의 동상도 있다.

상원은 사공산의 주봉인 앙천와(仰天窩)에 위치한다. 산꼭대기의 벼랑을 등지고 강경대(講經臺)를 향하고 있다. 좌측에는 푸른 산이 감싸고, 우측에는 샘물이 졸졸 흐른다. 하늘이 만든 둘도 없는 절세의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상원은 이조사와 조사동(祖師洞), 조사전(祖師殿)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석벽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드문 건축으로 뒤에 버티고 있는 사공산과 잘 어우러져 참배객들의 만감을 교차하게 만든다. 선원은 대웅전 한쪽 측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0년, 2011년 선칠(禪七)을 시작으로 사부대중이 안거에 동참하고 있다.

이조동(二祖洞)은 이조석굴(二祖石窟)이라고도 한다. 혜가가 처음으로 사공산에서 정진하던 곳이다. 이조사 뒤에는 삼조동(三祖洞)도 있다. 승찬이 사공산에 있을 때 좌선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조동 동남쪽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암석 중간에 칼로 깍은 듯 틈이 있는데 매일 아침이면 돌 틈사이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돌 틈은 삼조 승찬대사가 불퇴전(不退轉)의 신심으로 갈라놓은 것이라 한다.

삼조동 뒤에는 전의석(傳衣石)이 있는데 이조대사가 의발을 전한 대(二祖大師傳衣之臺), 공관(空觀)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조 혜가가 의발을 승찬에게 전수한 곳이라고 한다.

절 옆 멀지 않은 곳에 태백서원(太白書院)이 있다. 이곳은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영왕(永王) 이린(李璘)을 황위(皇位)에 추대하는 역모를 꾀하다 전쟁에 패하여 은거한 곳이라고 한다. 전체 상원은 1991년 중창을 시작하여 2009년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원은 아직도 중창 중에 있으며 규모가 상원보다 더 크다.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웅장한 가람의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혜가선사와 그의 선사상

이조 혜가(487~593)의 속성(俗姓)은 희(姬)이고, 호뢰(虎牢; 현 河南 滎陽市)사람이다. 젊었을 때 유학을 공부하였고, 불교에 귀의 한 후 삼장(三藏)을 연구하여 통달하였다. 40세 즈음하여 보리달마를 만났으며, 달마를 6년 동안 시봉하여 심법(心法)을 인가(印可) 받고 4권본 <능가경(楞伽經)>을 전수받았다.

천평(天平) 초년(534) 혜가는 동위(東魏) 도성인 업성(鄴城; 현 河南 安陽市)에 와서 달마의 새로운 선법을 펼쳤다. 그러나 혜가는 기존 학파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이후 이름과 종적을 숨기고 황하 연안 일대에서 수행하다 다시 종파의 투쟁과 북주 무제의 폐불(廢佛)을 피하여 사공산으로 은거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최고의 제자인 삼조 승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혜가는 수나라가 건립된 후에 또 다시 업성으로 돌아가 두타행과 달마선법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개황(開皇) 13년(593)에 종파적 분쟁으로 박해를 받고 열반에 드니, 세수는 107세였다.

이조 혜가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단비구법(斷臂求法)의 고사이다. 혜가는 낙양에 살았는데, 초조 달마가 숭산 소림사에서 좌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배하였다. 달마는 선정삼매에 들어 모른 척하자 혜가는 오랫동안 동굴 앞에 서서 기다렸는데, 밤에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덮고 나서야 겨우 아는 척을 하였다.

이에 달마가 측은히 여겨 묻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눈 속에 서있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라고 하자, 혜가는 "불도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달마는 "부처님의 무상(無上)한 묘도(妙道)는 깊고 깊다. 일반 사람은 감히 배울 수 없고 참기 어려운 고통을 참고 견디어야만 겨우 행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혜가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의 한쪽 팔을 잘랐으며, 이에 달마는 혜가가 법기임을 알고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설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혜가가 "강도에게 팔을 잃었다"는 내용이 역사 자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를 종파논쟁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불타(佛陀)-승조(僧稠)계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던 달마-혜가계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 역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추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종파논쟁이 상당히 격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혜가는 한 손밖에 없기 때문에 합장 또한 한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중국불교에 한손으로 예를 갖추는 경우가 나타났다고 한다.

혜가의 선사상은 달마로부터 계승받는다. <속고승전(續高僧傳)>을 찬술한 도선(道宣)은 달마-혜가계의 선법을 남천축일승종(南天竺一乘宗)이라 칭한다. 여기에서 남천축은 용수보살(龍樹菩薩)에 의해 중관반야학(中觀般若學)이 발원한 곳이다. 따라서 달마-혜가계를 이렇게 칭한 까닭은 그 선법의 핵심이 반야공관에 있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도선은 <속고승전>에서 불타-승조계와 달마-혜가계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논하였다.

"두 종(宗)을 살펴보면, 곧 두 바퀴 축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승조(僧稠)는 염처(念處)를 품었으며, 청범(淸範)하여 존경할만 하다. 달마의 허종(虛宗)은 현지(玄旨)가 그윽하고 깊다. 존경할 만하다는 것은 곧 상황이 쉽게 드러나는 것이고, 그윽하고 깊다는 것은 곧 이성(理性)이 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두 계열의 차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불타-승조계는 수식관(數息觀)과 사념처(四念處)를 중심으로 한 선수학(禪數學)을 바탕으로 대승의 관법(觀法)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를 정학(定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달마-혜가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철저하게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의 선법은 사실상 상당한 차별을 보이고 있다.

혜가는 달마로부터 4권본 <능가경>을 전수받았으며, 이후 혜가와 제자들은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도성에 들어가지 않고 작은 마을과 산을 옮겨 다니며 수행하는 '두타행(頭陀行)'을 하게 된다. 이에 사람들은 혜가 등이 <능가경>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것을 보고 '능가사(楞伽師)'라고 칭하기도 한다.

<능가경>에서는 "문자와 도리는 서로 융합하고, 행위와 본질은 서로 관통함(文理相, 行質相貫)"을 제창하며, 사상의 근본 종지에서는 "전적으로 오직 지혜를 염하고, 언설에 있는 것은 아님(專唯念慧, 不在話言)"을 천명하여 "언설과 생각을 잊고, 얻음이 없이 바르게 관함(忘言忘念, 無得正觀)"을 강조하고 있다.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달마대사의 '자교오종(籍悟宗; 교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종지로 삼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조사의 위치.


혜가는 달마선에서 제시하는 본정(本淨)의 진성(眞性)과 진여(眞如)의 실상(實相)은 서로 그윽이 부합함을 강조하고, 반야성공(般若性空)의 '이(理)'를 보편적인 '진여'에 결부시켰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법은 하나이고, 중생과 부처가 불이(不二)라는 사상을 제시한 것이다. 혜가의 선사상에는 위진(魏晋) 현학(玄學) 이래 본말(本末)과 체용(體用)이 일여(一如)하다는 점을 충분히 실현시켰다고 평가한다. 이는 <유마경(維摩經)>을 대표로 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해탈,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불교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조박초(趙樸初)는 "혜가가 없었다면, 중국선종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혜가를 극찬하였다.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폐불을 단행하여 모든 불교를 초토화시켰지만, 혜가는 남방으로 잠시 피신하여 삼조 승찬에게 전법하여 선맥(禪脈)을 지켰고, 이후 수나라가 건립되어 시절인연이 성숙하자 다시 북상하여 선종을 북방에 전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문화에 위대한 공헌

이조사와 혜가대사는 선종 역사상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혜가는 중국 선종의 개척자는 아니지만, 인도불교를 중국의 정서에 맞게 결합시켜 불교를 철저하게 '중국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사대부와 백성의 정서에 맞는 중국불교로 재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혜가대사가 중국문화에 끼친 위대한 공헌이다.

그러한 점을 인정하였기에 수(隋) 문제(文帝)는 '정종선각대사(正宗善覺大師)'라는 칭호를 내리고, 당(唐) 덕종(德宗)은 '대조대사(大祖大師)'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이조사는 혜가가 남쪽으로부터 피난하여 정진하였으며, 제자 승찬에게 법을 전했던 도량으로 중국불교의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조고사(二祖故事)

가) 천보(天寶) 3년(744), 당 현종은 양귀비를 얻는다. 그녀를 위하여 천하에 조서를 내려 먹으면 장수도 하고 피부미용에 좋은 비방을 구하도록 했다. 어느 날 중사양광정(中使陽光庭)이 신령한 산으로 유명한 이조사가 있는 사공산(司空山)에서 장춘등(長春藤)을 캐고 있었다.

이를 본 혜능대사의 제자인 본정(本淨)선사가 고정차(苦丁茶)를 양귀비에게 진상하도록 한다. 양귀비가 이 차를 마시고 미용에 좋아 목욕까지 하게 된다. 특별한 효험에 당 현종도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본정대사를 경성으로 청하여 백연사(白莲寺)에 모시고 고승들과 같이 지내게 한다. 본정 또한 남다른 언변으로 불교를 펼친다. 당 현종과 불자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대효(大曉)'라는 호까지 받은 후 다시 사공산으로 돌아간다. 당 현종은 '무상선사(無相禪寺)'를 창건하였는데 무려 방이 5048칸이고 산내 암자가 아홉 개, 사원이 네 개로 이루어졌다.

나) 이조혜가(二祖慧可)의 속명은 신광(神光)이다. 그는 본래 전직이 관료무사다. 어느 날 소림사의 달마를 참배하러 왔다. 마침 달마가 면벽수행을 하는 것을 보고 문 밖에서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본척만척 했다. 한참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세상을 다 덮었다. 하지만 신광은 여전히 눈 속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 눈이 무릎까지 쌓였으나 달마가 여전히 실내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신광은 칼로 자신의 왼팔을 베어 달마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이에 놀란 달마대사가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신광은 "스님의 감로법문으로 저의 미혹을 깨우쳐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달마는 그의 단비(斷臂)를 한 가상함에 법을 전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겨 의발을 전했다. 혜가로 이름을 바꾸어 부처님 법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