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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4> 호북성 쌍봉산 사조사

도신대사, 농사와 수행의 농선병중(農禪幷重) 전통 확립


사조 도신대사가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측백나무와 대웅전.


사조사가 있는 파액산(破額山)은 현재 중국의 강서(江西), 호북(湖北), 안휘(安徽) 등 3성(省)의 접경지역이다. 북쪽으로는 대별산(大別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강(長江)이 흐른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북고남저이며, 산상(山上)의 풍경은 수려하며 조용하고 그윽하다. 산 아래는 비옥한 논밭이 끝없이 펼쳐져 농산물이 풍부하여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중국선종의 초조 보리달마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와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혜가는 승찬에게 전한다. 그러나 사조 이전의 선종은 사원을 건립하지 않고 전통적 수행법인 두타행을 주로 하였다. 달마와 혜가의 선법은 당시 북방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요 불교세력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에 따라 두 선사는 박해를 받아 열반하였다.

이후 북주 무제의 폐불까지 겹쳐 불교와 선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신은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도를 모색하다가 결국 세 조사들의 두타행과 전법을 종결하고, 사찰에 정주하여 선법을 널리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조사는 당(唐) 무덕(武德) 7년(624)에 도량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사원의 역사

사조사는 당초(唐初)에 도신이 직접 창건하여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옛 이름은 유거사(幽居寺), 정각사(正覺寺), 쌍봉사(雙峰寺)라고 하였다. 중국 선종에서 처음으로 대중이 함께 단체생활을 하며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좌선을 병행하는 사원이 된다. 동시에 당시 중국 대륙의 불교사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대중도 제일 많았으며, 그에 따라 최고 유명한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기록에 의하면 도신은 당 영휘(永徽) 2년(651)에 사찰 서쪽에 탑을 짓고, 같은 해 윤 9월 초사일에 탑으로 들어가 말을 끊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세수는 72세였다. 이듬해 탑문이 저절로 열렸지만, 법신이 썩지 않는 신이를 보여 무수한 대중이 앞 다투어 친견하고 공양을 올렸다. 이에 당 대종(代宗)이 칙령으로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세우니, 탑명을 '자운(慈雲)'이라고 하였다.


도신대사 진영.


명대 정덕(正德) 14년(1518) 사조의 진신(眞身)은 스스로 손을 머리까지 들어 올리고 불을 토하여 다비(茶毘)를 일으켜 수많은 사리(舍利)를 얻게 되었다. 당시 전각도 함께 불타 재로 되었는데, 후에 형왕(荊王)이 중창하였다.

사조사에는 당나라 때의 비로탑, 노반정, 원나라 시대의 영윤교와 청나라 때 중창한 사조전, 자운각 등이 현존한다.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읊은 것으로부터 사조사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지금 사조사에 보존하고 있는 청대 목각(木刻) '사조명산정각선사승경전도(四祖名山正覺禪寺勝境全圖)'를 보면, 당시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조 도신과 오조 홍인 이후에도 사조사는 수많은 고승이 주석하여 불법을 선양하였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 흥망성쇠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사원 현황

쌍봉산에 들어서면 곧바로 사조사를 볼 수 있다. 사조사는 높이 솟은 두 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온 산에 에워싸여 있고 기암절벽까지 옹호해 기세가 대단하다. 먼저 영윤교(靈潤橋)를 건너야 하는데, 원나라 시기(1350)에 건축된 이 다리는 '화교(花橋)'라고도 한다. 다리 입구에 '화교'라 새겨져 있으며, 다리의 다른 끝에는 '영윤교'라고 쓰여 있다. 영윤교에 서서 고개를 들면 바위에 새겨진 유종원이 쓴 '벽옥류(碧玉流)'글씨를 볼 수 있다.

다리 밑으로 잔잔히 흐르는 맑은 물이 '벽옥류'이다. 영윤교를 건너면 노반정인데, 전설에 의하면 사조사를 건축할 때 대목수가 노반의 38대 자손으로 그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뒷날 특별히 이 정자를 건축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보기 드문 송나라 때 건축형식이다.

노반정에서 나오면 두 갈래 길을 만난다. 한 갈래는 산문으로 바로 들어가고 다른 갈래는 전법동으로 향한다. 사조사의 산문은 청백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산문에 들어서면 바로 회랑이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청석으로 된 석가모니 화상(畵像과 선종 삽삼(三十三)조사 화상과 생애, 행적 등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2012년에 입적한 본환(本煥)법사와 중국 근대 고승 허운(虛雲, 1840~1959)선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또한 본환법사가 자신의 피로 쓴 <보원품(普願品)>의 석각(石刻)도 있다.

사찰의 주요 건축물로 천왕전, 대웅전, 관음전, 조사전, 선원, 객당, 장경루, 종루, 방장실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다른 사찰보다 규모가 크고 널찍한 편이다. 사찰건축물들은 첩첩으로 늘어서 있지만 엄숙하면서도 우아하다. 문, 창문과 대들보와 기둥도 다양한 불화로 화려하게 장엄하였는데 고색이 창연하다.

사찰 내에는 현존하는 문화재도 적지 않다. 도신선사가 친히 심었다고 하는 세 그루의 측백나무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마치 사조의 법맥이 천년의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면면히 끊이지 않고 전해 옴을 상징하는 듯하다. 또한 조사전에 보관된 문물 가운데 청나라 때 유물인 청화자(靑花磁) 향로가 특히 눈에 띤다.

대향로의 높이는 0.8미터, 직경은 0.6미터나 되고, 작은 향로의 높이는 0.6미터, 직경은 0.5미터이다. 그리고 송나라 때 어느 황제가 목판에 금색글자로 쓴 편액이 한 점 있는데, '유초진령(惟楚眞靈)'이란 4개의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필체가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소박하고 예스럽고 우아하다.


사조사 위치.


절의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3층 의발탑(衣鉢塔)도 있다. 도신은 만년에 여기서 의발을 홍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산문 부근의 한 쪽은 대리석 계단인데 도신선사가 홍인에게 법을 전한 옆산의 전법동까지 이어진다. 이 동굴은 천연동굴로 두 세 사람 정도 들어 갈 수 있는 넓이이다. 입구의 큰 바위는 모양이 호랑이와 비슷하며 여기에서 도신선사가 자주 경전을 강의했다고 전한다.

전법동 바로 앞 언덕 위에 유명한 비로탑(毘盧塔)이 있다. 오조홍인이 직접 스승 도신선사를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탑의 외형은 비로자나불이 머리 위에 쓴 보관(寶冠)과 비슷하다고 해서 비로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 탑은 1300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중국 선종에서 세운 첫 번째 탑이며 이로부터 선사들의 입적 시 탑에 모시는 '탑장(塔葬)'이 시작된 것이라 고증하였다.

지금의 사조사는 현대의 고승 본환(本煥, 1907~2012)법사가 주지를 맡은 이래로 사원 복원의 원력으로 전당 200여 간(間)을 세워 옛날 모습을 복원하였다. 본환법사 뒤를 이은 정혜(淨慧, 1933~2013)법사도 사조의 선풍을 다시 한 번 진작하고, 생활 중의 선불교 즉 '생활선(生活禪)'을 전개시켰다. 정혜법사는 <정각(正覺)>이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간하고 있으며, <선문화고봉논단(禪文化高峰論壇)>을 개최하여 선불교를 문화적 측면에서 알렸다. 또한 사중공수법회(四衆共修法會) 및 선문화 여름캠프 등 시대에 걸맞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도신선사와 그의 선사상

사조 도신(道信, 580~651)선사는 속성이 사마(司馬)이다. 선조는 하내(河內, 현 河南省 沁陽顯)가 본향이지만, 후에 현재의 호북성(湖北省) 무혈시(武穴市)로 이주했으며 도신선사는 이곳에서 출생한다.

12살 때 사공산(司空山)에서 승찬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9년간 정진하였다. 도신은 근기가 수승하여 스승으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다. 수(隋) 인수(仁壽) 3년(603) 길주(吉州, 현 江西省 吉安市)로 가서 수행하면서 강의를 했다. 3년 후 승찬선사가 행각을 마치고 사공산으로 돌아오자 다시 돌아가 선사를 모시고 의발을 전수받아 중국 선종의 제4조가 되었다. 대업(大業) 2년(606) 승찬선사가 입적하자, 이후에 여산(廬山) 대림사(大林寺)의 초청으로 그곳에서 머물며 10년 동안 강경(講經)을 하며, 천태학(天台學)의 지관(止觀)을 수학하고 반야부 경전 등을 섭렵하였다.

당(唐) 무덕(武德) 7년(624), 기주(州) 신도들의 요청으로 황매(黃梅) 쌍봉산으로 와서 설법하자 천하에서 승속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30여 년을 주석하며 달마의 선법을 선양하고 가풍을 세운다. 선사의 만년에 당 태종(太宗)은 황매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도신을 장안(長安)으로 모시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선사는 연로하고 병든 것을 핑계로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태종은 사신을 시켜 칼을 선사의 목에 대고 말하기를, "선사가 만약 장안에 들어오라는 황명을 거절하면 목이라도 가져 갈 것이다."라고 명하였지만 선사는 초연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도리어 깊은 감화를 받은 당태종의 지지를 얻어 종풍을 더욱 빛냈다고 전한다.

도신선사의 저술로 <보살계법(菩薩戒法)>과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홍인의 제자인 정각(淨覺)이 찬술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실린 도신선사 전기 내용은 마치 도신선사 저술을 그대로 인용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정각이 선사의 저술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도신선사의 사상은 이로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능가사자기>의 '도신전'에서는 "나의 이 법요(法要)는 <능가경(楞伽經)>의 제불(諸佛) 마음을 제일로 함과 또한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한다. 즉, 염불심(念佛心)이 부처요, 망념(妄念)이 범부인 것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도신선사는 달마선에서 소의경전으로 하는 <능가경>을 계승하고, 다시 <문수설반야경>에서 설하는 '일행삼매'를 핵심으로 새로운 선법을 제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신선사의 선사상은 저술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입도하여 '안심'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한 법요를 '일행삼매'로 설정하였고, 그에 따른 방편을 시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입도안심'의 핵심은 바로 '일행삼매'를 증득하는 것이고, 그 방편을 선사는 '염불(念佛)'과 '좌선(坐禪)'의 두 가지로 구성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사가 설하는 '염불'은 "모든 어지러운 마음을 버리고, 상모(相貌)를 취하지 말고, 마음에 한 부처님께 집중하여 오로지 그 이름만을 부르며, 그 부처님이 계시는 방향으로 몸을 똑바로 향하여, 능히 그 부처님이 염념(念念)이 상속하게 하면 바로 염중(念中)에 능히 과거, 미래, 현재의 제불(諸佛)을 보게 된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칭명(稱名)염불'과 '관상(觀想)염불'의 두 측면이 모두 담겨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선사가 설하는 '좌선'의 방법은 철저히 반야개공(般若皆空)을 기초로 하고 있다. 먼저 대중들에게 신심(身心)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四大), 오온(五蘊), 육근(六根)과 이로부터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등의 만법이 모두 공적(空寂)함을 직관(直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입도'하여 '안심'을 얻는 핵심으로 '일행삼매'를 시설하고, 방편으로 염불과 좌선의 수행법을 제창한 이후에 이들을 모두 종합하여 이른바 유명한 '오문선요(五門禪要)'로 정리하고 있다.

선사는 <무량수경>의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是心是佛), 이 마음이 바로 부처를 만든다(是心作佛)"는 구절을 인용하여 '심'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강조하고 "그러므로 부처는 바로 이 마음인 것을, 마음을 벗어나서는 다른 부처는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결론 내린다. 도신선의 핵심인 '오문선요'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첫째, 마음의 주체를 아는 것이다.(知心體) 마음의 주체는 그 성(性)이 청정하여 부처와 동일하다. 둘째, 마음의 작용을 아는 것이다.(知心用) 마음이 작용하여 법보(法寶)를 낳고, 마음은 끊임없이 작용하여 언제나 정적(靜寂)하며, 모든 혼란에서도 그대로이다.

셋째, 언제나 깨달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常覺不停) 깨닫는 마음은 항상 눈앞에 있고, 깨닫는 대상은 모습이 없다. 넷째, 항상 몸이 공적함을 관하는 것이다.(常觀身空寂) 자신의 안팎이 하나로 관통하면, 몸은 법계 속으로 들어가 일찍이 걸림이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다섯째, 하나를 지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守一不移)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한 곳에 머무르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불성을 명확히 볼 수 있게 하고, 빠르게 정문(定門)에 들어가게 할 수가 있다.

도신선사가 제창한 '오문선요'는 마음의 체(體)와 용(用)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수일불이'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입도안심'의 첩경임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사는 수일불이에 대하여 "수일불이란 공정(空淨)의 눈으로 주의(注意)하여 일물(一物)을 간(看)하며,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전정(專精)으로 항상 부동케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흩어질듯 할 때는 지체 없이 다시 가다듬어, 마치 새의 발을 묶어서 날아가려 하면 속히 끈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종일 잘 지켜서 쉼이 없으면, 번뇌가 다하여 마음은 스스로 안정하게 된다."라고 설한다. 따라서 이러한 오문선요의 목적은 바로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스스로 정에 듦(泯然心自定)"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입도안심(入道安心)의 경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도신선사의 선사상적 핵심은 '수일불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신선사는 선종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종 계통에서 최초로 일정한 거처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대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선종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도신선사를 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선종의 확립에 있어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특히 도신선사 도량에는 500~700여명이 운집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하여 자급자족하고, 밤에는 대중교육 등을 했다. 이후 선종에서 행하는 '보청법(普請法)'과 같은 '청규(淸規)'들이 도신선사로부터 연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조 도신대사 진신사리탑인 자운탑.


도신선사 도량에 500~700여명의 대중을 이루었다고 하니, 선사의 제자들 역시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제자는 형주(荊州)의 법현(法顯), 형악(衡嶽) 선복(善伏) 등이 있으며 특히 신라의 법랑(法朗)은 법의 도리를 깨닫고 귀국하여 해동 선불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후세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사람은 오조(五祖) 홍인(弘忍)이다. 도신선사의 선맥을 동산법문(東山法門)으로 계승하고 선양하여 천하에 그 이름을 알렸다.

중국선종 교단발전 계기

도신선사가 황매에서 사조사를 건립하고 많은 승려들이 함께 생활하며 대중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은 중국선종이 하나의 교단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농사와 수행을 함께 하는 농선병중(農禪幷重) 이 중국선종의 중요한 전통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선종 조사들은 주거를 정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 유행(遊行)하면서 임시로 강단을 만들어 설법하거나 그때그때 공양을 받아 생활하던 것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이다.

사조사는 처음으로 더 이상 신도의 공양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사찰생활과 수행방면에서 선문(禪門)의 종풍을 확립하고, 중국 선종의 총림(叢林)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도신선사는 선사상의 토대를 마련하여 이후 활달한 조사선이 출현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상당히 크다.

사조고사(四祖故事)

가) 사조 도신대사가 오조홍인(弘忍)에게 불법을 전한 전법동(傳法洞) 앞에는 큰 호랑이의 모습을 한 바위가 있다. 어느 날 사조대사가 동굴 안에서 오조에게 <반야경, 般若經>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 때 쌍봉산의 호랑이 한마리가 지나가다 동굴 안에서 누군가 설법하고 있는 것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심취하여 큰 감동을 받았다. 사조의 설법으로 깨우친 호랑이는 살생의 숙업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선행을 결심한다. 천년이 지난 지금도 석상으로 변한 이 호랑이는 여전히 동굴 어귀에서 신성한 도량을 지키고 있다.

나) 사조 도신(道信)은 대웅전을 세우는 재목으로 좋은 남목(楠木)이 필요했다. 이 사실을 알고 여산(廬山)의 신도들이 200여 기둥을 시주한다. 그러나 이 남목들은 강서 여산에 있는지라 쌍봉산 까지는 거리가 멀어 운반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대웅전 도목수는 전설 같은 목공 노반(魯班)의 제18대손이었다. 그는 신통으로 쌍봉산 꼭대기에서 흰 납의(納衣)를 한 송이 흰 구름으로 변화시켜 여산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흰 구름은 또다시 날아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떨어지자마자 200여 개의 우량한 남목이 땅에 정연하게 차곡차곡 쌓였다. 후에 노반자손이 대웅전을 세운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노반정(魯班亭)’이 지금까지 사조사 입구에 남아 보물이 되어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