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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10> 호남성 남악형산 복엄사

육조혜능 의발 계승한 남악회양 선사 행화도량

육조혜능 의발 계승한 남악회양선사 행화도량인 복엄사 대웅보전.

 기세가 웅장한 형산의 수봉 회안봉은 형양시 중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상강을 임하고 있으며, ‘천하의 남악(南嶽) 제일봉’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연꽃같이 우아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지닌 몇 십 개의 산봉우리를 스쳐 지나 남악 형산의 핵심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명승구역에 들어간다. 복엄사(福嚴寺)는 바로 그 안 척발봉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척발봉 아래 반산정에서 5리쯤 떨어진 마경대를 돌아가면, 쭉쭉 뻗은 대나무가 울창하게 어우러진 곳에 고아하게 서 있다.

사원의 역사

<남악지(南嶽誌)>에 의하면, 복엄사는 원래 명칭이 반야사, 반야대라고 했으며, 천태종 3조 혜사선사가 진 광대 원년(567)에 창건한 것이다. 혜사대사가 대소산에서 출발하여, 40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형산에 이르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반야선림과 소반야선림(지금의 장경전)을 창건했다. ‘악신(嶽神)’과 바둑을 두고, 도사와 도술을 부리며 싸움을 하고 금릉(金陵)에 이르러 경전을 강설하여 널리 문도를 거두었다. 마침내 불교를 남악에 뿌리내리게 하여 명성이 도교를 넘어섰다고 한다.

혜사대사는 평소 계율을 받들어, 의복은 면포만 쓰고, 추운 겨울에는 쑥잎을 채워 바람과 서리를 막아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는 특별히 그의 자비로운 행실을 모범으로 삼을만하다고 칭송하였다. 혜사는 나중에 남악 형산의 개산조사로 추앙받았다. 혜사가 남악에서 10년 동안 법을 널리 펼치자 명성이 장강 남북에 가득 했으며, 577년 남악에서 원적하니, 절의 동쪽 언덕에 삼생탑이 건립됐다.

남악회향선사 진영.

이후 당 선천 2년(713)에 선종 육조 혜능의 의발을 계승한 회양(懷讓)선사가 남악에 주석하면서 반야사를 선종도량으로 개설하고, 남종의 돈오선법이 뿌리내려 천하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천하의 불자들이 이 절을 전법의 불원으로 삼았다.

북송의 태평흥국 연간(976~984)에 복엄(福嚴)이라는 유명한 스님이 사원을 증수하고, 사방에 측백나무를 심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절 이름을 ‘복엄사’로 고쳤다. 청 동치 9년(1870)에 중수되고, 청나라 때 중수한 구조와 양식이 계속 보존되었다. 문화혁명 시기에 절 안에 있던 문물이 사라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사원이 다른 용도로 바뀌면서, 재난 시기에 절 안의 고목도 모두 말라 죽고, 종교 회복 정책이 실시된 후 다시 생기를 얻었다.

절도, 부처님도, 나무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사상도 오래되었다. 1400여 년 동안 복엄사는 고승들을 배출하여, 밤하늘을 찬란히 밝히는 별들처럼 고금에 빛나고 있다. 그들은 불학에 정밀하고 뛰어나며, 시서(詩書)에 출중하고, 인격이 높고 절개가 굳어 중국불교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복엄사 역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혜사와 회양 두 분의 조사 외에도 심승(審承), 양아(良雅), 초원(楚圓), 보종(保宗), 자감(慈感), 문연(文演), 홍저(弘儲), 담운(淡雲), 현묘(玄妙), 해안(海岸) 등 일대종사(一代宗師)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일찍이 반야사(복엄사)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사원 현황

복엄사는 곧게 뻗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어우러진 곳에 늙은 나무덩굴과 오래된 고목 사이에 서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짙푸른 나무 숲과 엄숙하고 경건한 사우(寺宇)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여 불당(佛堂)들을 유난히 고아하게 만든다. 사찰 앞과 뒤에는 높고 커다란 암석이 있다. 왼쪽 산의 돌에는 당나라 재상 이필(李泌)이 ‘극고명(極高明)’이라고 쓴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극고명대(極高明臺)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밖에 ‘혜사일생암(惠思一生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커다란 암석의 한쪽 측면에는 삼생탑(三生塔)이 있다. 이 탑은 복엄사를 개산(開山)한 혜사대사의 유골을 안치한 곳으로, 혜사화상 삼생의 몸을 모두 그 속에 모셔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절 동쪽에는 네모난 모양의 돌우물에서 솟아나는 맑고 깨끗한 샘물이 있다. 우물 벽에 ‘호포천(虎泉)’이라고 새긴 석각이 있고, 샘 옆에는 기품이 있고 단정하며 장중한 서체를 간직한 비석이 있다. 비문에는 남조(南朝) 진(陳)나라 광대(光大) 시기에 혜사조사가 도량을 창건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산문에는 ‘육조고찰(六朝古刹), 칠조도량(七祖道場)’이라고 쓴 한 폭의 대련과 ‘천하법원(天下法院)’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이 대련과 편액은 복엄사의 역사적 연원과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도의 예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산문 밖에는 혜사가 심은 세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 전설이 전한다. 일찍이 혜사 문하에서 계를 받았지만 계율을 범하여 환속하라는 벌을 받은 두 비구와 한 비구니가 산문 밖 은행나무로 환생하여 불법(佛法)을 듣고 참회하며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문에 들어서면, 커다란 마당을 둘러싼 담장 위에는 돌에 조각된 팽옥린(彭玉麟)의 매화도(梅花圖)가 조각되어 있다. 두 번째 건물에서 마지막 건물까지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건물 대문 위에 편액이 하나 있는데, ‘오엽류방(五葉流芳)’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건물 오른쪽 정원에는 수천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壽)’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더 안으로 가면 대문 정동쪽에 지객청(知客廳)이 있다. 회랑 기둥에 “복엄은 남산 제일 고찰이며, 반야는 늙은 조사의 불이법문(福嚴爲南山第一古刹, 般若是老祖不二法門)”이라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세 번째 건물은 악신전(嶽神殿)으로, 건물 안에 악신 조각상이 있다. ‘남악지’에 의하면, “진(陳)나라 후주(後主)가 악신상을 숭상하며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1만3000근의 동으로 주조하여 불상 3좌를 함께 세웠는데, 1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고 한다. 네 번째 건물은 이 사찰의 주된 건축물인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삼세불(三世佛)’이 모셔져 있다. 모두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며, 양쪽에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18나한이 있다. 다섯 번째 건물인 조당(祖堂)과 관음전(觀音殿), 방장루(方丈樓)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원 아래에는 울창하고 짙푸른 금계림(金鷄林)이 있다. 그 북쪽에는 1000년 동안 예찬을 받는 마경대, 칠조탑(七祖塔), 마조암(馬祖庵; 傳法院), 조원(祖源) 등이 있다. 역사가 깊은 이 사찰은 중국불교의 가장 깊은 내용을 응축하고 있어, 고금(古今) 승려들의 마음을 끌었으며, 수천수만의 여행객들이 찾게 했다. 학자들이 종일 머물게 하고, 수많은 문인들의 붓을 춤추게 하며, 순례자들은 선열(禪悅)의 아름다움을 얻게 한다.

남악회양선사와 그의 선사상

남악회양(南嶽懷讓)선사(677~744)는 당(唐)나라 금주(金州, 지금의 陝西 安康市) 사람이다. 15세에 옥천사(玉泉寺) 항경법사(恒景法師)에게 출가하고, 육조 혜능대사를 참알하여 깨달음을 얻고, 혜능대사를 15년 동안 모셨다. 선천(先天) 2년(713)에 처음 형산에 와서 반야사(般若寺; 지금의 福嚴寺)에 거처하며, 불법을 널리 펼치자, 사방의 승도들이 공경하며 귀의했다. 선사가 이곳에서 선종의 심법을 크게 떨치고, 근기에 따라 교화하여 제자들이 심성을 깨닫도록 하였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磨成鏡)’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일깨워준 것이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단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회양선사가 처음 육조 혜능을 뵈었을 때, 혜능이 묻기를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니, 회양이 “숭산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육조는 회양을 검증하기 위하여 계속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회양이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자심에서 깨달은 불성은 말로는 능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육조가 묻기를, “그러면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있는가?”라고 하니, 회양이 대답하기를, “닦고 증득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오염이라 해도 오염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육조대사가 곧바로 회양을 인가(印可)하였다. 회양선사는 ‘선’은 비록 닦고 증득하는 것을 빌려 깨달을 수는 있지만,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성은 절대 오염되지 않는 것 이라고 보았다. 그의 대답 속에 조사선의 무수무증(無修無證) 수행관이 드러나며, 마음이 오염되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천연이니, 중생이 곧 부처임을 제시해 주었다.

회양선사는 자신이 선대(先代)를 계승, 발전시키고, 선법을 중국에 널리 전하는 효시가 되어, 선종 발전을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의 융성을 촉발시켰다. 그의 제자 마조도일선사는 일찍이 남악회양선사의 선법사상을 총결(總結)하였을 때, “우리 스님의 도가 오묘함이 있는 것은 기대지 않으면서(無待) 항상 되고, 머무르지 않으면서(無住) 이르러, 능히 일이 모일 수 있다”고 하였다.

‘무대(無待)’와 ‘무주(無住)’라는 두 개의 미묘한 법문에 남악회양 선법의 특색이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무대(無待)’는 기댐(待)에 대한 측면으로 세간의 기댐, 즉 세간의 어떠한 조건에 대한 것을 없애는 법이다. 세상 사람은 우주와 인생의 현상을 공(空)하거나 유(有)하고, 크거나(大) 작거나(小) 등과 같이 두 가지 조건을 설정하기 좋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된 마음으로 알음알이에 집착하게 하여 해탈하지 못한다.

때문에 유무 등의 양변을 타파하여 중도반야로 모든 실상을 관조하면 저절로 우주 인생의 진상을 보게 된다. ‘무주’는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인연에 맡겨 자연스럽고, 인연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평범하고 진실한 생활 속에 불법을 깨닫는다. 불성은 생멸을 조작하는 법이 아니라 본래 갖추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며, 이것은 닦아 증득했기에 있고, 닦아 증득 못했기에 없는 것이 절대 아님을 말한다.

또한 회양선사는 불성은 중생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며, 언제든지 항상 하는 존재이며, 결코 수행했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니고,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실하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수행자는 심원(心源)의 본성을 초월해, 형식상 좌선(坐禪)과 선을 중시하지 않지만, 또한 자성을 청정하게 하는 선수행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磨成鏡)’은 회양선사가 제자 마조도일을 일깨운 공안이자, 회양선사의 주요한 선법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은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마조가 남악 전법원에 거하여, 홀로 하나의 암자에 처하고, 오직 좌선을 익혀, 방문하는 자도 모두 돌아보지 않았다. 회양선사가 가도 또한 돌아보지 않았다. … 하루는, 벽돌을 암자 앞에서 갈고 있는데, 마조는 역시 돌아보지 않았다. 오래 지나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마조는 “벽돌을 갈아 어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벽돌을 갈아 이미 거울이 되지 못하는데, 좌선이 어찌 능히 부처를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르기를, “어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소가 마차를 끄는 것에 비유하자면, 마차가 만약 가지 못하면, 소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마차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였고, 다시 이르기를, “네가 좌선을 하는 것이, 좌불(坐佛)을 배움는 것이 된다.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禪非坐臥).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상(相)이 아니다. 머무는 법이 없는 곳에서, 마땅히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네가 만약 좌불한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요, 만약 좌상(坐相)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마조는 듣고서 참회하고, 활연히 개오(開悟)하였다.

이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회양선사가 강조하는 것은 선(禪)은 결코 좌선(坐禪)과 같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청정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이며, 부처님도 고정 불변하는 형상이 아니라 인생의 진제(眞諦)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불에 집착하여 좌선이나 와선 등의 여러 형식으로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불법을 가장 크게 비방하는 것이며, 영원히 해탈을 증득할 수도 없다.

마조가 처음에 좌선 형식으로 선정(禪定)을 얻으려 했던 것처럼, 선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이다. 이렇게 하면 여래의 선정을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형식적인 집착 때문에 사견(邪見)이 생길 수 있다. 회양선사 선법은 혜능대사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 거울도 그 받침이 없는 것,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진애가 끼겠는가?”라고 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양증문 선생은 일찍이 회양선사의 선사상을 6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회양은 혜능의 돈교선법(頓敎禪法)을 계승하여, 좌선을 통해 지혜를 일으켜 해탈에 이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음’이라는 비유로 좌선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탈하여 성불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둘째, 회양은 선정을 완전히 부인한 것이 아니라, 혜능과 마찬가지로 좌선을 새롭게 해석하였고, 실제 좌선을 생활 속으로 확대 발전시켜, “선은 좌선이나 와선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셋째, 부처님도 반드시 선정에 든 특정한 형상으로 집착과 취사(取捨)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이상, 수행자 또한 반드시 좌선을 통해 성불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겠는가? 넷째, 만일 해탈에 이르려면, ‘심지법문(心地法門)’ 즉 식심견성(識心見性)하는 선법을 배워,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해탈하기 위해 ‘씨를 뿌리고’, 밖에서 스승의 가르침이 보조적 조건 즉 ‘천택(天澤, 자연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두 가지가 적극적으로 배합되어야 불성을 깨달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불성’ 혹은 ‘도’는 비록 ‘색(色)’은 아니지만, 자기의 ‘심지법안(心地法眼)’을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무상삼매(無相三昧)’라는 것은 불성과 상응하는 특정한 순서가 없는 무념의 선법이다. 여섯째, 불성이나 ‘도’는 형체도 모습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본성이고 본원이며, 없는 곳이 없고,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청정한 본성 즉 ‘모든 씨앗을 함유하고 있는 심지’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내재된 근거이다.

결론적으로 회양선사의 선법은 평범하고 소박하고, 심성을 깨닫고 나서 실천을 중시하였다. 특히 후대 중국 선종에서 ‘마조(馬祖)의 선사상’이 변화 발전하는데 깊은 영향을 주었다.

불교 생활화의 맹아와 마경대

복엄사 지도.

복엄사는 예스런 운치가 깊어 지금까지 남악의 가장 으뜸인 고찰로 전해지며, 물욕이 팽배한 현대 세계에 독특한 매력을 빛내고 있다. 2003년 ‘중국천년불교논단’이 ‘마경대’에서 거행되었다. 각계의 유명한 학자와 각국의 저명한 법사들이 학술회의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중국에서 첫 번째로 거행된 대형 불교논단으로 한중일 3국에서 참여한 인원이 1000여 명에 이를 만큼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각국의 불교교류 및 불교 대중화와 보편화에 있어서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었다. 대회에서 제기된 불교대중화 기초사업의 주요 특색은 교의의 인문화, 신앙의 입세화(入世化), 수행의 생활화, 경제의 자급화이다.

이 논단으로 21세기 중국불교의 찬란한 빛을 마경대에서 발했다. 남악의 불산(佛山)에 불타의 빛을 꺼지지 않게 하였으며, 새로운 시기의 불교에 희망의 빛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복엄사는 옛날의 원류로부터 내려오는 불교를 계승하여 현대에 전파하고 있다.

복엄고사(福嚴故事)

가) 전설에 의하면 개산조사 혜사(慧思)는 악신(嶽神, 산신)과 내기 하여 사원을 건축할 땅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악신은 혜사가 석장(錫杖)으로 지팡이가 떨어지는 곳의 땅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혜사가 석장을 공중에 뿌리었더니 석장은 천천히 날아가다 복엄사에 떨어졌다. 악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당신이 선택한 이 땅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산이라네라고 말하였다. 혜사는 여러 신이 이 땅을 하사하였으니 나는 이 산에 산사를 짓고 그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사원은 건축되고 악신전(嶽神殿)도 세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나) 복엄사 오른쪽에는 혜사가 심은 오래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다. 남악(南嶽) 사지에 따르면, 세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는 두 비구와 한 비구니를 상징하는데, 이들은 일찍이 혜사 문하에서 수계를 하였지만 계율을 범하여 환속(還俗)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러자 은행나무로 환생하여 산문 밖에서 불법을 듣고 참회하며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 앞 청석비에는 나무의 수계(受戒) 년대가 무려 1,400여년 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복엄사는 돼지우리로 사용되었는데 은행나무는 그때 말라죽었다. 정책이 바뀌면서 복엄사를 다시 중창하자 은행나무는 놀랍게도 다시 살아났다. 필자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가을이었는데 천년은행의 황금잎이 형산 가을빛에 반사되어 복엄사의 하얀 벽과 검은 기와지붕을 장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