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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 <11> 강서성 남창(南昌) 우민사

홍주종 개창한 마조도일 선사 행화도량

홍주종을 일으킨 마조도일선사가 주석했던 우민사 대웅보전.

우민사는 강서성 남창시(南昌市) 중심 깨끗하고 맑은 호수인 남호(南湖)의 동쪽 작은 골목에 자리한 천년고찰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는 혜능 문하 남악회양(南嶽懷讓) 제자이다. <법보단경(法寶壇經)>에 따르면, 일찍이 혜능선사가 회양에게 “너의 제자 가운데 한 망아지가 나올 텐데, 천하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니라”라고 예언을 하였다. ‘망아지’는 바로 마조도일 선사를 가리킨다. 마조가 일으킨 선(禪)을 후학들은 ‘홍주종(洪州宗)’이라 칭하는데, 남종문하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전파된 선맥이다.

사원의 역사

우민사는 남조(南朝) 양 천감 연간(502~519)에 창건되었는데, 본래 상란사(上蘭寺)라고 하였다. <남창부지(南昌府志)> 기록에 의하면 남조 양대 예장왕 스승 갈심의 저택 동남쪽에 교정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교룡(蛟龍)이 살고 있어 물을 자주 흐리게 하니, 예장왕 소종(綜)이 큰 불상을 조성하여 교룡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그에 따라 양 태청 원년(547)에 ‘대불사(大佛寺)’라고 개명하였다. 당조 개원 연간(713~741)에 ‘개원사(開元寺)’라 개명하고 당명황상(唐明皇像)을 모셨다.

마조도일 선사는 대력 4년(769)부터 15년 동안 선법을 설하였다. 이후 사방에 명성이 알려지니, 신도들이 운집하고 입실한 제자들을 셀 수 없었다. 점차 개원사가 강남불학의 중심이 되었고, 이를 ‘홍주선(洪州禪)’이라고 칭하였다. 마조선사는 또한 강서에서 48좌의 사원을 창건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종조가 되어 선종을 천하에 널리 전파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1 ‘태육전’에는 “그때 천하에 불법이 극도로 융성하지만, 홍부(洪府)를 능가하는 곳이 없었다. 좌하에 현성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득도한 이들이 대중을 이루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784년 신라 승려 무적(無寂)은 개원사에 이르러 당시 주지인 마조선사 제자 서당지장(西唐智藏) 선사를 참배하고, 서당지장의 법을 전수받아 법호를 도의(道義)로 개명하였다. 또한 도의 이외에 신라의 홍척(洪陟), 혜철(慧哲) 등도 지장선사 법을 이었다. 이들은 각각 신라로 돌아가 실상산문(實相山門)과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하였다. 9세기 초 신라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도일의 홍주종과 관계가 있다.

그 후 사원은 쇠락과 복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송대에 승천사, 능인사 등으로 개명하고, 명대에 이르러 영녕사로 개명하였다.

우민사 동불전과 신라 도의선사입당구법비.

청대 순치 연간(1644~1661)에 사원이 전란으로 훼손되고, 복원을 거쳐 우청사로 개명하였다. 민국(民國) 초기에는 북양군벌(北洋軍閥)이 우청사를 강점하여 병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민당 군대가 사찰 전각들을 무기고로 사용하고,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니 예불마저 중단되었다. 1929년 ‘우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원 현황

우민사는 남창시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사원이다. 전체적인 가람 배치가 남북을 가르는 중축선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산문에 들어서면 천왕전이 먼저 마주한다. 금색 유리기와에 살구색 벽은 고아하고 비범하다. 또 용마루 위에 해서(楷書)로 된 ‘풍조우순(風調雨順)’ 네 글자는 부처님 광명을 드러내 국태민안을 뜻하는 의미로 나라가 편안해야 절 집안도 순조롭다는 뜻도 함께 있다. 전각에는 미륵불을 주존으로 양측에 사대천왕을 모시고 있다.

전각을 지나면 정원 안에 몇 사람이 둘러 앉아도 모자라는 천년 녹나무가 가지는 구불구불하지만 생기가 넘친다. 천왕전 뒤에 외형이 독특한 아미타동불전(阿彌陀銅佛殿)이 있는데, 동불은 높이가 9.6m이고 무게가 20t이나 된다. 우민사는 특히 다른 사원보다 동불전이 많아 남창에 이런 속담이 있다. “강서는 비록 궁핍하지만, 3만6000의 동불(銅佛)이 있다.”

우민사의 동불, 종루의 동종과 보현사철상은 남창의 삼보로 칭해진다. 동불은 문화혁명 시기에 아쉽게도 훼손되어 다시 모셨고, 아직 현존하는 1만여 근이 넘는 동종은 남당 시기에 제조된 것으로 지금도 종루에 달려 있다.

동불전 뒤에 위치한 대웅보전은 무려 1000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현재 강남에서 규모가 큰 불전 가운데 하나로 사바세계 석가모니불, 동방정유리세계 약사불,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 등 삼세불을 봉안하고 있다. 본존 석가모니불 좌우보처로 가섭과 아난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뒤에는 법당과 장경각이 중국 전통사원과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마조도일선사와 그의 선사상

마조도일(709~788)선사는 속성이 마(馬)씨 이고 한주(漢州) 집방(什, 지금의 사천성 집방시)사람이다. 어릴 때 자주(資州) 당(唐) 스님을 따라 삭발하고, 유주 도율사(圖律師)에게 수계를 받았다. 도일은 한때 신라 무상(無相) 문하에서 참학하였다. 개원 연간에 형산의 남악회양 선사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로부터 마조선사는 10년 동안 제방에 행각을 하다 남장 개원사(즉 지금의 우민사)에 주석하며 홍주종을 개창하였다. 당 정원 4년(788) 2월 초하루에 세수 80세로 원적하였다. 제자들은 선사의 사리를 강서 정안 석문산 보봉사에 모셨다. 마조선사 사리탑은 정원 7년(791) 좌부사 덕이가 덕종(德宗) 성지를 받고 건립하였다. 당 현종은 마조에게 ‘대적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청대 옹정 13년(1735) 세종은 마조에게 ‘보조대적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마조도일 선사 진영.

마조도일 선사상은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조사선 사상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다. <마조어록>에 “너희들은 각자 자심(自心)이 부처임을 믿어라.” “자성(自性)이 본래 구족하여 다만 선악의 일 가운데 걸림이 없다면 수도인이라 칭하겠다. 선함을 취하고 악함을 버리며, 공(空)을 관하여 입정(入定)한다면 조작(造作)에 속한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단경>의 문구와 상당히 유사하다.

마조선사의 선사상은 앞에서 언급한 ‘선비좌와(禪非坐臥)’와 ‘도불용수(道不用修)’,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즉심즉불(卽心卽佛)’ 등이 대표적으로 유명하다.

<경덕전등록>에는 마조선사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보인다. “도(道)는 닦지 않음이니, 다만 오염되지 말라. 어떻게 오염되는가? 다만 생사의 마음이 있어 조작하고 쫓아가면 모두 오염이다. 만약 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하면 평상심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이르는가? 조작(造作), 시비(是非), 취사(取捨), 단상(斷常), 범성(凡聖)이 없음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범부의 행함도 아니며 성현의 행함도 아님이 보살행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근기에 따르고 사물을 접함이 모두 도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확하게 ‘도불용수’와 ‘평상심시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역시 <단경>의 선사상으로부터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평상심’은 일반적인 평상심과는 다르다. 선사는 “조작·시비·취사·단상·범성”이 없는 상태가 ‘평상심’이라고 했다. 이는 <단경>에서 설하는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의 삼무(三無)로부터 얻어진 ‘마음’이며, ‘돈오(頓悟)’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단경>은 ‘삼무’를 통하여 ‘무수무증(無修無證)’으로 귀결시킨다고 했는데, 마조선사는 ‘삼무’를 통해 ‘평상심시도’를 제창했다고 볼 수 있다.

<마조어록>에는 또한 ‘즉심즉불’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승려가 물었다. ‘화상은 어째서 즉심즉불을 설했습니까?’ 마조가 ‘아이 울음을 그치기 위함이다’라고 답하였다. ‘울음이 그치고 나면,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마조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라고 답하였다. ‘이 두 종류를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르쳐 보이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에게 물(物)이 아니라고 말하겠다’라고 답하였다.”

이로부터 보자면 마조선사는 ‘즉심즉불’을 상당히 강조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심비불’이라고도 설했음을 알 수 있다.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표현이 서로 다르지만, 이는 긍정적인 ‘표전(表詮)’과 부정적인 ‘차전(遮詮)’의 차이이다. 물론 해석함에 있어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실제 의미는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은 앞에서 언급한 ‘평상심’의 의미다.

<경덕전등록> 권6에 실린 ‘마조전’에 따르면, “입실 제자가 139인으로 각각 한 지방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라고 하며, ‘마조사법(馬祖嗣法)’으로 37인을 들고 있고, 권7에 ‘마조사법’으로 다시 45인을 거명하고 있다. 또한 황벽선사는 “마조대사는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마조의 사법 제자들로 인해 강서지방을 중심으로 ‘홍주종’은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마조의 사법인 백장회해 문하에서 임제종과 위앙종이 출현하게 된다. 임제종은 ‘오가’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된 종파로 지금도 법맥이 계승되고 있으며, 역대로 한국 선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도불교의 중국화에 공헌

마조도일선사는 인도불교의 중국화와 선종 발전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선사는 총림을 세우고 수많은 인재를 배양하였다. 선사가 개창한 선풍은 이후 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천하에 조사선이 널리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사는 평생 민중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 속에서 선종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후 중국불교의 서민화, 세속화의 핵심적인 작용을 이루었다.

우민사 지도.

선사가 창건한 ‘홍주종’은 조계(曹溪), 남악(南岳)의 법맥을 이어 임제, 위앙 두 종의 근원이 되었으며, 선종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였다. 그러므로 마조선사의 홍주종은 중국선종 발전사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철학 발전에 이르는 중요한 교량적 의의를 가진다. 마조선사가 수십 년 홍법한 우민사는 지금도 북적거리는 시내의 한 모퉁이에서 묵묵히 마조의 선풍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우민고사(佑民故事)

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원장(朱元璋)이 우민사에 왔었다고 한다. 사원의 스님이 몇 번이나 이름을 묻자 그는 화가 나서 전당의 벽에 한마디 시를 썼다.

“강서(江西)에 병사가 몇 만 명이고 허리에 찬 검으로 죽인 사람이 얼마인데 한낱 시골 스님이 천하의 주인을 몰라보고 그 이름만 물어보는구나.” 그는 돌아가면서 이 스님을 엄히 다스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눈치를 채고 벽에 있는 시를 지우고 다른 시를 써놓았다.

“귀신마저도 두려워하니 폐하의 시를 남길 수 없구나, 강물이 이 시를 번번히 씻어버려 작은 빛이 싸움하는 소에 부딪히는 격이구나.” 후에 주원장이 그 죄를 묻고자 할 때, 벽에 있는 새 시를 보고는 징계는 커녕 칭찬하여 이르기를 “사원에 큰 인물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나) 우민사에 있는 동(銅)으로 제작된 아미타불은 남창(南昌)의 유명한 ‘세 보배’ 중의 하나이다. 역사에 의하면, 불상 높이는 한 장(丈) 여섯 자, 무게는 무려 3만6000근이나 되었다. 우민사는 원래 예장왕-소종의 선생님인 갈심(葛)의 자택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택 동남쪽 우물 안에 무서운 교룡(蛟龍)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장왕은 아미타대불을 조성하여 주택을 보호하다 사원으로 고쳤으며 이름을 ‘대불사(大佛寺)’라 하였다. 문화혁명 초기에 우민사 대웅전은 훼손되고 사원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불상의 한쪽 팔도 잘려지고 대부분 동상들은 녹여 다른 용도로 썼다. 1994년에 와서 동제아미타불은 원래 모양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