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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6. 전강영신

 

86. 전강영신

 
 
근현대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스님의 법맥을 이은 만공스님의 법제자로 평생 참선수행하며 후학을 지도한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5)스님. 혜월.만공.한암.보월.용성.혜봉스님 등 6대 선지식의 인가를 받은 전강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참선일념으로 수행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스님의 수행일화와 가르침을 <불교신문>과 인천 용화선원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정리했다.
 
 
 
 
“옳은 스승 만나 깨달음 이뤄 광도중생하라”
                                                                                   <廣度衆生>
   
  ‘대자재해탈’ 얻는 것이 불조 은혜를 갚는 길
 
   대선승이지만 삼보정재 아끼는 일 ‘솔선수범’
    
 
○… “부모 형제와 친지를 모두 여의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부귀공명을 얻자는 것인가, 아니면 한가로이 봄바람에 취하여 낮잠이나 즐기고 산새 소리나 듣자는 것인가.” 전강스님은 1974년 하안거 해제법문을 통해 사람으로 사바세계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출가자가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준엄한 가르침’을 전했다. 이 해제법문에서 전강스님은 “100년도 못사는 인생이 왔다가 잠깐 부귀(富貴)하는 것이 뜬구름 같으며, 공명(公明)도 달팽이의 뿔 같은 것”이라면서 “내가 나를 깨달아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여 나도 구하고 널리 중생도 제도하는 일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라며 불법(佛法)을 바로 알아 정진하고 또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사진>전강스님 진영.
 
○…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할 때의 일이다.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오도송을 예로 들어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설명하자, 전강스님이 세 번째 구절까지는 그대로 두고 마지막 대목을 “나름대로 붙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만공스님이 “그럼 자네는 그 뒤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고, 전강스님은 “여여 여여로 상사뒤야라고 붙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만공스님이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고, 전강스님은 “여여 여여로 상사뒤야”를 반복하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여여로 상사뒤야는 농부들이 논을 맬 때 부르는 노래의 후렴구이다. 만공스님이 춤을 추는 전강스님을 보고 한마디 했다. “손자가 할아비를 놀리는 것일세, 참으로 손자가 할아비를 놀리는 것일세.”
 
○…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계승한 전강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참선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승속을 막론하고 참선을 해야 돼. 자기의 본래면목을 되찾아 대자재해탈(大自在解脫)을 얻는 것이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는 길이야.” 스님은 “참선일념(參禪一念)이면 어느 때 계를 파(破)할 여지가 있느냐”면서 “구도인(求道人)의 희귀현상과 지계(持戒)의 해이 원인이 참선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포교사.강사.주지도 선원에서 3하안거 이상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입장이다.
 
○… “출가하든지 재가(在家)하든지 그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라. 다만 생사의 문제가 크니 급히 스승을 찾아 정법을 간택(揀擇)하고 용맹스럽게 공부할 것이다.” 전강스님은 “인생다운 인생은 선방에서 참선하는 것 뿐”이라면서도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근기만 있다면 세속에서도 능히 참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참선 수행의 자세도 제시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눈을 크게 뜨지 말고 아주 감지도 말고, 코끝이 보일락 말락 적당히 뜨고,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앉아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라.”
 
○…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스님은 제자를 데리고 광주로 몸을 피해 판잣집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법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때 스님은 제자에게 묵언수행을 하도록 했다. 낮에는 가게 일을 돌보고 천근만근이 된 피곤한 몸으로 참선수행을 하게 했다.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인 후 오후11시30분부터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를 시켰다. 매일 같은 시간이 되면 전강스님은 제자를 깨워 정진하게 했다. 이 제자가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松潭)스님이다. 전강스님은 1960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동안거 정진을 할 당시 송담스님에게 법맥을 전했다.
 
○… 전강스님의 제자로 제31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정대(正大)스님은 생전에 은사에 대해 “근검절약을 통해 삼보정재를 아낀 분”이라고 회고한바 있다. “우리 스님은 당대의 대선승이셨지만, 제자들이 부식을 비싸게 사온 것을 알고, 당신이 직접 시장에 가서 오이, 호박 등을 싼 값에 사온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 삼보정재를 아끼려는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1973년 12월 지리산 정각선원에서 대중을 지도할 때의 일이다. 석양이 질 무렵 당시 종단 감찰원장 지효스님과 도량을 산책하고 있었다. 지효스님이 물었다. “조실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전강스님은 크게 웃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대중설법을 하면서 전강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감찰원장 스님이 30년을 나와 상종하되 한 번도 법을 묻는 일이 없더니, 어제 처음 한 말씀 물었단 말이여. 부득이 답을 안할 수 없지.” 이때 게송은 다음과 같다. “寒尺盡沒(한안척진몰) / 影落白雲間(영락백운간) / 乎乎何處去(호호하처거) / 月沈西海黑(월침서해흑)” “차가운 기러기 나래질 하며 멀리 사라져 가니 / 그 그림자 흰 구름 사이에 떨어질러라 / 호호야 어디로 가느냐 / 달이 지니 서해는 검더라.”
 
<사진>전강스님이 친필로 쓴 화두 ‘판치생모’.
 
○… 스님은 입적 한 달여를 앞둔 1974년 12월 중순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스님은 매일 새벽 2시에 기상하여 밤 9시에 취침하는 대중과 달리, 좌선(坐禪) 중에 잠깐 조는 한두 시간 외에는 일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정진을 했다. 스님의 세수 77세의 고령(高齡)이었다. 삼배를 드리고 무릎 꿇고 앉은 기자에게 “내 마음이 편하게 편히 앉으라”며 자애로운 모습을 보였다. 건강을 염려하는 납자들에게 스님은 “금생에 맹구우목(盲龜遇目)같이 얻기 어려운 인신(人身)을 받아 견성(見性)하지 못하면 또 어느 세상에서 정법을 만나 공부하겠냐”면서 경책했다고 한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선문답(禪問答)에 있어서도 어른에게는 어른다운 문답법이 있고,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다운 문답법이 있음을 명심하여라.”
 
“옳은 스승 만나지 못하면 차라리 출가하지 않은 것만 못한다. 옳은 스승 만나면 도(道)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으나 옳은 스승 찾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참다운 스승을 만나 바로 화제(話題)를 간택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해보다도 외도(外道)되어 가는 것 밖에 없다.”
 
“학인들이여, 옳은 스승 만나 실답게 닦아나가 어서 구경각(究竟覺)을 이루어 광도중생(廣度衆生) 할지어다.”
 
 
 
■ 만공스님이 전강스님에게 전한 전법게
           
 
경허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던 전강스님은 1930년(세존응화 2957년) 만공스님의 법을 이었다. 다음은 만공스님이 전강스님에게 전한 전법게송이다.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峰(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 행장
 
6대 선지식 가르침 받아
 
다비 후 ‘서해’에 잠들어
 
1898년 11월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해용(鄭海龍) 선생, 모친은 황계수(黃桂秀) 여사.
 
16세에 합천 해인사에서 인공(印空)스님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霽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계사는 응해(應海)스님.
 
출가후 교학을 연찬하다, 도반이 입적하는 것을 보고 인생무상을 절감한 후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23세에 깨달음을 성취해 오도송을 노래했다. 당시 6대 선지식으로 존경받고 있던 혜월.만공.한암.보월.용성.혜봉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25세 되던 해에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사진>1964년 기축년 하안거를 기념해 대중과 함께한 전강스님(앞줄 가운데). 도광스님, 정대스님, 도천스님, 명선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세수 33세에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후 법주사, 망월사, 범어사, 동화사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정진을 도왔다. 1968년 4월에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조실로 수좌들을 인도했으며,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조실로 대중을 지도했다.
 
스님은 1975년 1월13일(음력은 12월2일) 용화선원에서 원적했다. 평소처럼 점심공양을 마친 스님이 포행을 마친 후 의자에 앉아 시봉을 바라보며 “나 오늘 가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시봉이 다른 스님들에게 알렸고, 대중이 운집했다. 전강스님은 “여하시생사고(如何是生死苦)인고?”라며 스스로 묻고, 이어 할(喝)을 한 후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成八十一)이니라”고 스스로 답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스님은 의자에 앉은 채 고요히 좌하(座下)했다. 법납 61세, 세수 78세.
 
장례는 전국선원장으로 봉행하려 했으나, 조촐하게 치를 것을 당부한 스님의 뜻에 따라 조용히 엄수했다. 당시 총무원장 경산스님은 영결식에 참석해 “교단 정화를 끝내고 승단정화를 시작하려는 이때, 조실스님의 열반은 종단 내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영결식 후 다비식을 거행했으며, 19일 초재를 지낸 뒤 습골과 쇄골후 인천 연안부두에서 산골했다. 이는 평소 스님의 정법수호 뜻과 유지를 따르기 위해서였다.
 
 
[불교신문 2605호/ 3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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