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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4. 성암관일

 

84. 성암관일

 
 
“출가자가 계율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지키며 평생 정진한 성암관일(惺庵觀一, 1914~1980)스님. 참선은 물론 교학과 염불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고 정진한 성암스님의 일생을 화암스님(포천 동화사 주지)의 회고와 <진공무념(眞空無念)>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모든 남자는 나의 아버지요, 여자는 어머니”
 
“기도로서 마음을 정립하라’ 자주 말씀”
 
공부할 때는 하루 한 끼 생식하며 정진
 
의료시설 없던 시절, 마을사람들에겐 ‘의사’
 
 
○… 성암스님은 부처님 법을 배우고 따르는 이가 예불을 잊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불을 하지 않으면 공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불자의 근본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40여 년 전 두타산 삼화사에 주석할 당시 성암스님은 새벽예불에 나오지 않은 행자를 불러 놓고 따끔하게 경책했다. “오늘 너에게는 밥이 없으니, 굶어라. 하루 종일 울력을 하면서 참회해라.” 그날 행자는 절마당의 잡초를 뽑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이나 해와야 했다.
 
○… 한학과 경학에 깊은 식견을 지녔던 스님은 참선공부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스님은 “여래선(如來禪)이니 조사선(祖師禪)이니 하는 말은 선의 종류가 두 가지란 말이 아니다”면서 “도(道)를 깨치고자 함에는 선법(禪法)이 가장 요긴한 문(門)이기에 선정(禪定)을 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부처님도 선법을 보이셨고, 조사도 선법을 선(禪)했다는 뜻을 말했을 뿐이다. 선정(禪定)에 깊이 들면 한이 없는 불성을 본다. 이것을 가르쳐 공적(空寂)이니 공성(空性)이니 불성이니 자성(自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이다.”
 
<사진>참선 교학은 물론 염불수행을 하며 정진한 성암스님.  사진제공=화암스님
 
○… 스님은 선교(禪敎)는 물론 염불을 공부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권했다. 특히 신심(信心) 있는 염불이 중요하다고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신심으로 잿밥을 내릴 줄 아는 기도를 해야 한다. 신심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네”라고 강조했다. 예불을 모시고 염불을 하는 성암스님의 모습을 보고 발심(發心)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할 만큼 지극정성을 다했다. 새벽 3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난 스님은 어김없이 두 시간 동안 예불과 기도를 올렸다. 두타산 삼화사 이전불사 과정에서 몸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같은 시간이 되면 스님은 누운 채 합장하고 예불을 올렸다. 화암스님(포천 동화사 주지)은 “우리스님께서는 ‘기도로서 마음을 정립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면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장애와 부딪히면 염불과 기도로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반듯했다. 한 치의 소홀함도 빈틈도 없었다. 의복을 입는데도 추운 날씨이건 더운 날씨이건 흐트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도 장삼과 양말만 벗을 뿐이었다.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 편한 차림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스님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데, 어찌 예의에서 벗어난 옷차림으로 있겠는가. 예의를 지키지 않은 옷차림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것도 승복을 벗고 세속 사람들의 옷을 입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타산 삼화사 이전불사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 삼화사 주지로 있던 스님은 불가피하게 삼화사를 이전해야만 했다. 시멘트 산업을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정부방침으로 삼화사는 도량을 옮겨야 했다. 본래 최하중대(最下中臺)에 있던 삼화사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삼화사 주지로 있던 성암스님에게 또 하나의 소임이 생긴 것이다. 스님은 나온 보상금 가운데 절반은 중앙승가대 설립기금으로 총무원에 납부하고, 나머지 자금으로 이전불사를 진행해야 했다.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신축해야하는 불사비용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상황이 이러니 모든 것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헛되이 쓰이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때 스님은 불사를 위해 체육복을 입고 장갑을 손에 끼었던 것이다.
 
<사진>두타산 삼화사 마당에 선 성암스님. 사진제공=공운스님
 
○… 스님의 신심은 깊고 용맹정진은 치열했다. 출가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해 두타산에 조그만 토굴을 짓고 공부에 집중했다. 삼화사 관음암 뒤 산길을 따라 오르면 인적이 드문 토굴이 성암스님이 수행하던 자리이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초막(草幕)은 그저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공간. 이때 스님은 하루에 한 끼 생식(生食)만 하면서 오직 공부에 몰두했다. 삼화사에서 공양을 지고 올라온 스님들도 선정 삼매에 든 스님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 평소에도 스님의 공양은 소박했다. 쌀과 수수, 차조, 보리 등을 갈아 만든 가루가 ‘밥’이다. ‘반찬’은 생강과 당근 두 쪽, 그리고 약간의 된장이 전부였다. 화식(火食)을 멀리하고, 생식(生食)으로 몸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출타할 때도 절에서 마련한 생식을 걸망에 담아 나섰고, 물만 밖에서 구했다. 하지만 스님은 당신의 ‘공양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생식이 맞지 않는 이에게 생식을 강제로 권하는 일은 잘못이라는 생각 때문. 오히려 도반이 오거나 신도가 찾아오면 상좌를 불러 당부했다. “이보게, 공양을 맛있게 차려서 이분들께 올리게.”
 
○…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의사’였다. 지금 같은 의료시설이 없던 시절, 주민들이 병원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소 절마당과 뒷산에 계절에 맞는 약초를 길렀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대중과 마을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스님은 약을 지어주어도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이성수 기자
 
 
 
 
■ 성암스님 어록
 
생과 사를 받지 않는 것이 본래 마음…
 
“중이 잿밥을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신심으로 잿밥을 내릴 줄 아는 기도를 해야 한다. 신심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데, 어찌 예의에서 벗어난 옷차림으로 있겠는가.
 
“음식에 욕심을 내서는 안돼. 죽지 않을 정도만 먹고 공부해야지.”
 
 
 
<사진>성암스님의 유작 ‘진공무념’ 표지. 선교(禪敎)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 스님의 유일한 저서이다.
 
 
“세간의 모든 남자는 나의 아버지요, 세간의 모든 여자는 나의 어머니다. 모든 중생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원수를 갚고 원수를 맺을 일이 있겠나. 다함께 참고 견디어 수행하자.”
 
“진공(眞空)의 묘한 마음을 알겠는가. 생과 사를 받지 않는 것이 본래 마음이다. 육신은 멸할지언정 청정한 본심은 생과 사를 받지 않으니 생사를 두려할 이유가 없다.”
 
“부처님 명호는 천 가지 만 가지가 있어도 깨달은 본래 면목은 다 같은 것이다. 부처님 법을 믿는 신도가 신심이 강하고 약한 것은 달라도 믿는 마음은 한가지이며 불성도 이와 같다.”
 
“부처님 법을 대중들에게 올바로 전하는 것도 수행자의 중요한 본분사(本分事)이다. 부처님 제자가 된 복덕(福德)으로 수행 정진한 결과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일이 중요한 덕목이다.”
 
“마지막에는 참선으로 회향해야 됩니다. 모든 공부는 선(禪)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참선의 세계로 들어갈 때 공부는 온전한 완성을 이룹니다.”
 
 
 
 
■ 성암스님 행장
 
1914년 12월5일(음력)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성학(兪成學) 선생이고 모친은 박씨(朴氏). 스님의 속명은 유해룡(兪海龍)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삼화사 이전불사…강릉포교당 유치원 개원
 
어려서 마을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웠다. 훈장에게 “이제 그만 나가 놀아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책 읽기를 너무 즐겼다. 하지만 소년시절을 보낸 1920~30년대는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부친 유성학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한때 중국에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강원도에 정착했다. 해방이 된 후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에도 다니고, 목수일도 해야 했다. 마음 한편에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출가를 결행한다. 이때가 1949년 3월. 두타산 삼화사에서 춘담(春潭)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부처님 제자가 됐다. 춘담스님의 속명은 최정안(崔淨安)으로 알려져 있다. 성암스님은 1949년 3월15일 강원도 삼화사에서 춘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이듬해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중원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사진>삼화사 불사 당시 신도들과 함께 한 성암스님(뒷줄 가운데).
 
수계를 받은 후 선방과 토굴에서 정진했다. 1960~70년대에는 삼화사 주지와 강릉포교당 소임을 보았다. 삼화사 주지 시절 이전불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불사 현장을 직접 감독하는 등 솔선수범하던 스님은 몸을 다치기도 했다. 범종불사 회향을 보지 못하고 열반에 든 스님은 “내 다음 생에 축하하며 삼화사로 와서 불사 회향한 것을 볼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강릉포교당 주지 시절에는 ‘불교유치원’을 개원해 어린이들에게 불심(佛心)을 심어 주었다.
 
성암스님은 〈금강경〉과 〈화엄경〉을 깊이 공부했다. 탄허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다. 세속 나이는 불과 한살 차이였지만 성암스님은 탄허스님을 은사처럼 깍듯하게 모셨다. 탄허스님이 월정사 주지 소임을 봐달라고 청했지만 사양하고 대신 총무 소임을 맡아 복원불사에 힘을 보탰다. 성암스님이 한암스님 제자로 건당(建幢)한 인연도 탄허스님의 권유 때문이다. 이때가 1972년 동안거 해제일이었다. 성암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은 탄허스님이 “내가 먼저 가야 되는데, 아까운 사람이 먼저 갔네”라며 안타까움을 표하고, 곧바로 달려왔다고 한다.
 
1980년 10월19일(음력) 새벽4시 삼화사 육화료(六和療)에서 스님은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68세, 법랍은 38세. “검소하게 일반 화장장에서 다비하고, 부도는 세우지 말라”는 유훈에 따라 3일장으로 거행됐다. 스님의 유품은 소박했다. 책을 제외하고는 승복 몇 벌과 발우 그리고 방에 모시던 불상이 전부였다.
 
상좌로 양운(洋雲), 법운(法雲), 정안(淨眼), 정상(淨相), 화암(和庵), 부운(浮雲), 공운(空雲), 철운(徹雲)스님이 있다.
 
 
[불교신문 2598호/ 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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