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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1. 영암임성

 

81. 영암임성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행정력이 뛰어나 ‘불교계의 청백리(淸白吏)’로 존경받던 영암임성(映巖任性, 1907~1987)스님. 정화불사에도 적극 참여한 스님은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선교(禪敎)는 물론 염불에도 깊은 식견을 지녔던 스님의 수행과 삶을 조명했다.
 
 
 
“인욕으로 마음 밭 갈고, 정진으로 무명 제거하라”
           
               
  공과 사 엄격 구분 … ‘불교계 청백리’
 
  소임 보면서 종단 반석 위에 올려놓아
   
  
○… 영암스님의 근검절약은 ‘독일인’을 연상시켰다. 해인사에 주석할 무렵 세 사람이 모여야 촛불을 켜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등잔 호롱불을 밝히도록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늦가을이 되어 겨우내 먹을 김장을 할 때면 영암스님은 절여놓은 배추 잎에 또 다시 소금을 뿌리는 ‘독특한 소임’을 보았다. 대중은 많은데, 먹거리는 부족하고 궁핍했던 시절, 아끼고 아끼지 않으면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의 단상(斷想)이기도 하다.
 
○… 공무(公務)로 바깥일을 자주 보아야 했던 스님은 출장에서 남은 돈이 있으면, 동전 한 개라도 챙겨 사중(寺中)에 반납했다. 여비로 사용하라는 권유에도 스님은 공과 사는 구별돼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소임을 마칠 때면 두 개의 장부를 만들어 보관하게 했다. 혹시 문제가 발생하면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한 뜻이었다. 이처럼 스님은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삼보정재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사진>평생 계율을 지키고 공과 사에 엄격했던 영암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 스님은 언제나 주머니가 둘 달린 옷을 입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공금(公金)을, 왼쪽 주머니에는 사비(私費)를 넣었다. 공적인 일에는 공금을 사용하고, 사적인 일에는 사비를 쓰기 위해서다. 월정사에 주석할 당시, 개인적인 일로 강릉에 다녀오는 길에 사비가 다 떨어졌다. 공금을 쓸 만도 한데, 스님은 대관령을 걸어 넘어 오대산까지 왔다.
 
○… 해인사 주지로 있을 당시, 영암스님은 학인들에게 야경(夜警, 도량 순찰)을 철저하게 시켰다.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수많은 성보가 있는 해인사에 혹시라도 ‘밤손님’이 들거나, 화재 같은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스님은 학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문을 잠궈 놓고 다섯 걸음 떼다가 돌아와 열쇠 흔들어라. 그리고 또다시 열 걸음 떼다가 다시 와서 열쇠를 흔들어보라.” 확인하고 확인하여 도량수호와 성보관리에 만전을 기하라는 뜻이었다.
 
○… 지금도 해인사의 최대 행사인 정대불사(頂戴佛事)는 영암스님의 지혜로 만든 법회이다. 경판(經板)을 머리에 이고 도량을 도는 정대불사는 1961년 영암스님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해인사는 공양미가 모자라 끼니를 제대로 잇기도 어려웠고,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은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 정도로 궁핍했다. 이같은 살림을 타개하기 위해 스님은 장경각에서 7일간 철야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네가 배운 대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출가해 배운 것은 계율과 염불. 이 꿈에서 착안하여 정대불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도들이 머리에 한 장씩 경판을 이고 ‘대적광전-장경각-학사대-구광루’를 도는 법회를 봉행하면서 전국에서 불자들이 운집했다. 해인사 재정 상황이 호전됐다. 매년 음력 3월10일 봉행하는 정대불사는 1만여 명이 동참하는 대법회로 자리 잡았다.
 
○… 영암스님은 수행에 빈틈이 없었다. 새벽 2시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어김이 없었다. 평소 생활신조인 ‘철두철미’와 ‘원리원칙’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새벽에 일어난 스님은 기도와 염불로 하루를 시작했다. 총무원장 재직 시절에도 매일 1시간씩 관음예불 모시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다.
 
<사진>원로스님들의 모임인 여석회.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영암스님.
 
○… 1932년 영암스님은 청담(靑潭).자운(慈雲).종묵(宗).혜천(慧天)스님 등 도반과 같이 울진 불영사에서 3년 결사에 들어갔다. 동구불출(洞口不出).오후불식(午後不食).장좌불와(長坐不臥)를 청규(淸規)로 삼았다. 3년 회향일에 즈음해 게송을 지었다. “理事本無二(이사본무이) 事事無碍(사사무괘애) 萬法盡三昧(만법진삼매) 樂山樂水去(요산요수거)” 영암스님의 게송을 듣고 설운(雪耘)스님이 크게 기뻐하며 법답(法畓)을 전수하고 게송을 전했다. “天竺山上月(천축산상월) 佛影照天心(불영조천심) 生佛元不二(생불원불이) 暎巖現水月(영암현수월)”
 
○…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암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은 영암스님에게 일본 유학을 권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미 통도사 강원에서 대교과까지 마쳤고, 세수도 20대 중반이기에 유학을 권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영암스님은 “내 나라의 것도 다 배우지 못했는데, 어찌 남의 나라의 것을 배우랴”며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 공사 구별이 엄격하고 청렴결백했던 스님의 생활은 좌우명(座右銘)에 그대로 담겨있다. ‘열 가지를 모른다’는 뜻의 ‘십부지(十不知)’이다. 수행자로서 멀리 해야 할 것을 나열한 것이다. 간식, 차(茶), 과일, 떡, 낮잠, 구경, 여행, 화초(花草), 서화, 골동품.  
 
해인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한 마음이 밝으면 부처요, 어두우면 중생이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한 마음의 자성불(自性佛)을 깨달음에 있어서 방편과 지혜의 바라밀(婆羅密)을 설시(說示)한 연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는 것이 구도자의 본분사 일진대 또 무엇을 제시하리오. 우리 모두가 이제부터 명리이도(名利二途)의 삿된 길에 기웃거리며 참 자기를 저버렸던 생활을 돌이켜 자기 찾는 참 불사(佛事)에 동참하고 대승인(大乘人)의 진 참회를 올립시다.”
 
“부처님은 몸소 ‘인간(人間)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보여 주었습니다. 유한(有限)한 세계에서 무한(無限)한 세계를, 눈에 보이는 현상(現象)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
 
“세상 사람은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풀을 매는데, 금일 대중은 인욕의 소로 마음 밭을 갈고, 정진하는 호미로 무명초(無名草)를 매야 합니다.”
 
“‘나’라는 개아(個我)는 언제나 우리라는 대아(大我)와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투철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 추모법어
 
1987년 7월 영결식 당시 조계종 종정 성철(性徹)스님이 영암스님의 원적을 추모하는 법어를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은 暎岩元老覺靈(영암원로각령)이다.
 
靈鷲峯巒群鶴飛翔(영취봉만군학비상)
 
伽倻溪谷斑豹哮吼(가야계곡반표효후)
 
萬年靑峰屹立丹(만년청봉흘립단소)
 
千秋老松高聳白雲(천추노송고용백운)
 
公私嚴然宗務龜鑒(공사엄연종무귀감)
 
出納分明行政師表(출납분명행정사표)
 
氷雪淸操珠玉熱辯(빙설청조주옥열변)
 
南北東西瞻之仰之(남북동서첨지앙지)
 
生生不生兮呑却日月(생생불생혜탄각일월)
 
死死不死兮闊步宇宙(사사불사혜활보우주)
 
雄據寶座兮與奪自在(웅거보좌혜여탈자재)
 
捻放杖兮縱橫無盡(염방주장혜종횡무진)
 
暎岩老師何處安身(돌돌영암노사하처안신)
 
霹靂一聲天門開(벽력일성천문개)
 
璨璨星宿輝古今(찬찬성숙휘고금)
 
 
 
 
■ 행장
 
1907년 8월19일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박석순(朴碩淳) 선생과 모친 임봉필(任奉必) 여사의 3남3녀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속명은 기종(淇宗).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
 
한암스님 회상서 정진
 
어려서 사서삼경 등 유학을 공부했다. 우연히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보다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 즉시여래대원각(卽是如來大願覺)”이란 구절을 읽고 발심했다. 17세(1924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주청담(朱淸潭)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구하(九河)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오대산에서 한암(漢巖)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사진>영암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의 일주문.
 
1932년 청담.자운.종묵.혜천스님 등 도반과 울진 불영사에서 3년 결사를 했으며, 이때 대중 외호의 소임을 맡아 도반들이 정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1938년 오대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월정사 재무로 종무행정을 보았다. 빈약한 사찰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사찰림(寺刹林)을 수호하고, 신심(信心)을 북돋우기 위해 적멸보궁 봉찬회(奉讚會)를 조직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월정사 총무를 맡아 과도기의 혼란에서 사찰을 지켰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가 병화(兵火)로 소실된 후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울진 동림사, 울산 해남사 등의 포교사로 취임했다. 종단 정화 후 통도사 총무를 역임했으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당시 해인사는 해인대학 재단과 농지소송사건 등으로 살림이 어려웠다. 스님은 팔만대장경 정대불사(頂戴佛事)를 창안하여 봉행하고 불철주야로 기도했다. 이때 꿈에 백마(白馬)가 먹구름을 헤치고 동쪽으로 달려가는 꿈을 꾸었다. 그 이후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사찰 관련 재판을 대법원에서 역전시켜 위기에 처한 해인사를 구했다. 서울 봉은사 주지 시절에는 7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2만여 평의 토지를 확보했으며, 대웅전을 확장 중건하는 등 도량을 일신했다. 1979년에는 운허스님에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역경불사에 나섰다.
 
1967년.1975년 총무원장, 1974년 중앙종회 의장, 1978년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1967년.1979년 동국대 이사장에 취임해 건학이념 구현과 교육입국에 공헌했다.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87년 6월3일(양력) 오전7시30분 서울 봉은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0세, 법납 65세. <마음 없는 마음>이란 어록을 남겼다. 유고 법문집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가 있다. 스님의 비는 봉은사와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불교신문 2592호/ 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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