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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79. 인암봉록

 

79. 인암봉록

 
 
평생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주석하며 수행 정진한 인암봉록(忍庵鳳祿, 1908~1986)스님. 한국전쟁 당시 전소(全燒) 위기에 빠진 송광사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등 애사심(愛寺心)이 남달랐다. 구수한 남도사투리로 참배객들에게 송광사를 구석구석 안내했던 인암스님의 일화를 <불교신문> <불일회보> <인암시조선>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악한 말 않고 마음 착하게 쓰다 가야지”
 
평생 송광사에서 주석하며 가람수호 ‘최선’
 
일기 형식의 300여 편 시조는 ‘현대불교사’
 
 
○…송광사와 가까운 마을에서 태어난 인암스님은 은사 성남(惺南)스님과 법사 추강(秋江)스님의 회상에서 정진했다. 교학은 물론 참선에도 식견이 깊었다. 그러나 정진하다보면 마장(魔障)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고비를 잘 넘으면 공부의 세계가 더욱 넓어지고, 새로운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 <인암시조선>에는 마장을 만났을 때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낸 시조가 한편 있다. “태산령(泰山嶺) 넘어서면 평탄지(平坦地) 나온다고 하는데, 갈수록 험산(險山)이요 형극험산(荊棘險山) 첩첩(疊疊)이네, 아뿔싸 여호(女狐) 몰려들어 진퇴양난이옵네.”
 
○…인암스님이 수행하면서 흔들리지 않은 비결이 있다. 지금의 사부대중에게도 유효한 방법으로, 그것은 ‘확고한 믿음’이다. 변함없는 신심(信心)이 수행근간이었다. 스님은 평소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반드시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인암스님이 받아들인 불법의 핵심은 무엇일까. 스님은 “신(身).구(口).의(意)로 지은 업은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결과로 돌아오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면서 “특히 마음을 옳게 가져야 천당이나 극락을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학과 참선 수행을 병행했지만 스님은 “염불은 늘 했지만 좌선은 못했어라”며 당신의 수행 세계를 겸손하게 밝힌 바 있다. 스님은 “불교는 대자대비(大慈大悲) 정신이 근간”이라면서 “부처님께서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훈도 대자대비에 있다”고 했다. “나도 자비심을 베풀어야겠다 싶어 많이 노력했어라. 부처님 가르침을 이어받으려고 항상 웃음을 지어당께. 누구든 먼저 보면 웃어 버려. 그럼 상대방 기분이 좋아져 싸울 일이 없지라.”
 
<사진>평생 송광사에 주석하며 대중을 외호하고 가람을 수호한 인암스님.
 
○…1960년대 송광사를 찾은 참배객들은 인암스님의 구수한 남도사투리를 들었다. 햇볕이 내려 쬐는 한여름이나, 차가운 칼바람이 도량을 휩쓸고 가는 한겨울에도 사찰안내에 열변을 토하는 ‘할아버지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무뚝뚝한 사람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스님의 ‘명안내’를 듣고 나면,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송광사를 찾아왔을 때 인암스님과 ‘시조대결’을 한 적이 있다. 보조국사가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란 고향수(枯香樹)를 시제(詩題)로 했다. 이은상 선생의 작품이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이어 인암스님이 시조를 지었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스님은 낙천적인 성품을 지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넉넉하고 소탈한 웃음으로 넘겼다. 행자시절 인욕행을 실천하는 인암스님에게 “행자는 무엇이 그리 좋다고 매일 저렇게 웃는지 모르겄어”라는 칭찬이 따라다녔다. 훗날 스님은 행자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왕에 일을 맡았으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겄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다하는 것이 옳제.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으면 일이 풀링께. 낙담하면 안되제. 그렇게 살았어. 지금도 그렇고.”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소개(疏開,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하는 것)로 큰절을 비울 당시 참담한 심경을 <인암시조집>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우사충정(憂寺沖情)’이란 제목의 시조이다. “빈 법당 옛 부처님 산 속에 모셔두고, 부모님 떼어 내는 듯 잊을 수 없음에라. 등불 앞 불나비처럼 드나들던 일단심(一丹心).” 소개 당시 인암스님은 송광사에 보관해온 국보급 성보문화재를 천정에 숨기고 나왔다. 도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역대 조사가 물려준 성보를 생명처럼 여긴 스님은 “마지막 혼자 궁리 끝에 (보물을) 천정 속에 숨겼다”고 회고했다. 송광사로 돌아온 날 대중과 함께 비밀리에 보관한 유물을 찾아 부처님께 고(告)했다. “구출된 너희들이 고스란히 모였구나. 오늘에야 너희들 얼굴을 내다본다. 한 손에 목록 책을 들고 눈물겨워 하노라.”
 
○…송광사의 산증인 인암스님이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 아팠던 시절이 있었다. 해방 후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안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이때 송광사는 마치 ‘바람 앞에 켜진 등불’같았다. 낮에는 토벌대가, 밤에는 빨치산이 큰절을 차지했다. 총칼로 무장한 그들로 인해 스님들은 수행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인암스님을 비롯한 상당수의 송광사 스님들이 절을 지켰다. <인암시조선〉에 실린 ‘대책구수회의’라는 제목의 시조에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비우고 떠나자는 둥, 지킬 대로 지키자는 둥, 양론(兩論)도 결정전에 반군(反軍) 이미 와 있는데, 금품과 식량 등은 요구대로 뺏겼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1일(음력 4월7일) 밤 11시. 사월초파일 전날 송광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국군 장교가 송광사의 국보급 문화재를 달라고 한 것을 스님들이 거절해 발단이 됐다. 송광사 전각들이 순식간에 화마(火魔)의 입에 들어갔고, 국군은 출입을 봉쇄했다. 마을로 쫓겨난 인암스님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스님은 금당(錦堂).성공(性空)스님과 함께 경비망을 피해 큰절에 들어갔다. 벌겋게 타오르는 전각을 보고 계곡으로 달려가 장삼을 벗어 물에 적신 후 불길을 잡으려고 했다. 수십 번을 오가며 화마를 물리쳤고, 끝내 국사전(國師殿)을 지켰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스님은 취봉스님 등 송광사 대중과 함께 복원에 나섰다. 교무국장을 거쳐, 1967년에 주지로 추대된 인암스님은 복원불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송광사 대중에서는 “인암스님의 수행과 덕이 마침내 대중을 이끌어갈 원만한 덕으로 회향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길고 먼 생애를 오직 송광사를 위해 헌신하신 산증인이며 어른스님이었다”는 평이 나왔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조계산찬가(曹溪山讚歌)
 
인암스님은 평생 조계산에서 지냈다. 평상시는 물론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가람을 수호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인암시조선>에는 조계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작품이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山(산)아 曹溪山(조계산)아 네 이름이 장하구나 / 쓰러가는 祖道正法(조도정법)을 이르켜 세운 네 이름이 // 山(산)아 曹溪山(조계산)아 네 이름이 壯(장)하구나 / 億萬年(억만년) 이 疆土(강토)를 지켜 가꾸어 주신 네 모습이 // 山아 曹溪山아 네 얼굴이 찬란하구나 / 曹溪宗家(조계종가) 十六國師(십육국사)를 나 길르신 네 정성이 // 山(산)아 曹溪山(조계산)아 네 氣象(기상)이 雄壯(웅장)하구나 / 不逼風雨(불핍풍우) 億萬年(억만년)에 우리 民族(민족) 얼일런가 // 勇隆(용융)한 네 氣象(기상)이 // 山(산)아 曹溪山(조계산)아 네 모습이 柔軟(유연)하구나 / 어머니 품안처럼 慈軟(자연)스러운 네 모습이 // 山(산)아 曹溪山아 네 肉德(육덕)이 푸근하구나 / 오늘도 또 와서 나부대니 하마한들 버리시랴”
송광사에 출가하고 싶습니다
 
‘송광사의 증인’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암스님은 송광사 스님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송광사에 출가하고 싶습니다’라는 다음 글은 그 같은 스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재산 학벌 권력 세력 벌족(閥族)한 집에 가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내 나라 내 지방 내가 자라난 송광사에 출가하고 싶습니다. 비록 권력 세력 인격은 미약할지라도 마음은 인후(仁厚)하고 마음가짐이 올바르고 서로 아끼고 서로 연민히 생각하고, 높은 언덕 위로 끌어올려 붙들어 세워주실 스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잘 크고 잘 배워서 훌륭하게 되어 내가 자라난 송광사가 으뜸가는 절이 되어 세상에 명성 높은 수도장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 뿐입니다.”
 
 
 
 
■ 행장
 
1908년 순천시(현재) 송광면 낙수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기모(李基模) 선생, 모친은 이평월(李平月) 여사. 독실한 불교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절에 다니다, 18세 되던 해에 송광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성남(惺南)스님. 법사는 추강(秋江)스님.
 
송광사서 출가하고 입적
 
송광사 강원 대교과를 마치고, 수선사(修禪社)에서 4하안거를 성만하며 교학과 참선 수행을 병행했다. 1936년 대선법계(大禪法階), 1941년 중덕법계(中德法階)를 수지했다. 1955년에는 송광사 교무국장을, 1967년에는 송광사 주지로 대중을 외호했다.
 
평생을 송광사에서 수행 정진한 스님은 특히 한국전쟁 당시 화마에 삼킨 도량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고, 복원불사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한 구수한 사투리를 섞은 사찰 안내로 송광사 참배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본사 주지를 역임했지만 예금통장 하나 간직하지 않을 만큼 청빈한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그나마 있는 모든 것을 사중(寺中)에 회향했다.
 
<사진>1960년대 송광사 스님과 참배객들. 왼쪽 끝이 인암스님.
 
스님은 평생 시조(時調) 형식의 일기를 썼다. 다소 투박하지만 오히려 스님의 솔직담백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다. 스님이 원적에 든 후 제자들이 시조를 묶어 책을 펴냈다. ‘송광사순례시조(松廣寺巡禮時調)’란 부제가 붙은 <인암시조선(忍庵時調選)>이 그것이다. 300여 편의 시조가 담겨있다.
 
198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어느 날 스님은 후학들에게 “나는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시간이 다 되었어”라며 사바세계와 인연을 마칠 때가 됐음을 예고했다. 이날 “송광사에서 청춘을 바쳐 살았지만 후회는 없고 서원(誓願)이 하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임종게나 마찬가지였다. “악한 말 하지 않고 목숨 다할 때까지 마음 착하게 쓰다 가야지. 희망하는 것은 오로지 선(善)하게 사는 것이요.”
 
인암스님은 1986년 11월14일 송광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78세, 법납 60세였다.
 
 
[불교신문 2586호/ 1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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