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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76. 석종학유

 

76. 석종학유

 
 
합천 해인사로 출가해 일본 유학후 귀국한 석종학유(石鐘學乳, 1894~1933)스님은 조선불교 근대화에 앞장섰다.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만해스님과 가깝게 지냈다. 특히 24곡의 ‘불교노래’를 짓는 등 찬불가 운동의 선구자로 조선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불교(佛敎)>와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의 자료를 참고해 스님의 생애를 정리했다.
 
 
“흐르는 물 가고 못 오니 인생은 하루 봄빛이다”
 
해인사로 출가…조선불교 근대화 ‘앞장’
 
찬불가 운동의 선구자로 24곡 직접 지어
 
 
○…<불교>에는 석종스님이 작사한 24곡의 찬불가가 수록돼 있다. 삼대예식(三大禮式), 보통예식, 석가일대 등 크게 3가지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곡명은 다음과 같다. 찬불가, 불타의 탄생, 불타의 성도, 불타의 열반, 집회, 산회, 축진산(祝晉山),교당낙성(敎堂落成), 교당기념일, 화혼식(花婚式), 불전추도(佛前追悼), 정반왕궁, 백상(白象)의 꿈, 룸비니 동산의 봄, 실달(悉達)의 명명(命明), 성모(聖母)의 꿈, 염부수하(閻浮樹下)의 느낌, 선각여왕(善覺女王), 삼시전(三時殿), 궁중의 감상, 춘일(春日)의 산보, 월하(月下)의 명상, 애(愛)의 별(別), 태자의 고행.
 
<사진>석종스님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 1929년 1월 서울 각황사에서 열렸다. 오른쪽에 있는 나무가 현재 서울 조계사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다.
 
○…1926년 <불교> 29호에 처음으로 찬불가(讚佛歌)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보인 곡이 ‘찬불가’와 ‘불타(佛陀)의 탄생’이란 노래이다. 대중에게 불교를 알기 쉽도록 보급하기위해 만든 노래이다. 당시에는 찬불가를 ‘불교창가(佛敎唱歌)’라고 했다. 석종스님은 찬불가에 대해 “이 창가는 설교(說敎)하기 전에 사용할 것”이라고 첨언을 해 놓았다. ‘찬불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저 하늘 위와 하늘 밑에 가장 높고 / 이 넓은 세상 모든 인류 가운데 / 거룩하고 귀하옵신 부처님 전에(1절) / 일심을 함께 받들어서 경배합시다.(후렴) 어두운 밤에 갈바 몰라 더듬거리고 / 모든 죄에 고생하는 우리들께 / 광명과 복을 주옵시는 부처님 전에(2절) / 넓고도 넓은 바닷물이 말라버리고 / 높고도 높은 수미산이 무너질지나 / 많으신 사랑 늘 주시는 부처님 전에(3절)”
 
○…석종스님이 작사한 노래 가운데는 결혼식과 관련된 것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찰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불교>에는 화혼식(花婚式) 기사가 상당수 실려 있다. 석종스님이 지은 ‘화혼식’의 가사는 부처님 앞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는 선남선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산과 같고 바다 같이 높고 깊은 연분을, 무량겁에 쉼 없이 굳게 서로 맺어서, 이 세상에 반갑게 다시 만났네 … 영원하게 안락한 가정 일궈주시고, 무궁한 행복을 받게 하여 주소서.”
 
○…일제강점기 동경유학생들이 펴낸 <금강저> 21호에는 ‘18인 인상기(印象記)’가 실려 있다. 석종스님의 행장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故) 조학유씨는 동경 풍산대학 출신. 저! 김법룡(金法龍) 김승법(金承法) 이지광(李智光) 정광진(鄭胱震) 이혼성(李混惺) 김정해(金晶海) 김도원(金道源, 洪秀) 등 제씨(諸氏)와 함께 조선불교도일본유학생의 선배이다. 씨(氏)는 왜소한 포류(蒲柳, 갯버들)의 신체로서 뜻한바는 교원 혹은 포교사 혹은 학교경리 등 또는 조선불교혁신운동 등 그 생애가 정히 분망하였던 만큼 뜻을 반도 못 이루기 전에 몸이 먼저 가게 된 것이다. 저 <불교>에 발표한 불교창가는 불후(不朽)할 자취 남긴 씨를 지난 무진년 남해도에서 처음 보고는 작년 여름 8월29일 오후3시 북악산하 성북동 미륵당에서 모이였던 것이 영원한 최후였던 것이다. 오호(嗚呼)!”
 
○…석종스님은 <조선불교총보>에 ‘종교기원에 대하야’ ‘종교의 기초적 관념’ ‘환본(還本) 적나라(赤裸裸)하라’ ‘종교와 지식’ ‘종교의 이상’ 등 5편의 산문을 게재했다. 찬불가뿐 아니라 교학과 종교학에도 식견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기고문 가운데 지금도 유효한 가르침을 선별했다. “일시(一時)라도 종교 제재범위(制裁範圍)를 이탈하고는 우리 인류의 생활 진가(眞價)를 실각(失脚)함이로다 … 인생의 밀접관계(密接關係)의 진상(眞相)을 알지 못하고는 내가 없다.” “우리들이 종교를 불신(不信)함은 불신(佛神)의 신성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생이 큰 꿈 가운데 욕망심과 질투심(嫉妬心)과 살해심(殺害心)과 이해심(利害心)으로 가명무실(假名無實)하다.”
 
○…1932년 <삼천리> 잡지에 실린 ‘차대(次代)의 지도자 총관(總觀)’이란 글에서 석종스님은 향후 불교계를 이끌 지도자로 거론됐다. <삼천리>는 당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소임자들을 중심으로 차세대 불교 지도자를 언급했다. <삼천리>는 이 글에서 ‘조학유 씨(석종스님을 지칭)’가 교무원의 서무(庶務).문교(文敎).이재(理財).체육(體育) 등 4개 부서 가운데 ‘이재’를 맡고 있으며, 교무원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글에서 만해스님, 석전스님, 용성스님과 30여명의 청년승려가 불교지도자로 언급됐다.
 
○…석종스님은 만해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보는 단서는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만해스님 기록에 의해서다. 일제 당국에 의해 작성된 자료에 근거한 만해스님 부분에서 지인(知人)을 나타내는 ‘사회관계’에 3명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명이 석종스님이다. 3인은 강도봉(康道峯).조학유(曹學幼).박성선(朴善聖)이다. 석종스님은 항일비밀조직인 만당(卍堂)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바 있어, 만해스님과는 아주 각별한 인연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석종스님은 조선의 독립과 조선불교의 혁신을 위해 ‘짧지만 의미있는 삶’을 보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석종스님이 직접 작사한 찬불가 악보. 노래 제목은 ‘찬불가’와 ‘불타의 탄생’이다.
 
 
 
■ 어록
 
석종스님의 어록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불교>에 연재했던 찬불가 내용에서 인용했다.
 
“보리수에 꽃이 피어 모든 나라 봄 되고, 고해 중에 배를 띄어 빠진 중생 건져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행복 길을 열으셨네.”
 
“이슬같이 녹아지는 사람의 목숨, 구름같이 흩어지는 우리의 이 몸. 한번가면 못 오는 무상한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고 믿음 없도다”
 
“저 달은 밝었다, 그믐이 되고, 인생은 살었다 죽어가노라. 흐르는 물 지는 꽃 가고 못오니 우리 인생 하룻날 봄빛이로다.… 부귀영화 아무리 좋다할지나 가는 길은 빈천과 일반이로다. 세상 사람이 어찌 다 이것 모르고 오욕락에 탐착해 꿈을 꾸는가. 나는 어서 출가해 도를 구해서 …”
 
 
 
 
■ 행장
 
1894년 태어났다. 속명은 조학유(曹學乳). 고향이 어딘지 불분명하다. 합천 해인사로 출가한 후 1914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 동경에 있는 풍산대학(豊山大學)에 입학했다. 풍산대학은 지금의 대정(大正)대학. 1933년에 나온 <금강저(金剛杵)> 실린 ‘동경조선불교유학생연혁’에는 1920년에 졸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석종(石鐘)은 법호 또는 법명으로 보인다.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기고에는 차석(此石)이란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선교양종승려대회 주도
 
비밀결사체 ‘만당’ 참여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후 1921년 12월에 설립된 불교유신회에 참여했으며, 조선불교청년회 상무간사(1922년 5월)에 선출됐다. 불교유신회와 조선불교청년회는 불교개혁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청년승려와 청년불자들의 모임으로, 석종스님이 지녔던 원력을 짐작케 한다.
 
포교에도 적극 나섰다. 1927년 8월24일부터 사흘간 대구 상화사(相華寺)에서 열린 조선불교 포교사 대회에 참여했다. 이에 앞서 조선불교 포교사 대회 발기인을 맡았다. 또한 1928년 12월1일 조선승려대회 발기회 준비위원을 맡았으며, 이듬해 1월3일부터 5일까지 경성 각황사(覺皇寺, 지금의 서울 조계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소집위원 5인에 포함됐으며, 제1회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교부(外交部, 지금의 홍보부서에 해당) 소임을 맡았다. 당시 참석자 명단에는 주석처가 ‘京城(경성)’으로 되어 있다.
 
만해(萬海)스님의 뜻을 따르는 청년승려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체인 만당(卍堂)에 참여했다. 또한 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 서무과장을 지냈다고 한다.
 
1930년 10월17일 열린 조선불교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총동맹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임한 추진위원 7인에 포함됐다. 1931년 3월 불교청년동맹 창립대회와 1932년 3월 불청동맹 정기총회에도 참석했다.
 
불교개혁과 대중포교에 적극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찬불가를 작사했다. 교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찬불가 운동은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입적 과정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1933년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원적에 들었다.
 
 
[불교신문 2578호/ 1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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