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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78. 일옹혜각

 

78. 일옹혜각

 
 
국보 1호 숭례문의 단청을 하는 등 평생 ‘단청 외길’을 걸은 일옹혜각(一翁慧覺, 1905~1998)스님. 늘 하심하는 마음으로 후학을 제접하면서 계율호지를 생명처럼 여기고 정진했다. 참선 수행에도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혜각스님의 수행일화를 상좌들의 증언과, 비문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1364년 개산대재 기념 혜각스님 기증 서화특별전의 <도록>도 참고했다.
 
 
 
“단청도 수행의 한 부분…청정한 마음으로 그려야”
 
 
  숭례문을 비롯한 민족문화재·사찰 전각 ‘장엄’
 
  은사에 대한 효심 깊고 계율은 생명같이 지켜
 
 
○…“못 된 사람들. 청정한 도량에서 이런 것을 먹으라고 했어.” 화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혜각스님의 꾸지람에 대중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주도의 한 사찰에서 단청을 할 때, 누군가 사온 간식에 얇게 썰은 오징어 조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정을 모르고 먹은 혜각스님이 사실을 알고 난 후 해우소에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스님은 돌도 부처님이라면 절을 했고, 나물도 고기라고 하면 토해냈다. 깊은 신심과 천진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스님은 사찰에서 라면을 먹는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라면을 먹다 혼쭐이 난 상좌와 재가불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라면을 먹다 발각되면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그래도 스님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라면을 도량에서 먹는다는 것은 불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스님은 계율을 생명처럼 여겼다.
 
<사진>일옹혜각 스님의 노년모습.
 
○…1970년대 중반 조계사에 일이 있어 상경한 스님이 근처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절에서처럼 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잤다. 그날 밤 도둑이 들어와 걸망을 들고 줄행랑쳤다. 스님은 난감했다. 통도사로 돌아갈 일도 막막했다. 여관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돈을 빌렸다. 통도사로 돌아온 스님은 그날 서울로 간다며 다시 걸망을 챙겼다. “여관 주인에게 빌린 5000원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체국을 통해 보내거나, 다음 기회에 갖다 드려도 된다고 했지만 “내가 빌렸으니 직접 갖다 주는 것이 옳다”며 결국 서울로 향했다.
 
○…1945년 해방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금강산 성지순례를 하다 어느 석불 앞에 놓인 30원을 여비에 보탠 적이 있었다. 스님은 3년 뒤 다시 금강산에 들렸다 일부러 석불을 찾아 ‘빌린 돈’을 갚았다. 이자까지 포함해 90원을 석불 앞에 놓았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김천 직지사에서 단청을 할 때의 일이다. 단청을 마쳤는데,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이 나왔다. 약속 어기는 것을 싫어했던 혜각스님은 사중(寺中)에 추가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다. 상좌 태연스님은 “뒤늦게 소식을 들은 당시 주지 녹원스님이 초과된 예산을 지급을 해주셨고, 은사스님은 ‘고마운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커다란 병풍을 짊어진 혜각스님이 통도사 산문에 들어섰다.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 젊은 스님이 승용차에서 내려 모시겠다고 했다. 스님은 완행버스를 타고 부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스님은 택시나 직행버스를 타는 일이 없었다. 삼보정재를 아끼려는 이유에서다. 차로 모시겠다는 권유에도 혜각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나는 이렇게 걷는 게 좋네.” 하지만 노스님을 두고 갈 수는 없는 일. 스님을 ‘강제로’ 차에 모신 뒤 병풍을 실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스님을 사명암까지 모셔 드린 후 포행에 나선 젊은 스님은 깜짝 놀랐다. 혜각스님이 같은 병풍을 지고 산문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물해준 마음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님은 사명암에서 산문까지 다시 내려가 걸었던 것이다.
 
○…영축총림 통도사 성보박물관(관장 현근스님)에서 열리고 있는 1364주년 개산대재 기념 혜각스님 기증 서화특별전은 생전에 스님이 수집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혜각스님이 생전에 기증한 500여점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동원스님은 “은사 스님께서는 돈으로는 도저히 측량 불가능한 역사적 자료들을 아낌없이 성보박물관에 기증하셨다”면서 “스님의 공심과 아름다운 사상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상좌들의 기억에는 지금도 은사스님의 가르침이 생생하다. “단청은 신심이 충만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해야 불사(佛事)다. 그렇지 않으면 일하고 댓가를 받는 노동에 불과하다.” 동원스님은 은사 스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마음을 비우고 화업을 수행으로 삼아 평생을 살다 가신 스님, 자연이 스승이고 자연이 가르침이라고 일러주신 스님의 행장은 숙연한 가르침이었으며 거룩한 회상이 따로 있지 않다.”
 
○…“사람 몸 받기 힘들고 더구나 불법(佛法)을 만나 출가하여 살기 쉽지 않은데 어찌 한순간도 허비할 수 있겠는가.”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의 기억에 있는 혜각스님의 생전 가르침이다. 정우스님은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뛰어났던 단청장으로 평생 화업(畵業)에 전념하셨던 화승일 뿐만 아니라 수행에서도 철두철미했던 위대한 선승이셨다”고 혜각스님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사진>1960년대 초반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단청할 때의 혜각스님 모습.
 
○…스님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부처님 관련 기사나 사진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특히 부처님 글이나 사진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스님은 화장지도 막 쓰는 법이 없었다. 휴지를 반으로 가르고, 한쪽만 사용한 후에 말려서 다시 한 번 이용했다. 그 다음에는 그 휴지를 반으로 접고, 또 다시 반으로 접어 사용했다. 스님의 절약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휴지들을 모두 모아 해우소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단청은 수행의 한 부분이야. 근본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지. 청정심으로 그리지 않았으면 아무리 많은 공을 들였어도 가차 없이 지워버렸어”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화업을 평생 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한 번도 싫어해 본적은 없다. 출가자가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거룩한 회상을 재현하고 불당을 장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단청을 하면서 무욕의 마음을 지니려고 노력했지. 욕심이 있으면 청정해질 수 없고, 청정한 마음이 없으면, 부처님 회상을 재현할 수 없는 것이야.”
 
“어떤 상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나의 단청을 보는 사람들도 상을 내게 될지 몰라. 상을 내지 않는 것은 단청을 잘 해야 한다는 욕심마저 버려야 가능한 것이지.”
 
“부처님 제자가 되어 불보살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데 공부의 근본이 있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오묘한 진리를 체득했지. 실행의 근본은 신심(信心)이야.”
 
 
 
 
■ 행장
 
1905년 7월9일 황해도 신촌군 남부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구하(金求夏) 선생, 모친은 밀양 박씨(朴氏). 속명은 성수(聖洙). 어린 시절 스님은 상여가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달려갔다고 한다. 장례 행렬의 뒤를 따르며 상여의 문양(紋樣)을 자세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회명스님 은사로 출가
 
고서화 불교계에 기증
 
1920년 당대의 강백으로 명성이 높던 회명(晦明)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화응(華應)스님 문하에서 5년간 전통단청 기법을 전수 받았다. 1938년 강화 전등사에서 대련(大蓮)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3년 영축산 통도사에서 구하((九河)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고 일옹(一翁)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사진>통도사에 주석할 무렵 대중과 함께 찍은 사진.
 
스님은 평생 단청 외길을 걸었다. 보물 1호 흥인지문, 우정총국,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개성 안화사 대웅전, 안변 석왕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 200여 곳에 단청을 남겼다. 1992년 정부로부터 인간문화재 제48호로 지정받을 만큼 단청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해체보수작업을 한 국보 1호 숭례문의 단청도 스님 손길이 닿았다.
 
스님은 열반에 들기 몇 해 전 당신이 평생 모은 고서화를 통도사 박물관, 동국대 박물관, 해인사, 송광사, 도선사에 기증했다. “일제 강점기를 겪어오면서 귀중한 우리 고서화가 멸실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스님이 평생 정재로 문화재를 모아 영원히 보존토록 한 것이다.
 
스님은 1998년 1월2일 오전 8시20분 영축총림 통도사 사명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납 78세, 세수 94세였다.
 
상좌로는 동원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통도사 사명암 감원), 법일스님, 태연스님(서울 약사사 주지, 호계원 사무처장), 동하스님(통도사) 등이 있다. 손상좌로는 도행.도류.현고.도국.도연.도선.도설.무심.도계.도중.도광.도진.도일.도철.효진.진명 스님이 있다. 스님의 비는 영축총림 통도사에 모셨다.
 
 
[불교신문 2584호/ 1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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