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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74. 종원영재

 

74. 종원영재

 
 
일제강점기 신식 교육을 받고 충북도청에 근무하다 출가한 종원영재(宗圓英宰,1900~1927)스님. 일본 유학시절 인도철학을 공부한 스님은 부처님의 향기가 남아있는 인도 순례에 나섰다 원적에 들었다. 청년 승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신심을 지녔다는 평을 받은 종원스님의 수행일화를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불교(佛敎)> 등의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인류 문제 해결해 불타의 뜻을 빛나게 하자”
   
  
  일제강점기 인도 순례길에 나섰다 입적
 
  유학시절 ‘금강저’ 발행, 민족의식 지녀
  
   
○…1918년 ‘청년 이영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속리산 법주사로 입산하자 산내 대중의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로는 드물게 신식교육을 받고 관청에 근무하던 ‘신식 엘리트’가 출가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법주사 스님들은 ‘청년 이영재’를 두고 “재기가 팔팔한 소질에 신구 상식을 갖춘 전도유망한 소년”이라면서 “청주에 있는 도청의 나리로 신학문에 무소부지(無所不知, 모르는 바가 없음)하는 사람인데, 초월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출가하려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종원스님은 세 가지 호를 썼다. 백광(白光).범난(梵鸞).종원(宗圓)이다. 백광에는 암흑의 조선 불교계에 한 줄기 빛이 되겠다는 원력이 담겨있다. 범난에는 용수(龍樹).마명(馬鳴).세친(世親) 같은 ‘불교의 거목’이 되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리고 종원은 불법(佛法)을 원만하게 선양하겠다는 의미이다. 속성도 이씨(李氏)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석씨(釋氏)로 개칭해 편지를 보내거나 글을 쓸 때는 반드시 ‘釋宗圓(석종원)’이라고 했다.
 
○…종원스님의 신심은 깊었다. 원적에 들기 6~7년 전에 도반을 통해 금신관음불상(金身觀音佛像)을 모시게 된 후부터 인도로 출발할 때까지 매일 새벽과 저녁에 예불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과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일본에서 동문수학한 대은(大隱)스님은 종원스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음신앙을 실천했다”면서 “이영재군(종원스님)의 불교 신앙은 우리 불교청년 가운데 모범이 된다”고 칭찬한 바 있다.
 
<사진> 1926년 3월 일본 동경의 조선불교유학생 기념 사진. 가운데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종원스님이다. 당시 유학생들은 승복 대신 교복을 입었다.
 
○…법주사에서 공부할 때, 종원스님은 아침 저녁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하루는 한 스님이 뒤를 밟았다. 이때 대웅전에 들어간 종원스님은 관음주력(觀音呪力)을 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절을 했다고 한다. 또한 <천수경> <예참문(禮懺文)> 등을 꾸준히 독송하는 등 한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종원스님이 이역만리에 있는 인도 순례에 나선 뜻은 무엇일까. <불교> 44호에 수록된 대은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인도로 가는 뜻을 밝히고 있다. “불은(佛恩)이 깊어갈수록, 시류(時流)가 멀어갈수록, 말세가 혼탁하여 성도(成道)의 천양(闡揚, 드러내 밝혀 널리 퍼지게 함)을 용이치 못함을 느낄수록 성조(聖祖,부처님)를 추억하고, 갈앙(渴仰,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부처님 가르침을 간절히 찾는 일)하는 마음, 성지를 찾어가서 설산(雪山)의 흰눈이라도 한번 쳐다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구구하고 간절한 마음은 생명이라도 앗어갈듯한 강경한 태도로 아우를 강요합니다. 아우의 이번 순례걸음은 이 요청의 소사(所使)입니다.”
 
○…또한 이 편지에는 향후 계획도 담겨있다. 종원스님은 “인도철학과 고고학을 연구할 것”이라면서 “성전(聖典)에 관계있는 동식물도 상고(詳考, 꼼꼼하게 따져 검토하거나 참고하는 것)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종원스님은 “인도는 종교와 철학으로만 우리의 선진(先進)이 될 뿐 아니라, 민족운동에도 배울 것이 많으리라 믿는다”고 밝혀, 식민지하 조선 청년승려의 고민을 가늠할 수 있다.
 
○…인도 대륙의 석란도에 도착한 종원스님은 고륜모(古倫母, 콜롬보)에 머물며 성지를 순례하고, 현지 불자들과 교유했다. <불교> 27호에는 이해 6월6일 석전 박한영 스님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영호(映湖) 선생님 예하(猊下)’라는 제목의 이 편지는 콜롬보 동북쪽에 위치한 남방불교의 중심 캔디(Kandy)를 방문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불교전문학교 설립 소식을 듣고 반가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또한 놀랍고 반가운 일임니다. 중앙학림(中央學林)을 혁파하고, 당장에 전문학교를 세울 듯 하는 것이 지금까지 7~8년 늦다하면 적지아니하게 늦으나, 교단 재정으로 보아서 또한 의외에 빠르게 진전된 듯 합니다.
 
<사진> 종원스님이 일본 유학시절 도반들과 뜻을 모아 1924년 5월 <금강저>를 창간했다. 사진은 <금강저> 16호의 표지.
 
○…종원스님은 이 서한에서 영호스님에게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서(古書) 수집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지의 마지막 글에서는 석전스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불전(佛專) 경영의 경사로운 하교(下敎)를 복승(伏承)하오며, 환희(歡喜)한 마음을 복승(伏勝)키 어려워 소감과 우충(愚衷)의 일단(一端)을 들어 자애하신 선생님 전에 복달(伏達)하옵고 아울러 교학진흥(敎學振興)을 위하여 선생님 법체후신호만안(法體候神護萬安)하시길 복축(伏祝)하옵니다.”
 
법주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나의 구도생활은 이로부터 개막이다. 바라건대 나의 전도(前途)여 진검(眞劍)하여라. 철저하여라. 고난에 짐이 없으라. 그리고 구경(究竟)의 성공이 있어다오. 하등(何等)의 신광(新光)도 재귀(歸)함이 없고야 네 무슨 면목으로 동토(東土)를 밟을 것이냐.”
 
“부디 공부하여, 판검사로 나가지 말고 우리 불교계를 위해 일생을 바쳐다오.”
 
“우리는 불교로써 인류의 모든 것을 해결하여 불타(佛陀)의 큰 뜻을 영원한 생명위해 빛나게 하자”
 
 
 
 
 
■ 종원스님의 인도순례길
 
일제강점기 <불교> 24, 25, 27호에는 종원스님이 일본을 출발해 중국 상해를 거쳐 인도 대륙의 석란도(錫蘭島, 스리랑카)까지 가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도석기(渡錫記)’가 실려 있다. 날짜별로 도착한 항구나 항로, 그리고 배안에서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돼 있다. 11월16일(중국 상해), 11월18일(동지나해), 11월19일(대만), 11월20일(홍콩), 11월21일(남지나해), 11월24일(싱가폴), 11월28일(말레이해협, 피낭), 11월29일(인도양), 12월2일(석란도 콜롬보). 이 기록에 따르면 상해부터 석란도까지 17일간 배를 타고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출발한 시점까지 감안하면 약 20여 일간 험한 뱃길을 헤치고 인도 대륙에 도착했다.
 
 
 
 
■ 행장
 
초월스님 영향…법주사 출가
 
동경제국대서 인도철학 공부
 
1900년 충북 청주군(지금의 청주시) 청주면 외산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재(李英宰). 유복한 집안에서 부러움 없이 성장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5~6세부터 10세까지 독선생(獨先生)에게 한문을 공부했다. 11세에 청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주성초등학교)에 입학했다. 70여명의 동급생 가운데 1등을 놓치지 않고, 수석 졸업하는 등 학업성적이 좋았다. 졸업 후 당시 청주에서는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청주농업학교(지금의 청주농고)에 진학했다. 이 시절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결혼했으며, 농업학교를 마치고 충북도청 학무계(學務係)에서 근무했다.
 
<사진>종원스님의 일본유학 시절 사진. <불교> 41호에 실려 있다. 
 
청년이 되기 전까지 불교와 인연이 닿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들과 교회에 다녔다. 하지만 교리의 모순에 회의를 느끼고, 외국인 선교사와 신부의 잘못된 행동에 반감이 생겨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속리산 법주사 주지 남파(南坡)스님과 초월(初月)스님을 만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청주 용화사 포교사로 있던 초월스님의 영향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1918년 가족에게 아무 연락도 남기지 않고 속리산 법주사로 입산했다. 남파스님을 따라 지리산으로 가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당시 법주사 주지 호암(護庵)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했다. 출가후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치고 <화엄경>을 익혔으며, 와세다(早稻田)대학 문과 강의록을 구독하는 등 내외전을 익혔다. 마침 법주사 강사로 온 대은스님에게 <능엄경> <반야경> <원각경> <기신론> 을 배웠다.
 
포광(包光)스님과 남파스님이 주선하여 구례 천은사 공비(公費)유학생 자격으로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9월 일본 종교대학(宗敎大學)에 입학하여 1924년 4월 졸업했다. 곧바로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해 고남(高楠) 교수 문하에서 범어와 빨리어를 배웠다. 유학시절 청년회 간사를 지냈고, <금강저(金剛杵)>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1926년 9월 도반들에게 인도 행을 알렸다. 20여 일 간의 항해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했으며, 콜롬보에서 병마와 싸우다 1927년 10월11일 오후2시 입적했다. 세수 28세.
 
 
[불교신문 2574호/ 1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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