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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72. 우화도원

 

72. 우화도원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고 꾸밈없이 천진난만한 수행자가 있었다. 불필요한 말은 일체 하지 않으며, 단순 담백하게 정진한 우화도원(雨華道元, 1903~1976) 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만공.혜월.한암.용성.운봉 스님 등 선지식 회상에서 두루 정진한 우화스님은 천진 미소로 대중을 맞이하며 법의 향기를 전했다. 우화스님의 수행 일화를 제자인 일륜스님(광주광역시 다보선원장)의 회고와 <청강일화(靑岡一花)>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진리에 지름길 없으니 공부하는 수 밖에 없어”
 
 
  천진미소로 대중 맞이하고 ‘법향’ 전해
 
  홀로 있어도 죽비 곁에 두고 정진 몰두
  
 
○…우화스님은 마루 끝에 앉아 졸고 있는 일이 많았다. 노성벽력(怒聲霹靂)이 내리쳐도 좀처럼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낯선 이가 찾아와 깨우면 “어디서 왔어요”라며 반갑게 맞이했던 노스님이다. 누구를 만나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주골의 도인 할아버지’란 정겨운 별명도 얻었다.
 
○…사실 우화스님의 외모는 남들의 눈길을 끌 만큼 특이했다. 일타(一陀)스님이 찬을 한 비문에도 스님의 외모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그 모습이 원래 도승(道僧)의 골격으로 약간 울룩불룩하지만 ……” 이어 일타스님은 “착하고 순하기 비할 데 없어 사람들은 부르기를 부처라고 별명 하였다”고 우화스님의 천진한 성품을 밝혀 놓았다.
 
<사진>1975년 음력 3월 나주 다보사에서 봉행된 가사불사 당시 ‘삼처전심’을 주제로 법문을 하는 우화스님. 사진제공=광주 다보선원장 일륜스님
 
○…우화스님은 평생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는 언제나 죽비가 있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참선에 들 때도 죽비가 있었다. 여명이 밝지 않은 새벽녘이나 어둠이 도량을 가득채운 한밤중에도 스님이 홀로 머무는 방에서는 참선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새어 나왔다. 스님은 잠을 잘 때도 오른쪽으로 누워 ‘칼잠’을 잤다. 편히 눕는 법이 없었다. “부처님도 오른쪽으로 누우셨으니, 나도 그리해야 된다”는 것이 스님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스님은 수행하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홀로 있어도 발우를 펴고 공양을 했다. 물론 이때도 죽비를 들었다. 그만큼 수행이 철저했다. 시자가 공양을 갖다드리면, 스님은 발우에 밥과 반찬을 옮겨 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밥상은 마루에 물려 놓은 채 말이다. 상좌가 “시님, 뭐땜시 혼자 계신데 죽비를 치시고, 발우공양을 하셔요”라고 질문하면, 우화스님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스님은 양치질과 세수도 혼자 했다. 그것도 세면장에서 하지 않고, 당신 방에서 했다. 목욕탕에도 가는 법이 없었다. 여름이나 겨울이건, 해가 떨어져 깜깜해지면 절 뒤에 있는 계곡에서 몸을 씻었다. 양치질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칫솔을 움직였다. 상좌가 “시님, 누가 본다고 손으로 입을 가리세요”라고 물으면, 스님은 천진미소를 보이며 “보잘 것 없는 이 몸을 넘에게 보이면 쓰겄냐. 부처님 제자가 되어 티끌만치라도 넘에게 불쾌감을 주면 되겄냐.”
 
○…우화스님의 정진력(精進力)과 신심(信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몸이 아파도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고, 오히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직 불전(佛前)에서 “관세음보살”을 정근하는 것이 전부였다.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첫 번째 계율을 마치 호랑이 보듯 엄격히 지켰다. 미물이라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스님의 변함없는 생각이었고, 이를 평생 실천했다. 관련된 일화 하나. 어느해 여름. 여느날 처럼 참선에 들었다. 방안을 날아다니던 모기가 참선에 든 스님에게 달려 들었다. 웬만하면 모기를 잡거나, 아니면 몸을 움직여 도망가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기들은 마음 놓고 포만감을 즐겼다. 상좌가 “시님, 왜 모기를 안 잡으요”라고 물으면 “지가 좋아서 빨아 먹는데, 뭐하러 잡냐”고 반문했다. 보다 못한 상좌가 은사 몸에 붙은 모기를 입으로 불면, 배가 빵빵해진 모기가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우화스님의 절약하는 생활은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었다. 고무신 한 켤레를 5~6년 신는 것은 보통. 그나마 고무신은 외출할 때만 신었다. 절에서는 당신이 직접 만든 짚신을 신었다. 제자나 신도들이 새 고무신으로 바꾸라고 권해도 스님은 “아직도 멀쩡한데, 뭐하러 바꾸냐”고 했다. 당신의 의복은 남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빨래를 했다. 빨래하다 보면 나오는 비누 거품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거품을 다시 끌어모아 그릇에 담아 재활용했다. 쓰고 난 성냥개비도 버리지 않고 모아 불쏘시개로 활용했다.
 
○…우화스님은 돈을 쓸 줄도 몰랐다. 간혹 불사금이 들어오면 다 모았다. 수좌들이 찾아와도 여비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꾸어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주었다. 그같은 소문을 전해 들은 도둑이 들었다. 스님은 “꾸어달라”는 도둑의 말을 그대로 믿고, 돈을 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꾸어준 돈’에 대해선 그 날로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것은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빌려간 것은 다음 생에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줄 것이란 스님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나는 큰 깨달음은 고사하고, 작은 깨달음도 이루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 진리에는 지름길이 없어.”
 
“어차피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돌아가는 것이여.”
 
 
 
 
■ 전법 스승 운봉스님
 
우화스님은 전국을 만행(萬行)하는 과정에서 운봉스님을 만났다. 운봉스님은 경허스님과 혜월스님의 법을 이은 선지식이다. 운봉스님은 우화스님의 공부 깊이를 알고 법을 전했다. 특이하게도 ‘꿈을 전하는 게송’이라는 의미의 ‘전몽게’(傳夢偈)라고 쓰여 있다. 향곡(香谷)스님도 운봉스님의 법제자이다. 1935년 7월15일(음력)에 전한 게송으로 내용은 이렇다. “ 因緣所生法(인연소생법) / 悉皆本無性(실개본무성) / 若了知性理(약료지성리) / 摩倻元是女(마야원시녀)”
 
 
 
운봉스님이 우화스님에게 전한 게송(사진 위)과 우화스님의 법맥도(사진 오른쪽).
 
 
 
■ 우화스님의 법문
 
1975년 3월(음력) 나주 다보사 가사불사 회향법회에서 우화스님은 주장자를 들고 법상(法床)에 올랐다. 이날 스님은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전한 ‘불설(佛說) 삼처전심(三處傳心)’을 주제로 법어를 했다. 제자 일륜스님의 저서 <청강일화>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다음과 같다.
 
“常憶江南(상억강남) 三月裏(삼월리) / 處(자고제처) 白花香(백화향) / 多寶塔前(다보탑전) 分半座(분반좌) / 洞下(동하) 相逢不相識(상봉불상식) / 千年古木(천년고목) 烏飛兎走(오비토주)” “항상 생각하는 강남 삼월속에 자고새 우는 곳에 일백꽃 향기가 진동하도다 / 골 아래서 서로 만났지만 서로 알지 못하더라 / 천년고목에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뛰어 달아나더라 ”
 
 
 
■ 행장
 
1903년 4월 7일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에서 부친 이규준(李奎俊) 선생과 모친 하남(下南) 정씨(程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운봉스님 법맥 계승
 
다보사서 30년 주석
 
어려서부터 묵묵히 앉아 있기를 좋아 했으며, 혼자 있어도 울거나 보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절감한 것이 출가 동기가 됐다. 덕유산으로 입산해 영각사(靈覺寺)에서 영명(靈明)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사문으로 첫발을 내 딛었다.
 
해인사 불학강원(佛學講院)에서 교학을 연찬한 후에는 참선 수행의 길을 걸었다.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해 오대산, 묘향산 등 명산대찰에서 만공.혜월.한암.용성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만공스님 회상에서는 성철스님과 같이 공부했으며, 만공스님이 많은 수좌 가운데 “성철수좌가 1등이고, 우화수좌가 2등”이라고 했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행각참상(行脚參商)하며 공부의 깊이를 더 하는 과정에서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脫落身心(탈락신심)하고, 身心脫落(신심탈락)이여, 雲浮靑山(운부청산)에 一峰(일봉)이 獨露(독로)로다.”
 
<사진>운봉스님이 전한 ‘전몽게’의 겉봉투.
 
1935년에는 운봉(雲峰)스님이 조실로 있는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정진했다. 이때 운봉스님의 법제자가 되면서 우화(雨華)라는 법호를 받았다. 우하(雨下)라고도 한다. 해방 후에는 나주 다보사에 주석하면서 수좌를 제접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일생을 보냈다. 단순담백하고 천진무구한 모습과 음성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스님은 1967년 10월 1일 “금성산(錦城山)에도 해가 저무는 구나”라면서 “각자 노력하라”고 당부한 후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 법납 60세였다. 스님의 비는 1977년 봄 나주 다보사에 모셨다.
 
상좌로 적명(寂明, 문경 봉암사 수좌).정진(正眞).일륜(一輪, 광주 다보선원장) 스님 등이 있다.
 
 
[불교신문 2570호/ 10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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