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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70. 동헌완규

 

70. 동헌완규

 
 
조선시대 명문사대가이며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에서 출생한 동헌완규(東軒完圭, 1896~1983)스님. 당대 선지식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은 용성(龍城, 1864~1940)스님의 제자로 은사를 시봉하며 수행했다. 내외전(內外典)과 선교(禪敎)를 두루 갖추고, 대중을 자비심으로 섭수했던 동헌스님의 수행일화를 상좌 도문스님(원로의원)의 회고와 화엄사에 있는 비문을 참고해 정리했다.
 
 
 
“중생제도와 불법중흥 위해 위법망구로 정진하라”
 
  
  용성스님 법맥 계승…은사 유훈 실천 ‘외길’
 
  내외전 · 선교 겸비…자비심으로 대중 섭수
 
 
○…세속에서 유가(儒家)의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신학문을 마친 동헌스님은 용성스님 회상으로 출가했다. 1912년부터 1917년까지 6년간 행자로 은사를 모시며 불가의 가르침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연스럽게 지니게 됐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용성스님에게 감화 받은 ‘소년 완규’는 벼슬에 나서기를 포기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출가당시 동헌스님은 “공자님은 지행(知行)을, 부처님은 신수봉행(信修奉行)의 가르침을 남겼다”면서 “공자님은 ‘아는 것을 실천한다’고 했는데 비해, 부처님은 ‘바른 믿음을 닦고 그것을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었다”고 했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이 서울 시내 태화관에 모였다. 불교 대표로 용성스님과 만해스님이 참석했다. 용성스님이 동헌스님을 은밀히 불러 당부했다. “민족대표 29인의 신발과 웃옷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라. 그리고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즈음에 헌병대와 종로경찰서에 신고를 해라.” 스승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했지만, 동헌스님은 의아해했다고 한다. 훗날 용성스님은 그같이 지시한 뜻을 동헌스님에게 말해 주었다. “민족대표라고는 하지만 우리끼리 선언서만 낭독하고 흩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붙잡혀 가서 사회적으로 알려져야 조선 전체에 독립운동의 파장이 생길 것이다. 혹시 도망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옷과 신발을 숨기라고 한 것이야.”
 
<사진>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헌스님. 1976년 촬영한 것이다.
 
○…3.1 만세운동으로 용성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은사가 차가운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이지만 동헌스님은 제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 종로에 있는 대각사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찾아가 문안을 올렸다. 교통편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 걸어가야만 했다. 매일 면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형무소 밖에 도착해 은사의 조석 문안을 올리는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날 또는 그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용성스님이 7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오는 날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헌스님은 하루도 어기지 않았다. 은사에 대한 지극한 효심(孝心)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동헌스님은 하심(下心)하는 마음가짐으로 후학들을 지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신이 직접 법문을 하지 않고 제자에게 설법을 하도록 한 것이다. 법상(法床) 위에서 제자가 설법을 할 때, 동헌스님은 대중과 함께 법당에 앉아 진지하게 청취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엄격하게 지도하고 경책했지만 제자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용맹정진하면 “당연히 할 일”이라면서도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제자인 도문스님이 폐문(閉門)한 채, 7일째 용맹정진 하던 날, 동헌스님이 문밖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도문 법사, 쥐가 파먹어. 이제 그만하고 어서 문 열어.” 오랫동안 좌선을 하고 있으면 죽은 줄 알고 쥐가 발바닥을 갉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제자를 아끼는 은사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동헌스님의 일상은 오전2시30분에 시작됐다. 예불 후에는 은사 용성스님이 내린 화두 ‘시심마’를 참구하며 좌선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틈틈이 붓글씨를 썼는데 동헌스님의 글씨는 명필로 손 꼽힌다. 스님은 반야심경과 ‘심즉시불(心卽是佛)’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글씨를 주로 썼다. <대반야경>의 정요(精要)를 뽑은 핵심 가르침으로, 반야의 경지에 이르러야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반야심경이 대승의 공부 길이었기 때문이다.
 
장수=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행장
 
1896년 6월14일(음력) 충남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 150번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덕영(李德榮) 공이고, 모친은 임영규(林榮圭) 여사이다. 본관은 용인이며, 속명은 완규(完圭)로 출가후 법명으로 사용했다. 또 다른 법명은 태현(太玄)이고, 법호는 동헌이다. 대대로 대제학과 판서 등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연꽃 밭에서 69송이의 연꽃을 꺾는데 잘생긴 동자승이 출현하는 태몽을 꾸었다.
 
 
명문가 후손으로 ‘출가’
 
화과원 설립 ‘선농일치’
 
 
1903년부터 외가가 있는 부여의 한문서당과 부친의 지도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비롯해 소학.대학.중용.춘추.예기 등 한학을 깊이 공부했다. 충남 연기의 광동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아, 신구학문을 두루 겸비했다.
 
1918년 청나라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읽다 신심이 일어나 수행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집안 어른들과 교분이 깊은 용성스님에게 감화 받아 서울 대각사로 출가했다. 이후 수년간 용성스님을 시봉하면서 교학을 마쳤다.
 
<사진>제자인 도문스님(현 조계종 원로의원)과 함께 한 동헌스님(오른쪽).
 
1923년 용성스님에게 ‘시심마(是甚)’ 화두를 받고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행했다. 묘향산 상비로암(1925년)에서 정진했으며, 1926년 4월 장성 백양사에서 금해(錦海)스님에게 비구계를 받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했다. 1927년에는 용성스님을 모시고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해 선농일치를 실천했다. 1930년부터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화엄사 탑전, 직지사 천불선원, 서울 대각사, 금강산 마하연, 천성산 선원, 범어사 금당선원 등 제방에서 정진했다. 1934년 8월 하동 칠불암 운상선원(雲上禪院)에서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성취하고 오도송을 지었다. 이때 용성스님에게 동헌이란 당호를 받았다. 이로써 ‘석가여래부촉법 제69세, 석가여래계대법 제76세, 조선불교중흥률 제7조’가 됐다.
 
1940년 용성스님이 ‘유훈십사목(遺訓十事目)’을 부촉하고 열반에 든 후, 일제의 폭압을 피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사형(師兄) 동산스님을 도와 정화불사에 참여했다. 그 뒤로 속초 신흥사 주지, 김제 금산사 주지, 전북 종무원장, 부산 범어사 주지, 경주 분황사 주지 등의 소임을 지냈다.
 
1969년 용성스님의 조국독립과 불교중흥 운동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대각회(大覺會)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971년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으며, 공주 마곡사.의성 고운사.장성 백양사.구례 화엄사 조실로 후학을 지도했다. 1983년 8월 4일(음력) 화엄사 구층암에서 유촉(遺囑)을 묻는 제자들에게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법납 66세, 세수 88세. 동헌스님 진영은 화엄사와 장수 죽림정사에 봉안돼 있으며, 지난 9월22일 원적 26주기를 맞아 화엄사 비림에서 사리탑비 제막식이 봉행됐다. 은법상좌로 도광.도원.도문.도만.도철.도오.도열.혜원.정준.도림.도실.도주.도업.도흥.도민.법원스님을 두었다.
 
 
 
■ 어록
 
“선은 마음을 안락 자재한 경계에 소요하게 하는 것이다.”
 
“선은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正學)이며, 팔정도인 정정(正定)이고,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禪定)인 것입니다.”
 
“선은 마음을 닦는 수심법(修心法)입니다. 마음을 닦는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때문에 선은 마음으로 닦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경(究竟)에는 닦는 마음도 닦을 마음도 없는 것이 참다운 선인 것입니다. 이러기에 선의 심오한 경지를 말로나 논리로나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의식(計較意識) 작용으로는 이룩할 수 없고 다만 참 지혜로써 홀연히 깨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곧은 마음이 바로 부처님(直心是佛)이다.”
 
“출가한 초지(初志)를 망각하지 말고 신심과 원행을 견지하면서 중생제도와 불법중흥을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정진하라.”
 
 
 
출가시
 
孔孟第一道(공맹제일도)
確信何日中(확신하일중)
親見佛祖道(친견불조도)
發心行出家(발심행출가)
 
 
나는 공자님 맹자님의 가르침이 제일이라
확신하고 살아가는 어느 날 다행스럽게도
불타 조사의 가르치심을 친견하게 됨으로써
발심을 하게 되어 출가를 행하게 되었음이로다.
 
 
 
오도송
 
無言智異山(무언지리산)
無說亦七佛(무설역칠불)
無問麽(무문시심마)
無心親白雲(무심친백운)
 
 
지리산은 말이 없으니
7여래불 또한 말씀이 없으시도다.
시삼마 화두가 무엇이냐고 물음이 없으니
저 푸른 하늘 흰 구름은 무심과 친하도다.
 
 
[불교신문 2566호/ 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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