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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8. 향봉향눌

 

68. 향봉향눌

 

출가 전 한학에 조예가 깊고 선비의 기상을 지녔던 향봉향눌(香峰香訥, 1901~1983)스님. 반듯한 선비로 출가 전에는 관직에도 나서고, 일본 대학에서 공부한 향봉스님은 출가 후에는 교와 선을 겸비하고 오직 수행정진에 몰두했다.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향봉스님의 수행일화를 청현(광주 무각사 회주).철우(대구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청학 (광주 무각사 주지) 스님의 회고와 <운수산고>를 참고해 정리했다.

 

 

“화두는 생명의 불꽃같은 커다란 의심”

   주지 소임 맡지 않고 ‘오직 참선수행’ 몰두

   강직한 성품이지만 ‘자비심’으로 대중 인도

 

○…향봉스님은 상주 남장사 주지 15일과 중앙종회의원 몇 달이 소임의 전부였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소임을 사는 것도 대중을 외호하는 공덕이 있지만, 마음 닦고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늘 강조했다.

○…출가 전 마을에서 한학을 깊이 공부한 선비였던 스님은 붓글씨뿐 아니라 그림에도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수행하는 틈틈이 글씨와 그림을 그렸다. 상좌 청현스님의 기억에도 은사의 이 같은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1950년대 중반 경주 오봉산 사주암에 주석할 무렵, 향봉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직접 만든 연등에 불보살 그림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어 장엄했다고 한다.

○…선(禪)과 교(敎)를 두루 갖춘 향봉스님은 후학들에게 특히 참선 수행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출가자는 사집(四集)정도 본 후에는 참선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당부했다.

<사진> 선비정신과 수행자의 위의를 동시에 갖추고 평생 정진한 향봉스님이 서울 법련사에서 찍은 사진. 출처=‘운수산고’

○…스님의 성품은 강직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따끔하게 지적하여 바로 잡았다. 부산 범어사 선원에서 입승을 볼 때 어찌나 엄격하게 수좌들을 지도하는지, 무척 어려워 했다고 한다. 수좌들이 향봉스님의 수행원칙을 꺽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해제후 범어사 선원을 떠나는 날 수좌들이 “저 노장 잘 간다”며 속마음을 나누었다고 한다. 서울에 일이 있어 조계사에 머물 당시, 간혹 승려의 위의를 떨어트리는 복장을 한 스님을 보게 되면, 누구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치고 바로 잡았던 ‘호랑이 스님’ 으로도 유명했다.

○…향봉스님은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재물보다는 불연(佛緣)을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이같은 뜻을 담은 향봉스님의 대중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재가불자 여러분, 진실한 신앙이라면 먼저 자녀를 여하한 방편을 다해서라도 하루 속히 발심(發心)케 하여 참다운 불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세태의 험난한 길을 극복할 도리를 달리 구할 길은 없는 것이요. 만일 밖으로 달리 구하려면 증사작반(蒸沙作飯)입니다. 모래를 쪄서 밥이 아니 되는 것은 오히려 헛수고이고, 다른 병은 없으나 길을 잘못 든 외도의 병은 갈수록 점점 더 기구한 고액(苦厄)이 층생첩출(層生疊出, 일이 여러 가지로 겹쳐 자꾸 생겨나는 것)하게 마련입니다.”

○…노년에 조계총림 방장 구산(九山,1909∼1983)스님의 권유로 송광사로 돌아온 향봉스님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았다. 스님은 말년에 당신이 주석하던 요사채 앞에 단풍나무 한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시봉하는 제자가 건강을 염려하여 만류했지만 “심어 놓으면 후인(後人)들이 볼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향봉스님이 강릉 백운사에 주석할 무렵 청학스님이 시봉했다. 정성을 다한 간병으로 효상좌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엄격하고 빈틈이 없었던 향봉스님을 모시는 일이 쉽지 않았다. 회초리와 호통에 마음에 멍든 적도 여러 차례. 도저히 시봉하는 일이 어렵다고 판단한 청학스님은 걸망을 싸고 떠나려고 마음 먹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떠나려던 제자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불을 걷어 차버리고 자는 제자가 탈나지 말라고 이불을 덮어 준 노(老)은사의 마음을 그날 새벽에 알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는 찬바람이 불 정도로 엄격한 향봉스님이었지만, 재가불자는 자비심으로 대했다. 간혹 재가불자에게 반말하는 제자가 있으면 “말을 놓지 마라. 출가한 이가 청신사 청신녀에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향봉스님은 후학들에게 “대중이 스승이니, 독(獨) 살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청학스님에게도 “너는 혼자 살지 말고, 대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주지가 되면 반드시 100일이든 1000일이든 기도를 해야 한다”고 권했다. 수행자가 대중 속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 이었다. 

광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게 송 /

운수납자로 행각(行脚)에 나섰던 어느 날 향봉스님은 선열(禪悅)의 소회를 담은 게송을 지었다. 비문에 실린 이 게송은 다음과 같다. “凝然一朶開(응연일타개) / 便是本鄕臺(변시본향대) / 空壁相尋坐(공벽상심좌) / 玄關返照來(현관반조래) / 今朝此解制(금조차해제) / 幾劫曾輪(기겁증윤형) / 自笑春消息(자소춘소식) / 歸家始看梅(귀가시간매)”

 

“뚜렷이 한송이 꽃 피었으니 / 여기가 바로 나의 고향일세 / 빈 벽을 향해 얼마나 찾았던고 / 조사의 참뜻이 이제 드러났네 / 오늘 아침 해제에 이르도록 / 그동안 몇 겁이나 헤맸던가 / 봄소식을 알자 한바탕 웃고 / 집에 돌아와 매화를 바라보네.”

<사진>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던 향봉스님의 그림. 소박함이 가득하다. 그림 속의 삿갓 쓴 인물 가운데 한명이 출가전 금강산 순례에 나선 향봉스님이다. 출처=‘운수산고’

 

 

어록 /

 

“선(禪)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출세도중(出世道中)에서도 그 차원의 참다운 진의식(眞意識)에 연마와 연성을 가하셔서 백천간두에 다시 한걸음 나가는 아량(雅量)으로 완벽을 갖추어야만 자타(自他)를 모두 이롭게 할 참고(參考)의 실마리가 풀리는 함양 그것이 가장 요긴하리라고 사료됩니다.”

“매양 밖으로 시야를 넓히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안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시간을 적당히 두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는 본분사(本分事)에 큰 인연이 될 줄로 아는 바입니다.”

“다행히 불법문중(佛法門中)에 발심하여 앞에 놓인 분명한 길을 두고 무슨 노정기(路程記)만을 일삼느니보다는 자신이 한 발자국 걸어가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거듭하여, 일단 지(知)와 해(解)가 민멸(泯滅, 자취나 흔적이 아주 없어 짐)하고 능(能)과 소(所)가 망각되고, 홀연히 정문(頂門)의 안목을 얻으면 이제 우리 앞에는 불국토가 건설되는 동시에 다툼 없는 세계평화가 올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문제란 남이 해결지어주는게 아니고 자기의 딛고 선 각답하(脚踏下)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량 여부에 고정돼 있는 것이다.”

“화두란 의심이야, 알음알이에서 생기는 가벼운 의심이 아니라 생명의 불꽃처럼 커다란 의심이야”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자만이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는거야”

<사진> 향봉스님의 친필. ‘白鷺橫江(백로횡강) 水光接天(수광접천)’. “밤 이슬은 강을 비끼고, 물 빛은 하늘에 이었더라”는 뜻이다. 출처=‘한국고승유묵전 자료집’

행장 /

1901년 5월16일 전남 보성군 축내리에서 부친 임준구(任準球)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임보극(任普極).

일찍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지만, 세속의 명예와 이익이 무상함을 체득하고 출가했다. 출가 전에 이미 ‘송운(松韻) 거사’로 불리며 독실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향봉스님은 1940년 4월15일 조계산 송광사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향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2년 3월15일 부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東山)스님에게 보살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참선에 몰두했다.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3하안거를 성만했으며, 덕숭산 수덕사 만공(滿空)스님 문하에서 2하안거를 마쳤다. 이어 오대산 상원사 선원 한암(漢岩)스님 회상에서 3년간 정진하는 등 수행자 본연의 자리를 지켰다. 이후 스님은 동래 금정선원을 비롯해 도봉산 망월사와 충무 용화사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공부를 이끌었다.

석두스님 회상서 출가

한학과 新 학문 ‘겸비’

1954년 정화불사가 시작되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스님은 상주 남장사 주지를 15일간 한차례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소임을 사양했다. 정화불사 직후 지리산 화엄사 주지로 임명됐지만 끝내 맡지 않았다.

1954년 강원도 명주군(지금은 강릉시) 연곡면 만월산 백운동 옛절터에 세운 백운사(白雲寺)에 20여 년간 주석했다. 1977년 가벼운 질환을 보이자, 구산스님의 청으로 30여년만에 송광사로 돌아와 임경당(臨鏡堂)에 머물렀다. 스님은 1983년 4월19일(음력) 서울 법련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3세, 법납 44세. 그해 4월23일 송광사에서 총림장으로 영결식을 봉행하고, 부도는 조계산과 만월산에, 비는 송광사에 모셨다.

청현(淸賢, 광주 무각사 회주).청우(淸宇, 강릉 등명낙가사 주지).철우(哲牛, 대구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청전(淸典, 티베트서 수행).청학(淸鶴, 광주 무각사 주지) 스님 등이 제자이다. 향봉스님의 법어와 게송을 모은 <운수산고(雲水散稿)>와 <수양(修養)의 다화(茶話)>를 제자들이 펴냈다.

 

[불교신문 2557호/ 9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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