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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6. 회명일승

 

66. 회명일승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등 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수행 정진한 회명일승(晦明日昇, 1866~1951)스님. 금강산 건봉사는 물론 경향 각지, 나아가 만주까지 오가며 중생제도의 보현행을 실천한 선지식이다. 회명스님의 수행일화를 <회명문집> 내용과 손상좌 태연스님(서울 약사사 주지) 등의 도움으로 정리했다.

 

  

“마음 근원 못 깨달으면 고해서 벗어나지 못해”

  

  격동의 세월 거치며 수행·포교에 헌신

  시주물 여러 사찰 보시…무소유 실천

   

○…“그 사람 글은 많이 아는지 모르지만 중은 아니더라.” 명성이 널리 알려진 스님의 초청을 받아 공양한 후 돌아온 회명스님이 탄식을 했다. 대중이 궁금해 하니, 회명스님이 이유를 설명했다. “중이 되어서 병풍에 비단 요이불에 진수성찬을 먹고 사니 그 시은(施恩)을 다 어떻게 하겠느냐.”

○…양친과 은사에 대한 효심이 누구보다 깊었다. 18세 되던 해 은사를 모시고 경성에서 일을 보고 건봉사로 돌아오는 길 이었다. 홍천군 양덕원의 어느 여관에 투숙했다가 다음날 건봉사로 출발할 때였다. 은사스님이 “걸음이 씩씩한 네가 앞장서 가면 내가 힘을 다해 뒤따라가겠다”며 회명스님이 앞서 가도록 했다. 은사 스님 말씀대로 앞장서 가다보니 어느덧 40리길이나 되었다. 그때 양덕원 여관에 은사스님의 풍차(風遮)를 놓고 온 것을 알게 됐다. 풍차는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방한용 두건이다. 회명스님은 그길로 40리 길을 돌아가 풍차를 찾은 후 다시 40리를 돌아왔다. 은사스님에 대한 효심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사진>석정스님이 그리고 찬한 회명스님 진영. 1991년 작품. 출처=‘회명문집’

○…모친에 대한 효심도 남달랐다. 어린 시절 모친을 잃은 스님은 1915년 6월16일 모친 묘소를 찾아 화장 천도하면서 지은 축원 내용은 심금을 울린다. 비록 출가사문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스님은 “지금 인계(忍界)에서는 유(幽)와 현(顯)이 현격하여 아무리 애모하여도 은덕의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기 어려우니 이에 청정한 향을 올리며 엎드려 비옵니다”라고 축원했다.

○…“… 과거부터 / 오늘까지 / 깊이든 잠 / 꿈만 꾸니 / 인간백년 / 사는 동안 / 모든 일이 / 꿈결이라 …” 회명스님이 직접 지은 ‘회명산인 자책가’ 가운데 일부이다. 이 자책가에서 스님은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닫고 수행정진에 힘쓸 것을 후학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 일심이면 / 마음이니 / 마음으로 / 구하시오 / 마음부터 / 모르며는 / 구하는 게 / 허사이니 / 그 마음을 / 알자하면 / 반조자성 / 이무엇고…”라며 마음 자리를 찾으라는 당부도 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사문이 죽음에 열 가지 후회’ ‘여자가 죽어서 열 가지 후회’라는 4.4구의 노래 가사도 남겼다.

○…“내가 죽거든 헌옷으로 갈아입히고 흙으로 살짝 덮어 짐승이나 벌레들이 먹게 해주고 3년상도 지내지 말라.” 평소 검소하게 생활한 회명스님이 세상을 떠난 뒤에 번잡하게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당부 했던 말이다. 스님이 남긴 한시(漢詩)에도 같은 뜻이 담겨있는 구절이 있다. 스님은 ‘생사토(生死土)’라는 시에서 “비록(내가) 어느 곳에서 죽더라도 문상을 하지 말라”면서 “부고를 알지지 않는 것이 나의 뜻”이라고 밝혔다. 또한 ‘거상(居喪)’이란 시에서는 두건과 상복을 입는 세속의 장례풍습이 불가에 미친 것을 개탄하고, “스님들이 수고로히 염불하면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다”고 강조했다.

○…회명스님은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청빈의 전형을 보였다. 시주가 들어온 것은 단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회명스님은 논 358두락(斗落)과 4만1210냥을 건봉사를 비롯해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신흥사, 백담사 등 수십여 사찰에 흔쾌히 내 놓았다. 두락은 한 말(斗)의 씨를 뿌리는 데 적당한 토지 면적으로 흔히 ‘마지기’라고 불렀다. 대체로 논은 150~300평, 밭은 100~400평이 한마지기이다. 요즘 산술법으로 하면 스님이 무주상 보시한 논은 적게는 17만7521㎡(5만3700평), 많게는 35만5041㎡(10만7400평)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사진>1941년 3월 15일 관음사 포교당 대각사에서 찍은 회명스님 사진. 자료제공=제주 관음사

○…스님은 제주불교와 인연이 깊다. 제주도는 한때 ‘절 500, 당(堂) 500으로 불릴 만큼 불교세가 강했지만, 조선중기 이후 모든 절이 폐사되는 암흑기를 겪었다. 스님은 1921년 제주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을 비롯해 1924년 제주 관음사 불사에 증명으로 참여하고, 이듬해에는 제주포교당을 건립해 367명에게 계를 주는 등 제주불교의 중흥을 일구었다. 봉려관 스님 역시 회명스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이성수 기자

 

■ 어록

“대저 지극한 성인은 참된 법성(法性)으로 그의 몸이 되었다. 그러기에 본래 나고 죽고 함이 없지만 구경각(究竟覺)으로 그의 지혜를 삼는다.”

“염불의 위신력이 마치 뱀을 꾸짖어 용이 되게 하는 것과 같으며, 흙을 쥐어 숲을 이루는 것과 같아서 열 가지의 악(惡)을 지은 사람이나 게으른 자라도 문득 용맹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곳에 왕생하는 인(因)을 얻게 된다.”

“적선(積善)하는 데는 방생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적악(積惡)하는 데는 살생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고요히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함이 자신을 이롭게 함이고, 항시 강설(講說)하고 서술(敍述)함은 중생을 이롭게 함이다.”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길이 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리니…”

 

■남긴 시

경향 각지를 순례하며 스님은 많은 한시를 남겼다. 한학과 교학에 밝았던 면모를 보여준다. 이 가운데 ‘자음(自吟, 스스로 읊음)’과 ‘선여자탄(禪餘自歎, 참선하던 여가에 스스로 탄식함)’은 각고의 수행정진을 하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글풀이는 <회명문집>을 기초로 일부 윤문했다. ‘자음’이란 시이다. “七旬又八平生事(칠순우팔평생사) / 早食西隣慕宿南(조식서린모숙남) / 遍踏海東全國界(편답해동전국계) / 梵香洗鉢結緣甘(범향세발결연감)” “칠십 팔세인 나의 평생이 / 서쪽에서 아침 먹고, 저녘에 남쪽에서 자면서 / 두루 전국을 다니고 / 분향하고 세발함은 좋은 인연 맺으려 함일세.”

다음은 선여자탄이다. “ 流水光陰常未覺(유수광음상미각) / 白頭悔恨送虛年(백두회한송허년) / 遽然一世眞如夢(거연일세진여몽) / 只願山家了事仙(지원산가료사선)” “흐르는 물 같은 세월 깨닫지 못하다 / 흰머리 되니 헛되게 세월 보냄이 후회되네 / 세상이 참으로 꿈 같으니 / 단지 원하는 것은 산에 살며 일 마친 신선 되는 것 뿐일세.”

 

■행장

1866년 6월15일 경기도 양주군(지금은 양주시) 시둔면 직동리에서 부친 이관석(李寬錫) 선생과 모친 수원 백씨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이름은 우경(牛庚). 본관은 전주(全州).

금강산 건봉사에서 수행

만주 등 경향각지서 포교

어려서 할머니 유씨(柳氏) 슬하에서 <소학> <중용> <대학> <논어> 등 한학을 연찬했다. 11세 되던 해(1876년) 3월 양주군 학림암(지금은 서울 상계동 학림사)에서 보하(寶河)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보하스님 회상에서 상주권공, 영산작법 등 범음성(梵音聲)을 배웠다. 1878년 서울 개운사에서 낙암일우(樂庵一佑)스님에게 사미계를 수지하고, 일승(日昇)이란 법명을 받았다. 1883년에는 금강산 건봉사에서 하은열가(荷隱列柯)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대계를 수지했다. 1882년 10월 건봉사 만일선원(萬日禪院)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20 하안거를 성취했다. 1886년 9월 건봉사 보안강원(普眼講院)에서 완명(翫溟)스님과 진하(震河)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후 제방 강당에서 11년간 대교과를 수료했다.

선과 교를 겸비한 회명스님은 건봉사에서 서무 소임을 시작으로 만일염불회 설교사(說敎師), 금강계단 전계사, 오대산 중대 세존적멸보궁 수호원장, 각황사 총무, 조선 31 대본산 연합사무소 감사 등을 역임했다.

<사진>회명스님이 직접 쓴 다라니.

이밖에도 경기도 광주 봉은사(지금은 서울 봉은사) 선원 회주, 고양 흥국사 선원 회주, 김천 직지사 회주 등 제방선원에서 수좌들을 지도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는 만주 목단강성에 대흥사 호국선원을 창건했다. 이에 앞서 1929년에는 중국 용정에 불일보조사(佛日普照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평양 영명사 주지(1914년)를 역임한 스님은 건봉사 주지에 당선(1918년) 됐지만 끝내 사양했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22일 대원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6세, 법납 75세. “移行千里萬虛空(이행천리만허공) 歸途情忘到淨邦(귀도정망도청방) 三業投誠三寶禮(삼업투성삼보례) 聖凡同會法王宮(성범동회법왕궁)”이란 내용의 임종게를 남겼다. 은법상좌로 지월(指月)·능명(凌溟)·능산(凌山)·혜각(慧覺)·능파(凌坡) 스님 등 20여명 가까이 있다. 회명스님 부도는 손상좌 태연스님이 건봉사에 건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숭례문 단청 작업을 한 혜각스님이 지난 1991년 상좌 동원·태연스님 등 문도들로 하여금 <회명문집>을 발간하도록했다.

 

[불교신문 2553호/ 8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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