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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5. 초부적음

 

65. 초부적음

 
제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된 초부적음(草夫寂音, 1900~1961)스님은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지식이다. 왜색불교를 저지하기 위해 수좌들이 설립한 선학원 이사장 소임을 맡아 재정난을 극복하고 조선불교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 내년에 탄신 100년이 되는 적음스님의 수행일화를 <불교> <불교신문> <삼소굴 소식> 등의 자료와 손상좌인 지성스님(공주 신원사 주지)의 도움으로 정리했다.
 
 
 
 
“구름 연기 가득하니 온 땅에 봄이 가득합니다”
 
  
   왜색불교 맞서 조선불교 수호 ‘공헌’
 
   명의로도 명성 높아 … 선학원 지켜
   
 
○…적음스님 제자인 벽암스님의 생전 회고이다. 벽암스님이 해방 후인 1947년 출가의 뜻을 품고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가 한암스님을 친견했다. 한암스님은 “서울에 있는 역경원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학승들이 모였있으니,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역경원장 적음스님이 벽암스님을 상좌로 받아들였다. 당대 선지식인 한암스님이 추천할 만큼 적음스님의 도력(道力)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적음스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얼굴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희노애락에 무심(無心)했던 스님이다. 상좌인 벽암스님은 “은사스님의 마음을 얼굴만으로는 절대 가늠할 수 없었다”면서 “마음의 평정을 이룬 큰 어른이셨다”고 밝힌바 있다.
 
<사진>적음스님 진영. 자료제공=선학원
 
○…적음스님은 뛰어난 침술(鍼術)로 명의(名醫)라는 명성도 얻었다. 때문에 스님이 주석했던 선학원에는 아픈 몸을 치료해달라는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생노병사에 초연한 수행자에게 의술(醫術)은 ‘세속의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님은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난하여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해 찾아오는 어려운 사람들을 자비심으로 정성껏 돌봐주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내가 별호를 하나 지어주지.” 침술과 한약으로 명성이 높은 적음스님에 만공스님이 한 말이다. 1930년 만공스님은 수행과 행정력, 재정력을 갖춘 적음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때 내린 법호가 바로 초부(草夫)이다. “풀을 갖고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적음스님의 의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만공스님이 제자로 받아들일 만큼 적음스님의 수행이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의 수행력과 의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재력 있는 사람들도 자주 찾아왔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스님은 치료비를 절대 받지 않았다. 재력을 모으려고 의술을 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사코 놓고 간 보시금은 빈곤한 살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선학원 도량을 정비하고 수좌(首座)들을 외호하는데 모두 사용했다. 또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정화불사 기금으로 흔쾌히 내놓기도 했다. 때문에 “선학원의 초창주(初創主)는 남전(南泉)스님이고, 중창주(重創主)는 적음스님”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
 
○…선학원의 뿌리인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자료에 따르면 1924년 4월 20일 적음스님이 주석하는 김천 직지사로 공제회 사무소를 이전한 것으로 나온다. 서울에 있는 사무소의 운영이 어려움을 겪어 20여명의 회원들이 논의를 거쳐 직지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적음스님이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로 있으면서 서울과 김천 직지사를 오갈 무렵이다. 직지사는 스님의 출가도량이기도 하다. 선우공제회 사무소가 실제 이전했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적음스님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선학원 최고 책임자로 조선불교수호와 선 중흥에 전력을 다했던 적음스님은 묘향산 보현사 상원암(上元庵) 선원 재건에도 공헌했다. 1937년 8월1일자 <불교시보(佛敎時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 (보현사) 상원암 시성전(視聖殿)에 신(新) 선원이 창립된 것은 경성 선학원 화주(化主) 겸 원주(院主)되는 김적음 대선사가 우연히 내임(內臨)하여 전부터 선에 뜻을 둔 윤제봉(尹霽峰) 화상과 합력(合力)하여 모든(만든) 것이다.……”
 
<사진>적음스님의 친필. ‘김적음’이란 내용이다. 출처= 삼소굴 소식
 
○…적음스님은 불교 홍포에도 각별한 관심을 지녔다. 일제강점기 금강산 표훈사 주지 원허(圓虛)스님이 “금강산을 천하에 널리 소개해 불교를 선전할 취지로 월간 잡지 <금강> 발행”을 추진할 때 힘을 보탰다. <금강> 발기인 명단에는 적음스님을 비롯해 만공.한암.회명.석전.만해.서응.구하 스님 등 82명이 수록돼 있다.
 
공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적음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장 명정스님이 역주해 펴낸 <삼소굴 소식>에는 적음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실려있다. 적음스님의 법문 내용이 드문 현실에 비춰볼 때 가치 있는 자료이다. 한글풀이는 <삼소굴 소식>에 실린 내용을 약간 윤문했다.
 
 
 
적음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서한.
 
 
〈전문〉
懶夢未曾醒터니 滿地雲煙滿地春이로다. 若非鏡峰和尙 虛過此一春이로다. 頂禮不已仍審以來 護法中氣體事一如淸淨 渾山均淨否 慰切祝耳 鄙院院中無故私幸何煩 示中寂音消息은 吾非寂音이오니 問於寂音何如 呵呵 石友和尙 本院住錫이든바 金剛山 靈源洞 住持로 가셨습니다. 餘不備射上
 
〈풀이〉
게으른 꿈이 아직도 깨지 않더니 / 온 땅에 구름과 연기가 가득하고 온 땅에 봄이 가득합니다. / 경봉 스님이 아니셨더라면 이 봄을 헛되이 보냈을 것입니다. / 정례해 마지 않으며 그동안 호법중 기체후 일여청정하오며 산중도 균안하신지 문안드립니다. 이곳도 무고히 잘 있으니 다행입니다. / 보내온 글 가운데 적음 소식은 저는 적음이 아니니 / 다른 적음에게 묻는 것이 어떨런지요. 하하. / 석우화상은 본원에 주석하고 계셨는데, 금강산 영원동 주지로 가셨습니다. 여불비사상.
 
 
 
 
■ 행장
 
1900년 11월1일 경북 군위군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재화(金在化)선생, 모친은 유매실(柳梅實) 여사. 속명은 김영조(金永祚).
 
어려서(1912년) 고향에 있는 사숙(私塾,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5세에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제산(霽山)스님.
 
만공스님 법제자
 
역경불사도 관심
 
출가후 직지사에서 수선 안거를 한 적음스님은 1922년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선우공제회 총회에서 서무부 이사로 추대됐다. 1927년에는 직지사에서 사교과를 마쳤으며, 1930년에는 만공(滿空)스님에게 입실 건당했다. 이때 초부(草夫)라는 법호를 받았다.
 
<사진>1930년대 선학원에서 적음스님이 만공스님에게 입실 건당할 당시 사진.
 
1931년 선학원 상임포교사 소임을 맡았으며, 1932년 부산 범어사에서 도첩(度牒)을 받았다. 1934년 조선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를 거쳐, 선학원 3대.5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조선불교 수호에 앞장섰다. 조선불교문화운동협회 경리(經理) 소임을 보았다.
 
1935년 1월5일 조선불교선종 종헌 반포 당시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계승하기 위해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했다. 같은 해 범행단(梵行團)을 결성해 청정비구승단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되던 해 12월17일 서울 충무로 3가 50번지에 있는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47년 1월에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하고 역시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대한민주당과 한국국민당이 통합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자료에는 조직부 명단에 게재돼 있다.
 
1950년 4월20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5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6월24일 정화운동 발기인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이튿날 교단정화추진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955년 공주 마곡사 주지로 취임했고, 1956년3월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년에 병고를 겪은 스님은 1961년 10월3일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61세, 법납 39세. 제자로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과 동국대 이사장, 공주 신원사 조실을 역임한 벽암(碧岩)스님이 있다. <적음집>이 발간됐다는 구전이 전해오지만 실체는 확인할 수 없다.
 
 
[불교신문 2551호/ 8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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