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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3. 소소소천

 

63. 소소소천

 

평생 조국의 독립과 중생교화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소소소천(簫韶韶天, 1897~1978) 스님. 비록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스님의 평생은 출가 구도자의 길과 다름 없었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생 모두 각해(覺海)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 소천스님의 수행과 삶을 <소천선사 문집>과 후학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했다.

 

 

“진실한 修行路 바로 알아 보살대원 성취하라”

  

   청년시절 독립운동한 용성스님 제자

   금강경 독송운동 전개…참선수행 병행

 

 소천스님 진영. 광덕스님 서가에 모셨던 것이다. 자료제공=불광출판사

 

○…“도(道)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중생의 것이다.” 소천스님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반드시 중생에게 회향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용성스님에게 출가한 소천스님은 부산.마산.진주 등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펴는데 앞장섰다. 이 무렵은 한국전쟁의 상처로 모든 사람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던 암흑기였다. 소천스님은 <금강경>의 ‘무상의 도리’로 중생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소천스님에게 ‘도’는 개인이 독점해서도, 독점 할 수도 없는 진리였던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려는 소천스님의 원력은 지극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았던 역경(譯經)에 스님은 남다른 관심을 두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은사 용성스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한사람이라도 더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도하고자 했던 소천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천스님이 펴낸 <천수경>의 머리말에는 역경불사의 중요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 글에서 소천스님은 “뜻 모르고 읽는 경이라고 아주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뜻을 알고 읽느니만 못한 것이니 맛 없이 먹는 고량진미가 양생상으로 보아 달게 먹는 맨밥만 못함과 같다”고 지적했다. “경의 뜻을 모르면 슬기(지혜)에 병이 있다고 하겠지만 만일 이렇지도 않고 경의 뜻을 알지 못함이 경에 쓰인 글이 내 글이 아니요 말이 제 말이 아님에 있다면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랴! …중략… 이제 우리들이 가장 많이 읽는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외 몇몇 게송들을 불완전하나마 쉽게 알도록 우리말로 번역해 보았다.”

○…소천스님의 호에는 스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상징’이 담겨 있다. 스님이 출가 후에 사용한 호는 소소(簫韶)이다. 은사 용성스님이 지어준 것인지, 아니면 소천스님 스스로 지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소소라는 법호는 소천스님의 삶과 원력을 대변하는 의미있는 법호이다. 소소는 ‘중국 순임금이 지었다는 음악 또는 악기’를 나타낸 말이다. 소천스님이 소소라는 호를 사용한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망국-식민지-해방-분단-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소천스님이 원했던 세상이 중국 요순시대와 같았다는 점이다. 다툼과 갈등이 없는 세상, 이는 정토와 다르지 않다. 또 하나는 스님 스스로 ‘소소’와 같은 악기처럼 살고 싶지 않았을까라는 사실이다. 평화를 노래하는 악기, 그것이 바로 소천스님이 간절히 원했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소천스님은 “수행자는 마지막이 중요하다”고 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스님은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었다. 젊은 수좌 못지않은 스님의 수행은 엉덩이에 창이 생길 정도였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고 오직 정진에 몰두했다. 시봉이 만류했지만 스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노구에도 수행을 놓치 않는 소천스님의 모습을 본 시봉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1978년 소천스님 입적 당시 석주(昔珠)스님은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 ‘소천스님의 입적을 애도함’이란 제목의 추도문을 게재했다. 석주스님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시느라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며 대강연회를 통해 겨레형제들의 눈을 열고 가슴에 불을 붙여주었다”면서 “민족과 세계를 연결하는 호국호법 철학을 완성하셨던 스님, 마침내 천일기도를 반복하시며 금강삼매에 드시어 조사의 대법을 깨치셨던 스님…”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광덕(光德)스님도 소천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광덕스님은 소천스님을 “선구자”라고 했다. 소천스님이 광덕스님에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자”고 권유했고, 포교와 더불어 서책(書冊)으로 전법해야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또한 “경전의 국역이 치졸한 행위로 지탄되기는 했지만 소천스님은 누구보다 선구자적인 탁견을 갖고 있었기에 한글화에도 각별한 뜻을 지녔다”고 광덕스님은 회고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사진> 소천스님 출가도량인 부산 범어사 산문.

  

소천스님 어록

“내가 이 경(금강경)을 강(講)함은 막대한 불은(佛恩)을 보(報)함이라.”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불(佛)께서 무상정등정각법(無上正等正覺法)이라 한 것이니 과거.현재.미래의 제불(諸佛)이 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며, 과거.현재.미래 제불의 법이 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금강경 진리에 합치고 금강경 진리에서 힘을 내고 금강경 진리에서 구중생(求衆生)하고 금강경 진리에로 환원하여 자약(自若)한 산춤을 추어야 할 것이다.”

“만경창파(萬頃蒼波) 위에 괴로이 나는 나비와 같이 길 잃고 시진한 조선의 생령(生靈)에게 이 경(금강경)의 광명을 일깨우고 싶다.”

“깨달음이 없이는 명실(名實)이 같은 세계평화, 국가통일, 민족단락(團樂)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불사보은(佛事報恩)도 없는 것임을 다시 외치며 붓을 놓는다.”

“불법은 널리 알고 많이 기억함보다도 깨달음이 있고 몸소 행(行)함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깊이 경의 뜻을 받아 진실(眞實)한 수행로(修行路)를 바로 알아 힘찬 정진으로 필경 보살대원을 성취하여 부처님 뜻을 보답할 줄 알아야 하겠다.”

 

행장 /

나라 찾는 일 ‘염원’

정화불사에도 ‘동참’

1897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 13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봉운(申奉雲) 선생, 모친은 김성녀(金性女) 여사. 본관은 평산이며, 속명은 신세순(申世淳).

조선이 망국의 비운을 겪고 있을 무렵 소년 시절을 보낸 스님은 나라 찾는 일을 일생일대의 염원으로 삼았다.

<사진> 소천스님의 노년 모습.

1910년 14세가 되던 해 서울 정동교회에 나가 국권회복을 간절히 기원했지만, 같은 해 8월 한일강제병합을 목도하고 실망한다. 이 무렵 “저는 주님 곁을 떠납니다. 나라 찾는 길을 찾지 못했을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 교회를 떠난다.

이후 여러 종교와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1911년 서울 종로의 한남서림(翰南書林) 주인에게 <금강경>을 받은 후 불법(佛法)과 인연을 맺는다.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북간도로 가서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에 입대해 무장구국투쟁에 나섰다.

사관훈육부와 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전국빈 의사와 상의하여 국내에서 사관생도 후보생을 모집하기로 하고 극비리에 귀국했다. 이때 일경(日警)의 추적을 받아 산중에 피신했다 불교와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때 소천스님은 <금강경>을 다시 읽고 깨달음을 맛보았다. 1935년(39세)에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를 간행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설법을 했다. 이때부터 ‘신법사(申法師)’라 별명으로 불렸다.

 

일제의 폭압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941년 경기도 파주에 토굴을 짓고 은둔에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과 함께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을 목격한 스님은 자칫하면 민족이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바른 정신> <독립의 넋> <인류업행개조운동> 등의 저술을 지었지만, 출판은 하지 못했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발발후 <진리도(眞理刀)>라는 책을 펴냈다.

1952년 부산 범어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은사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를 한 것이다. 범어사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1953년 부터 국민계몽운동에 나섰다. <금강경>을 번역 출판한 뒤 130여회의 강연과 법회로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金剛經讀訟救國願力隊)’를 조직한 것도 이 무렵이다.

스님은 정화불사 당시 적극 동참하여 ‘불교정화.국민자각.정법호지’ 운동을 펼쳤으며, 1955년에는 총무원 초대 교무부장에 취임했고, 서울 대각사.경주 불국사.구례 화엄사 주지를 역임했다.

1965년부터 인천 보각사에 주석하며 참선과 전법 운동에 전념한 스님은 1978년 4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납 27세, 세수 83세. 부도는 범어사에 모셨다.

<활공원론(活功原論)>.<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救世方略)>.<금강경과 각운동(覺運動)>.<반야심경강의(講義)>.<원각경강의> 등의 저서를 다수 남겼다. 법명 소천(韶天)을 노년에는 소천(昭天)이라고 썼다. 출가 이전의 호는 소천(素天)을 사용했고, 출가 후에는 소소(簫韶)와 의탁(宜倬)을 사용했다.

소천스님 제자로는 창봉(蒼鳳) 법종(法宗) 일파(一波) 일천(一泉) 정영(靜影) 정우(靜宇). 지철(智徹) 고봉(古峯) 고담(古潭) 고원(古園)스님이 있다.

 

[불교신문 2544호/ 7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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