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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1. 혜봉용하

 

61. 혜봉용하

 
 
선교(禪敎)는 물론 노장유학(老莊儒學)에도 고루 밝았던 혜봉용하(慧峰龍河, 1874~1956)스님. 구한말 관직에 몸담았던 스님은 출가 후에는 오직 수행 정진에 몰두하면서 조선독립을 발원했다. 스님이 양성한 제자로는 만공스님 법을 이은 고봉스님이 수좌의 표상이 되었으며, 동국대 총장을 지낸 김동화 박사는 교학의 태두가 됐다. 전국비구니회장을 지낸 광우스님은 혜봉스님의 따님이다. 혜봉스님의 수행일화를 광우스님의 증언과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혜봉선사유집>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진리로 돌아가 覺海서 노닐고 중생 이롭게 하라”
 
 
  조선 후기 관직생활후 출가사문 길 나서
 
  고봉스님·김동화 박사 등 선교 거목 길러
 
 
○…‘午前六時禮敬(오전육시예경) 同八時點茶(동팔시점다)’ 혜봉스님이 남긴 친필 일기는 매일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오전 6시에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8시에 차를 마시다”라는 뜻이다. 일과를 기록한 일기라는 점에서 혜봉스님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은 한 차례도 예불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매일 차(茶)를 즐겼던 스님의 생활도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혜봉스님은 하루를 정리하며 한시(漢詩)를 일기에 기록했다.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견해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스님의 면모를 대변한다.
 
<사진>상주 남장사에 모셔져 있는 혜봉스님 진영. 찬은 석정스님이 썼다.
 
○…한학에 능통했던 스님은 출가 후에도 유생(儒生)들과 교류가 잦았다. 처음에는 유생들이 “머리 깎은 이가 뭘 안다고 그래”라면서 홀대했지만, 스님과 교유(交遊)한 후에는 학식과 덕망에 머리를 숙이고 존경을 표했다. 스님을 업신여기던 유생들이 나중에는 “혜봉 선생 시 한수 하시죠”라며 존대어를 사용했을 정도. 스님들이 천대받던 시절, 콧대 높은 유생들이 스님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다는 사실은 파격적이다. 그만큼 혜봉스님의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오래 세월이 흐른 후 혜봉스님 상좌가 선산 도리사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에 있는 유생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혜봉스님 상좌에게 “그대가 혜봉 선생의 제자요. 참 좋은 스승을 만났소”라면서 반갑게 맞이하고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은밀히 가담했던 혜봉스님은 일경(日警)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었다. 상주 남장사에 주석할 무렵 경찰로부터 출두요청을 받았지만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몇 차례의 소환에도 반응이 없자, 총검으로 무장한 순사(巡査)가 스님을 강제 연행하기 위해 남장사로 찾아왔다. 마침 혜봉스님은 마루에 앉아 거울을 보면서 면도를 하고 있었다. 순사들은 면도가 끝난 후 경찰서로 연행할 태세였다. 그때 사찰 마당에 있는 나무 위로 다람쥐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고, 이를 본 순사가 다람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거울을 통해 총을 겨눈 순사를 본 혜봉스님은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어디서 감히 총부리를 겨누느냐.” 혜봉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생명은 어떤 것이나 소중한 것이며, 더구나 산사에 머무는 귀한 생명을 희롱하느냐.” 깜짝 놀란 순사는 기세에 눌려 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순사들이 혜봉스님에게 사과하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혜봉스님은 빼앗긴 나라를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상좌 고봉(법명은 경욱)스님에 대해 김구 선생이 “박경욱 스님은 임시정부 지점장”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고봉스님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친 혜봉스님의 애국심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또한 혜봉스님은 남장사 보광전 닫집 위에 태극기를 몰래 걸어놓기도 했다. 발각되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위험을 감수했다. ‘병란 등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땀을 흘린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보광전 비로자나 부처님께 조선의 독립을 기원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즐겨 읽고 필사까지 했다. 필사한 종이는 경전 갈피에 배접(褙接)해 놓았다. 혜봉스님을 시봉하는 시자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갑자기 일경이 들이닥쳐 은사를 연행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일경에 체포된 은사가 고초를 겪을 일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잠시 출타한 틈을 이용해 <난중일기>를 필사해 배접한 부분을 도려냈다. 외출에서 돌아온 혜봉스님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시자를 불렀다. “네 어찌 그런 일을 했느냐.” 시자는 사실대로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혜봉스님은 시자를 다시 한 번 경책했다. “부처님 가피를 빌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인데, 네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구나.”
 
<사진>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있을 무렵의 혜봉스님(가운데) 오른쪽은 광우스님.
 
○…혜봉스님이 남긴 일기에는 소박하게 살았던 수행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자가 쑤어온 솔잎 섞은 죽을 마신 뒤 쓴 한시는 혜봉스님의 청빈한 삶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松葉和爲粥(송엽화위죽) 神淸又腹香(신청우복향) 生涯如此淡(생애여차담) 何拘世間相(하구세간상)” 이 한시에 대해 연관스님은 다음과 같이 한글 풀이를 했다. “솔잎을 섞어 죽을 쑤니, 정신도 맑고 배도 향기롭네, 삶이 이렇게 담박하니, 어찌 세상일에 구애되랴.”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혜봉스님의 어록
 
“세간이 무상함을 깨닫고 마음이 무아(無我)임을 아시어 저녁 연기와 같은 덧없는 재물로써 무루(無漏)의 선근을 심으시고, 함께 청정각지(淸淨覺地)에 들어가시고, 함께 무위진락(無爲眞樂)을 깨달아 지이다.”
 
“제 집안에 무가보(無價寶)가 있는 줄 모르고, 공연히 잡동사니를 사려고 바쁘구나.”
 
“원명(圓明)한 성품은 온 세계에 두루 하여, 어느 곳이나 인연 따라 낱낱이 분명하다.”
 
“대도(大道)는 치우침 없이 사방에 통하여, 사람이 죽거나 태어나거나 고금(古今)이 한결같네.”
 
“물길이 나뉘어 천 갈래로 흩어진다 말하지 말라. 바다로 돌아가면 한 근원임을 알 수 있으리.”
 
“반드시 숙세의 원력대로 세속을 교화하여 진리로 돌아가 함께 각해(覺海)에 노닐고 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이롭게 할진저.”
 
“생노병사는 인간 세상에 아무도 면할 이가 없으니 곡을 한들 어찌하겠으며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장
 
1874년 3월23일(음력) 충주 방호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이규직(李奎職) 선생과 모친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종국(李鍾國). 본관은 경주.
 
상주 남장사로 출가
 
독립운동 은밀 가담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부터 사서삼경 등 한학을 익혔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6세에 한양 친척집으로 올라와 17세(1891년)의 어린 나이로 관직에 나섰다. 12년간 종4품에 해당하는 궁내부주서(主書)로 근무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의 현실을 본 스님은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고 출가의 뜻을 품었다.
 
<사진>1949년 서울 개운사 가사불사 회향 법회 후 신도들과 함께한 혜봉스님(앞줄 가운데).
 
1904년 상주 남장사에서 영봉(靈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제방 선원과 강원에서 정진했다. 두루 이력을 마친 혜봉스님은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됐을 만큼 수행력이 높았다. 이후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거쳐 선산 도리사 주지, 동화사 대구포교당 포교사, 의성 고운사 포교당 포교사, 서울 각황사 중앙포교사 등의 소임을 보았다. 선사(禪師)를 은사로 출가해 선교를 공부한 후 참선 수행하는 한편 포교사로서 전법 활동에 매진했다.
 
한때 금강산 순례에 나서기도 했지만, 1937년부터는 대부분 상주 남장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남장사 관음선원 조실로 20년 가까이 주석하던 스님은 1956년 5월26일(음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83세, 법납 52세. 원적에 드는 날 상좌 고봉스님이 달려왔다. “스님, 제가 왔습니다.” 혜봉스님이 눈을 떴다. “그래, 왔구나.” 고봉스님이 은사의 얼굴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고, 얼마 뒤 혜봉스님은 편안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장례는 3일장으로 모셨다. 고봉(古峯)·고암(古庵)·의암(義庵)·일봉(一峯)스님, 뇌허 김동화 박사가 제자이다.
 
상주 남장사와 북장사 사적기를 비롯해 용흥사 시왕전 중수기, 청룡사 극락전 창건기, 문수사 사자암 상량문 등 11편의 기(記)를 남겼다.
 
 
[불교신문 2540호/ 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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