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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4. 해안봉수

 

64. 해안봉수

 
 
근대 선지식으로 명성이 높은 백양사 조실 학명(鶴鳴)스님 회상에서 약관의 나이에 깨달음을 성취한 해안봉수(海眼鳳秀, 1901~1974)스님. 참선과 교학은 물론 내.외전을 두루 갖춘 해안스님은 중국 유학후 귀국하여 출.재가 제자들을 지도했다. 자비의 화신으로 존경받은 해안스님의 수행일화를 제자 동명스님(서울 전등사 주지)의 회고와 <해안집>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목숨 걸고 정진하면 영원한 보배를 얻으리라”
 
 
  참선 · 교학, 내·외전 두루 갖춘 ‘시대의 스승’
 
  자비심으로 후학 인도 “7일 안에 깨쳐라” 강조
 
 
○…1969년 7월 서래선림 법회에서 해안스님은 대중에게 당신이 출가한 까닭을 이야기 했다. “불법(佛法)을 만나 법복(法服)을 입은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밝힌 스님은 “부처님 은혜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선지식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한다”면서 출가 동기를 설명했다. 해안스님은 △새벽 종소리와 목탁소리 △염불 △예참 △바랑 살림 △주장자 법문이 좋아 출가했다고 했다. 이어진 해안스님의 당부다. “가끔 머리를 한 번씩 만져 보시고, 그럴 때 마다 ‘내가 세속 사람과 다른 중이로구나’하는 생각과 더불어 책임이 막중하다는 의지를 새롭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서울 전등사에 모셔져 있는 해안스님 진영. 사진제공=동명스님
 
○…출가해 정진에 몰두하던 어느 날 새벽. “막연히 앉아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해안스님은 조실 학명스님을 찾아갔다. 7일만 정진하면 견성을 구할 수 있다는 조실스님의 가르침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질문을 드렸다. “스님, 무슨 화두를 하오리까” 조실스님이 답했다. “다른 화두 할 것 있느냐. 자네는 어제 저녁에 은산철벽을 뚫어야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은산철벽을 뚫어라. 그리고 매일 한 번씩 오너라.” 다음날 다시 찾아온 해안스님에게 조실스님이 물었다. “그래, 은산철벽은 뚫었느냐” “……” “그러면 다시 철벽을 뚫어라.”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조실스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 같았다고 해안스님은 훗날 회고했다. 6일째 저녁 종소리가 들리고, 방선 죽비를 치는 소리에 환희의 세계가 열리는 경지를 보았다. 다음날 아침 조실스님에게 “사람은 서로 보지 못했는데, 목탁 치는 사람과 종 치는 사람, 죽비 치는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질문을 올리자, 조실스님은 “알면 일러 보거라”고 했다. 이에 해안스님은 “봉비은산철벽외(鳳飛銀山鐵壁外) 입니다”라는 답변을 하여 인가를 받게 된다.
 
○…회갑을 맞은 해안스님은 마을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상좌인 혜산.철산.동명 스님을 마을로 보내 어린이들에게 공책과 연필을 선물하도록 했던 것이다. 매년 스님의 생일이면 이 같은 일이 반복됐으며, 처음에는 누가 보낸 것인지 몰랐던 주민들이 해안스님의 뜻을 알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또한 여름이면 마을 아이들을 내소사로 초청해 공부하도록 했다. 젊은 시절(1932년) 입암리에 계명학원을 세워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한바 있는 해안스님은 교육을 통해 어린이와 주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던 것이다.
 
○…“도력이 높은 큰스님이 내소사에 계신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해안스님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적지 않았다. 언제나 자비롭게 사람들을 맞이한 스님은 따뜻한 말로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때로는 ‘부적’을 써달라고 무작정 오는 이도 있었다. 정법에서 볼 때 부적을 써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하지만 스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부적’을 써주었다. <반야심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용을 적어 주었던 것이다.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마침내 정법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때문에 스님이 써준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부적이 아니라 호신불(護身佛)이었던 것이다.
 
○…“7일 안에 깨쳐라” 해안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일주일만 정진하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일반적으로 정진을 오래 해야만 깨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면서 “견성은 단시일을 두고 결정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단언한다”고 말했다.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이 이미 분명히 말했지만 아무리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7일이면 도(道)를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그것을 긍정하고 확언합니다. 만일 7일간에 깨치지 못했다면, 공부하는 사람의 정진 자세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기간이 짧기 때문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안스님을 시봉했던 동명스님(서울 전등사 주지)은 은사의 가르침을 마음깊이 간직하고 있다. 동명스님은 “은사스님은 늘 섬세하게 가르침을 주셨다”면서 “평생 수행자로 사는데, 스님의 가르침이 큰 지침이 되었고, 은사 스님 곁에서 시봉한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고 말했다. 동명스님은 “모든 가르침이 소중하지만 특히 ‘산을 보고 부동(不動)을 배우고, 물을 보고 흐르는 것을 배우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절에서 해안스님에게 법문을 요청하면, 상좌들은 은사를 따라 나섰다. 제자들은 등에 20kg이 넘는 녹음기를 짊어졌다. 지금처럼 작은 녹음기가 없던 시절. 은사의 법음(法音)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지금도 해안스님의 생생한 육성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해인가 혜산스님과 동명스님이 군산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갈 때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갑자기 버스에 불이 났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객들은 대피하려고 정신이 없었다. 이때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녹음기였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기계’ 먼저 내리는 모습을 본 승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고초를 겪으며 은사의 법음(法音)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오도송
 
鐘鳴鍾落又竹(종명종락우죽비)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봉황새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사람들이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
 
會僧堂裡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 이라 하여라
 
 
 
■열반송
 
生死不到處(생사부도처) 생사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別有一世界(별유일세계) 하나의 세계가 따로 있다네
 
垢衣方落盡(구의방낙진)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리자
 
正是月明時(정시월명시) 비로소 밝은 달 원할 때로다.
 
 
 
■어록
 
“불법(佛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심(本心)을 알려고 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본심은 곧 자기의 본심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본심은 하나의 불성(佛性)입니다.”
 
“오늘 당장 이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내일, 내년, 내생에 공부하겠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몸뚱이 없어지면 공부할 기회도 없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앞에 밝혀 있는 촛불도 법문이고, 문 밖에 나가면 푸른 버들이라든지 꾀꼬리 우는 소리도 모두 법문입니다. …… 향을 꽂고 절을 하는 것도 모두 법문이며, 오고 가고 앉고 눕는 것 역시 법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도모하는 정진불사야말로 불사 중의 불사이며, 그 것은 전등회 회원만 힘써야 할 불사가 아니라 모든 불자(佛子), 나아가 전 세계 인류가 마땅히 해야 할 불사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어리석고 못나고 구차한 삶을 원치 않습니다. 깨끗하고 빛나고 참다운 진리를 구하다 만약에 얻지 못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질 것을 맹세하옵니다.”
 
 
 
 
■행장
 
1901년 3월7일(음)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부친 김치권(金致權) 선생과 모친 은진 송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성봉(成鳳)이고, 훗날 봉수(鳳秀)라고 했다. 본관은 김해.
 
만허스님 은사로 출가
 
학명스님 회상서 정진
 
유년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917년 부안 내소사에서 만허(滿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같은해 장성 백양사에서 만암(曼庵)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17년 백양사 사미과를 수료하고, 이듬해 백양사 광성의숙 보통과를 마쳤다. 1918년 부처님 성도절을 맞아 용맹 정진하여 깨달음을 맛보았다. 1920년 백양사 지방학림 중등과와 사교과를 졸업했다. 당대 선지식인 학명스님과 석전스님의 가르침을 전수받은 것이다.
 
<사진>특별정진법회를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한 해안스님(앞줄 가운데), 혜산·철산·동명스님(뒷줄 가운데부터 오른쪽으로)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출가후 백양사에서 내전을 두루 익힌 후 상경하여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에 진학해 외전을 겸비했다. 1922년 불교중앙학림을 졸업하던 해 백양사에서 대선법계(大禪法階)를 품수했다.
 
보다 큰 세상의 흐름을 알고자 중국으로 간 해안스님은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공부하고 1925년 귀국했다. 1927년 백양사에서 중덕(中德)법계를 품수한 스님은 부안 내소사 주지로 취임했으며, 1931년에는 월명선원에서 안거에 들었다. 1932년 부안 산내면 석포리에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해 문맹퇴치 운동과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1935년에는 백양사 본말사 순회포교사 소임을 맡아 전법활동에도 나섰다.
 
1936년에는 대덕(大德)법계를, 1945년에는 종사(宗師)법계를 각각 백양사에서 받았다. 1945년 김제 금산사 주지로 취임했으며, 이듬해 금산사 서래선림(西來禪林) 조실로 추대됐다.
 
1950년에는 내소사에 서래선림을 열고 조실로 주석했다. 1969년에는 불교전등회(佛敎傳燈會) 대종사로 추대됐다. 월명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후 36 하안거를 성만했다.
 
1974년 3월 9일(음) 오전 6시30분 내소사 서래선림에서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 법납 57세. 해안스님 부도는 내소사에 모셔져 있다. 상좌로 혜산(전 내소사 주지)·동명(서울 전등사 주지)·철산(내소사 선원장) 스님 등이 있다.
 
 
[불교신문 2546호/ 8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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