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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69. 추담 순

 

69. 추담 순

 
 
출가전 함흥불교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불연(佛緣)이 깊었던 추담 순(秋潭 純, 1898~1978)스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추담스님은 만해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다. 출가 후에는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한편 정화불사의 초석을 놓는데 헌신했다. 추담스님의 수행일화를 상좌 법현(제천 흥국사 주지).법의(영천 죽림사 주지)스님의 회고와 <추담설법집>을 참고해 정리했다.
 
 
“자비 지혜의 두 날개로 행복을 실현하라”
 
법주사·금산사 등 정화…불교신문 초대 주간 역임
 
독립운동으로 옥고 치르기도…만해스님과 ‘교류’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함흥에 일능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지만, 일제 당국은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공립학교’로 전환한다는 명분으로 일능학교의 민족교육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스님은 완강히 거부했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 맞서 지역 인사들이 동정문(同情文)을 만들어 배포한 사실로 보아 추담스님에 대한 신망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당국의 감시와 간교한 술책으로 병마와 싸우는 처지가 됐다. 함흥 근처에 있는 귀주사에서 요양하며 부처님 가르침과 더욱 가까워졌다. 불혹의 나이에 서울 약사사(지금의 봉국사)에 입산하여, 대외 활동은 일체 접고 오직 수행에 전념했다.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에 다닐 당시 불문에 들었지만, 조선에서 다시 출가사문이 된 것이다. 이때 은사 회명(晦明)스님에게 받은 법호가 추담이다.
 
○…빼앗긴 조국의 독립에 큰 관심을 가졌던 추담스님은 만해스님과도 교유가 깊었다. 서울 선학원에서 만해스님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추담스님은 만해스님의 오도송을 한글로 옮겼는데 다음과 같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雪裡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이내 몸 닿는 곳은 모두다 고향인 걸 / 객수(客愁)가 잦단 말을 그 뉘라 일렀는고 / 한 소리 높이 질러 천지를 진동하니 / 이 나랄 기쁜 소식 내 곁에 돌려오네”
 
<사진>추담스님 진영. 출처=‘추담설법집’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추담스님은 백범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과 만나 ‘나라 세우는 일’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장덕수.백성욱.김법린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다. 1948년 5.10 총선 선거 당시 백범 선생에게 성북구에서 출마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범 선생이 끝내 불출마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추담스님은 법문과 글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정화불사 당시 대월.소천스님과 함께 ‘종단의 3대 달변가’로 손 꼽혔다. 여류 정치인으로 명성을 떨친 박순천 여사도 “추담스님만큼 변술(辯術)이 능한 스님은 처음”라고 평했을 정도. 정화불사 당시 스님은 명확한 소신과 정확한 논리로 그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공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화 당시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임명받은 추담스님은 6년간 소임을 보면서 ‘지금의 법주사’를 만들었다.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사하촌에 머물며 법주사 정재(淨財)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재판에 붙여졌고, 법주사는 변호사를 고용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에 추담스님은 당신이 직접 변호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변호사를 고용한 대처 측에 맞선 추담스님은 끝내 재판을 이겼다.
 
○…추담스님 제자들의 법명을 살펴보면 어느 사찰에서 출가했는지 알 수 있다. 출가 도량의 첫 글자를 법명 첫머리에 넣었기 때문이다. 법(法)자는 법주사에서, 금(金)자는 금산사에서, 전(傳)자는 전등사에서 출가한 것이다. 굳이 법명에 출가 사찰명을 넣은 까닭은 “출가할 당시 세운 초발심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추담스님은 ‘卽事以眞(즉사이진)’이란 말을 자주 썼다. “일을 함에 있어 항상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진실하고 정직하게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평소 추담스님이 일을 대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기에 충분하다.
 
○…스님은 평생 소박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누군가 용돈을 드리면, 불사에 보태거나,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남김없이 내주었다. 그 흔한 통장도 하나 없었고, 원적에 든 후 제자들이 은사의 살림살이를 정리할 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법주사 주지 시절 일본인 참배객들이 찾아왔다. 천년고찰에 감명 받은 일본인들이 추담스님을 접견하고 적지 않은 시주금을 내 놓았다. “여러분 성의는 고맙지만, 시주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황한 일본인들이 답을 하지 못했다. 다시 추담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이 주신 일본 화폐를 보니 우리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이토오 히로부미의 사진이 있더군요.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의 초상이 들어있는 돈을 시주금으로 받을 순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시주금을 돌려 받았다.
 
○…일제강점기 시작된 법주사 미륵대불을 완성하기 위해 추담스님이 나섰지만 나라 전체의 경제사정이 어려운 시절, 기금 마련은 쉽지 않았다. 추담스님은 묘안을 찾았다.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무렵. 스님은 매일 아침 박 의장이 출근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여러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박 의장의 출근 차량을 지켜보았다. 스님의 신분이 궁금해진 박 의장이 청담스님을 통해 추담스님을 초청했고, 이 자리에서 스님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법주사 미륵대불 불사에 나라에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미륵대불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육영수 여사와 이방자 여사도 법주사를 직접 참배하기도 했다.
 
<사진>노년에 소박한 차림으로 붓을 든 추담스님. 출처=‘추담설법집’
 
○…추담스님의 선필(禪筆)은 교계 안팎으로 유명했다. 힘차게 써 내려간 스님의 글씨는 마치 깨달음의 세계에서 노니는 수행자의 자유로운 모습 같았다. 정진하는 틈틈이 쓴 글씨는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주었다. 법주사 대웅전 주련도 스님 글씨이다. 입적을 얼마 앞두고 열린 ‘마지막 선서화전’에 출품한 작품은 유훈이나 다름없었다. 忍苦(인고), 慈悲無敵(자비무적), 逍遙自在(소요자재) 등 친필은 스님의 삶을 대변하고 있으며, 후학들에 대한 당부이기도 했다. 
 
영천·제천=이성수 기자
 
 
 
■ 어록
 
“불교란 항상 자기의 고(苦)와 자기의 업(業)을 내장(內障)하는 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의 3대 생명은 정직.용기.시간이다.”
 
“항상 현재에서의 새로운 각오(覺悟)밑에 정법신심(正法信心)을 견고히 하라”
 
“우리 인생은 자기의 과거가 지금의 자기를 창조했고, 오늘의 자기가 내일의 자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선(禪)이란 ‘마음의 통일’이며, 마음이 통일되면 삼매(三昧)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이상과 실현의 행복을 얻는데 있어, 그 두 날개는 자비와 지혜로 비지원만(悲智圓滿)에 있는 것이다. 자비는 평등으로 나타나고, 지혜는 자유로 나타나니, 자유와 평등은 종(縱)과 횡(橫),질적과 양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는 노력종(努力宗)이다. 자기의 가지적 창조이다.”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고, 자기 칭찬만 하여 남의 인격을 무시함은 옳지 못하다.”
 
“원리 없는 생활은 공허하다. 실생활(實生活)에 기(企)하지 아니한 지식은 희론(戱論)이다.”
 
“우주는 중생심(衆生心)으로부터 구성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행장
 
1898년 9월13일(음력) 함흥에서 부친 박영숙(朴永淑) 선생과 모친 파평 윤씨의 3남4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박정걸(朴定杰). 법호는 추담이고, 법명은 순이다.
 
불교정화 운동에 앞장
 
법주사 미륵대불 ‘불사’
 
함흥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다이쇼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했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평생 반일 사상으로 일관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해동불교청년회를 만들었고, 귀주사 본말사가 설립한 능인학원에 몸을 담았으며, 훗날 함흥에 일능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지냈다. 중환(重患)으로 생명이 경각에 놓이자, 고향 근처에 있는 귀주사(歸州寺)에서 요양하면서 출가의 뜻을 세웠다. 이때 귀주사 도첩(58호)을 받았으며, 법명을 순(純)이라 했다.
 
<사진>1971년 일본에서 열린 제3회 세계연방평화촉진종교자대회에 참석한 추담스님(앞줄 가운데). 숭산·청담·월하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추담설법집’
 
서울 삼각산 봉국사에서 회명(晦明)스님을 은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이후 금강산 건봉사 대교과를 수료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 적조암에서 금정산 범어사로 주석처를 옮겨 납자들과 정진했다. 초대 교무부장, 불교신문 초대 주간, 중앙종회 부의장, 법규위원, 감찰위원, 원로 등의 소임을 보면서 불교중흥의 원력을 실천했다.
 
삼각산 적조암, 모악산 금산사, 정족산 전등사, 속리산 법주사, 설악산 신흥사, 소요산 자재암 등의 주지를 맡아 가람수호와 대중외호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수복지구인 설악산 신흥사의 망실재산 회수와 속리산 법주사 정화는 큰 업적으로 손꼽힌다. 일제강점기 불사에 착수했지만 중단된 법주사 미륵대불 공사를 재개해 1964년 회향했다. 노년에 <모순의 합리성>이란 법문집을 냈으며, 입적후 문도들이 <추담설법집>을 펴냈다.
 
1978년 가을에 ‘마지막 선서화전’을 열었고, 상좌와 함께 금생에 인연을 맺은 호남지역 사찰을 순례했다. 영남 사찰도 참배하고자 했으나 성취하진 못했다. 자재암으로 돌아온 스님은 1978년 10월26일(음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81세, 법납 42세. 장례는 조계종 원로장으로 엄수됐으며, 소요산 자재암에 부도를 봉안했다. 진영은 제천 흥국사에 모셔져 있다.
 
법현(전 자재암 주지).경천(공주 갑사).지하(전 중앙종회 의장).법타(동국대 정각원장).법의(전 은해사 주지) 스님 등 60여명의 제자를 두었다.
 
 
[불교신문 2561호/ 9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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