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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83. 금당재순

 

83. 금당재순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폐허가 된 조계총림 복원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금당재순(錦堂在順, 1899∼1973)스님. 촉망받는 송광사의 인재로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조계산을 지키며 평생 수행한 금당스님의 수행과 삶을 조명했다.
 
 
일본 유학 후 평생 송광사 복원불사 매진
 
  취봉스님과 ‘事理·重創의 쌍벽’ 칭송
 
“절집 일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운영
 
 
○…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금당스님은 취봉(翠峰)스님과 함께 ‘송광사의 두 거목(巨木)’으로 역할을 다 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고 여러 차례 송광사 주지를 역임한 석진(錫珍)스님은 금당스님과 취봉스님에 대해 “가히 유학(留學)의 쌍벽이며, 사리(事理)의 쌍벽이고, 중창(重創)의 쌍벽”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금당스님과 취봉스님은 함께 일본 유학에 올랐고, 돌아와서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1951년 송광사 화재 후 도량을 복원하기 위해 당신들의 모든 것을 회향한 어른들이다. 석진스님은 두 스님에 대해 “신묘(辛卯, 1951년)의 회록(回祿, 화재를 나타내는 말)을 만남에 솔선하여 시회대중(時會大衆)과 함께 큰 서원을 세우고 이번에 거룩한 중창을 성취하니”라고 높이 평가했다.
 
○… ‘신묘의 회록’은 1951년 5월 국군의 방화로 발생한 송광사 대화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본지 2514호 ‘선지식의 천진면목’ 취봉창섭스님 편에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천년고찰이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변한 전대미문의 참사가 ‘신묘의 회록’이다. 당시 금당스님은 송광사 주지로 있었는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운 국군에 의해 절에 머물지 못했다. 다시 도량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것은 휴전이 되고나서인 1954년이었다. 취봉.인암(忍庵)스님 등 대중과 함께 송광사에 들어온 금당스님은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역대 조사들이 수호해온 천년고찰이 시커먼 재로 뒤덮인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금당스님 진영.  사진제공=최성휴
 
○… 금당스님은 대중과 함께 송광사 복원불사의 원력을 세웠다. 그렇게 해야만 불보살과 역대 조사의 면목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도량을 수호하지 못한 자책감이 앞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직후의 나라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절집을 복원하는데 국가도 국민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금당스님과 대중은 복원 불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스님의 제자인 최성휴 선생은 몇 년 전 불교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은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한 푼이라도 좋고, 두 푼이면 넉넉한 마음이 드셨답니다. 없는 살림에 보리 한 홉을 내주면 너무 흡족했고, 큰마음을 내어 쌀 한말을 시주해주면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지 않던 시절, 금당스님은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탁발에 나섰다. 신발이 떨어지면 지푸라기로 꽁꽁 묶었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맨발로 걸었다고 한다.
 
○… 탁발을 하면서 봉변을 당하기도 여러 차례. “당장 먹을 식량도 없는데, 어디서 시주를 하라는 것이냐.” “절에 줄 것은 하나도 없소. 당장 우리 집 아니 우리 마을을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요.” 심지어 물벼락을 맞기도 했고, 건달을 만나 뭇매를 피해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금당스님과 송광사 대중은 “우리 대(代)에 불에 탄 도량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 안 된다”면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부처님 도량을 복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참고 또 참았다.
 
○… 송광사 복원에는 스님뿐 아니라 마을주민도 힘을 합쳤다. 법당 지을 재료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송광사 스님들은 주민과 함께 조계산에 올라 나무를 구했다. 산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벤 나무를 절까지 옮기는 것도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과 주민들은 불타버린 송광사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오솔길을 내고, 앞에서는 줄로 끌어당기고 뒤에서는 밀면서 큰 나무를 절까지 옮겼다. 아무래도 험한 일이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금당스님과 송광사 대중은 복원불사의 원만회향을 위해 천일기도에 입재하여 “마장 없이 불사가 회향되기를”기원했다.
 
<사진>구산스님(왼쪽)과 금당스님.
 
○… 금당스님은 송광사 복원불사의 주역 가운데 한 분이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송광사로 출가해 사비(寺費)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도 송광사로 돌아와 평생 큰절과 함께 했다. 스님에게 부처님과 송광사는 전부였다. 스님의 또 하나의 공적을 꼽으라면 정화불사 당시의 일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사찰에서 비구승과 대처승의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됐지만, 송광사는 그 같은 소용돌이에서도 평온을 유지했다. 그 배경에는 금당스님과 취봉스님의 원력이 있었다. “절집 일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풀어야 한다”는 두 분의 뜻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효봉(曉峰)스님을 모셔와 송광사의 천년대계(千年大計)를 이뤄야 한다는 두 분의 말씀에 대중이 동의했다. 이로 인해 송광사는 충돌 없이 정화불사를 성취할 수 있었다.
 
○… 찬바람이 송광사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한겨울 밤, 대중이 하루 수행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금당스님의 한 도반이 왔다. 손도 얼굴도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듯했다. 금당스님이 아랫목을 내주며 물었다. “저녁 공양은 했소.” 도반은 말이 없었다. 살림이 형편없던 시절, 그것도 때가 지난 시간에 왔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송광사 주지를 두 번이나 지낸 금당스님은 조용히 일어나 공양간으로 갔다. 쌀을 씻어 냄비에 담은 후 석유풍로(石油風爐)에 올려 붙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 후 밥상을 차려 공양간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마침 해우소에 가기 위해 나온 행자가 불 켜진 공양간을 보고 달려왔다. “노스님, 뭐하세요.” “흠…” 금당스님은 마른기침만 했고, 행자가 밥상을 갖다드린다는 것도 마다했다. “아직,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야. 자네는 공부나 열심히 하게.” 후배스님이나 행자를 불러도 될 일이지만, 평소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던 스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금당스님 어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지요. 남에게 신세지면 안 됩니다.”
 
“남을 서운하게 하면 안 됩니다. 베풀 수 있으면 남을 돕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지요.”
 
“절집 일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처님 제자라면 상(相)을 내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상을 남기지 말라.”
 
 
 
 
 
■ 금당스님 행장
 
1899년 전남 순천(옛 이름은 승주)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최재순(崔在淳). 마을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의 기초를 닦았다.
 
 
임제大 수학, 은사는 부일스님
 
문화훈장·문교부 포상장 받아
 
 
1918년 순천 송광사 천자암으로 출가했다. 은사는 부일(扶馹)스님. 강원 졸업 후 사중(寺中)에서 소임을 보던 금당스님은 도반 취봉(翠峰, 1898~1983)스님과 함께 일본 경도에 있는 임제대학 전문부에 입학했다. 은사 스님이 “넓은 세계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금당스님은 3년간 학업을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5월11일 국군의 방화로 송광사가 거의 전소(全燒)될 당시 스님은 주지로 있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국군의 경비망을 뚫고 도량에 들어갔지만, 극소수의 전각을 빼고는 지키지 못했다. 이후 스님은 평생 대중과 함께 송광사 복원불사에 모든 것을 던졌다. 두 차례(1950년~1955년, 1956~1963년) 송광사 주지와 한 차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다. 1962년 8월15일 송광사 복원불사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에 앞서 1956년에는 당시 최규남 문교부 장관에게 포상장(褒賞狀)을 받기도 했다.
 
<사진>금당스님이 상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부터 희길스님, 최성휴 선생, 법휘스님, 대휘스님.  사진제공=최성휴
 
송광사 주지 시절에 성보박물관 창건, 나한파상(羅漢破像) 보수, 대웅전 중창, 해탈문 중건 등의 일을 진행했다. 스님은 이밖에도 송광사 대웅전에 삼존상(三尊像)을 모실 때 복장의식을 주관하는 ‘오방법사(五方法師)’ 소임을 보았다.
 
금당스님은 1973년 2월17일(음력) 오후4시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55세. 스님의 유지에 따라 장례는 3일장으로 간소하게 치렀고, 다비한 유골은 조계산에 뿌려졌다. 상좌로 희길(喜吉).대은(大隱).법휘(法輝).대휘(大輝)스님이 있다.
 
 
[불교신문 2596호/ 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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